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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고종의 외교 정책은 한국의 백년대계를 이뤘다고 해도 무방하다. 고종은 당시까지 친영, 친협상국이던 한국의 외교노선을 친독, 친동맹국 노선으로 선회했으며 이는 독일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승리하며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고종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독일과 동맹국 편에 선 덕분에 한국은 승전국 지위를 확보했고, 이는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열강으로 등극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만약 한국이 전쟁에서 협상국 편에 섰다고 하더라도 패전국으로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할 이는 없었겠으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설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고종의 외교 정책은 한국의 백년대계를 이뤘다고 해도 무방하다. 고종은 당시까지 친영, 친협상국이던 한국의 외교노선을 친독, 친동맹국 노선으로 선회했으며 이는 독일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승리하며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고종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독일과 동맹국 편에 선 덕분에 한국은 승전국 지위를 확보했고, 이는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열강으로 등극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만약 한국이 전쟁에서 협상국 편에 섰다고 하더라도 패전국으로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할 이는 없었겠으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설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 ||
이는 온전히 전제군주로서 고종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고종이 무술환국으로 정국을 장악한 이후에도 내각에는 여전히 친영 인사들이 상당히 포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협상국 국가인 프랑스에 의해서 근대화 했고, 독일 또한 상당 부분 참고했으나 대부분의 인재들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유학파 출신이었다. 때문에 상당수의 인사가 고종의 외교노선에 우려를 표했고, [[제1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한 직후에 참전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이는 온전히 전제군주로서 고종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고종이 무술환국으로 정국을 장악한 이후에도 내각에는 여전히 친영 인사들이 상당히 포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협상국 국가인 프랑스에 의해서 근대화 했고, 독일 또한 상당 부분 참고했으나 대부분의 인재들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유학파 출신이었다. 때문에 상당수의 인사가 고종의 외교노선에 우려를 표했고, [[제1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한 직후에 참전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애초에 한국이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는 것도 옳지 않다. 물론 고종의 친정 이후 한일관계가 이전에 비해 우호적이지 않고, 한러 전쟁 이후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한국이 동맹국에 가입한 것은 아니며 전쟁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한일관계를 최종적으로 끝장낸 것은 엄연히 일본이 한국을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한국군이 이 공격에 대비되지 않은 것 부터 한국이 한일관계의 파탄을 바라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
사실 객관적으로 바라봐도 독일에 편에 서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물론 독일은 급성장 하며 영국의 패권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계 정세를 주도하는 것은 영국과 그 협상국이었고, 협상국 편에 선 국가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고종이 이 정책을 강행한 덕분에 한국이 대전쟁의 승전국으로서 열강이 되었으며, 혈맹 독일을 얻을 수 있었다. | |||
===부정적 시각=== | ===부정적 시각=== | ||
고종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로지 결과론적인 시각에 의한 것이다. 당시로서 고종의 외교정책은 매우 재앙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협상국 국가들, 결정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감소하면서 만주 개척과 군사력 증진에 힘 쓰고 있던 한국의 경제는 한러 전쟁과 요동 사변 이후 큰 불경기를 겪었다. 만약 대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거나, 조금 늦어지기만 했어도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를 겪었을 것이다. | 고종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로지 결과론적인 시각에 의한 것이다. 당시로서 고종의 외교정책은 매우 재앙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협상국 국가들, 결정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감소하면서 만주 개척과 군사력 증진에 힘 쓰고 있던 한국의 경제는 한러 전쟁과 요동 사변 이후 큰 불경기를 겪었다. 만약 대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거나, 조금 늦어지기만 했어도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를 겪었을 것이다. |
2024년 11월 11일 (월) 15:5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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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국의 초대 황제로서 고종의 치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의 치세동안 이뤄진 대부분의 업적은 친부 한인헌태왕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으며,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왕권을 행사한 시기의 행적들은 현재까지 큰 논란거리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의 초대 황제"라는 역사 속에서의 위치 때문에 이제는 100년이나 지난 시점의 이야기임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고종의 치세에 대한 논쟁을 꺼내는 것은 매우 꺼려진다.
긍정적 평가
성공적인 확장 정책
아버지 한인헌태왕이 청과의 전쟁에서 간도[1]를 확보하며 그 기반을 다졌다면, 고종은 그 기반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비전과 연해주 일대[2]를 제외한다면 현대 한국 판도는 사실상 고종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고종은 근대화와 자주국가로서 가장 넘기 어려운 ‘러시아’라는 관문을 통과했다. 러시아를 무너뜨림으로서 한국은(비록 당시에는 일본의 경제블록에 속해있었지만)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고종은 훗날 다가올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군사력 증진에 힘썼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체급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한국 재정에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었으나, 고종의 이러한 군증 정책은 제1차 벨트크리그 당시 한국군이 일본을 막아낼 수 있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고종의 외치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한러 전쟁이나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한번만이라도 패배했었다면 현재까지도 한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한인헌태왕의 개혁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한국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주 개척
현대에 들어서야 발달한 농업기술과 지속적인 개척으로 만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만주는 오랜 청의 봉금정책과 척박한 기후로 인해 만주는 그리 살만한 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종은 만주를 개척하기 위해서 전제군주로서의 자신의 리더쉽을 크게 이용했다. 아버지 한인헌태왕 지우기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만주에 관해서는 아버지가 기용한 인사,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확대했다.
압록강 유역에 건설된 공장들을 만주지역으로 확대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인 압록강 벨트가 등장한 것도 이 시점 부터였다. 그리고 이 공장단지들을 유지하기 위해 만주의 풍부한 자원지대를 개발해 한국 경제의 피를 수혈했다. 또한 소작민, 부랑민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소외계층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만주로 이주 시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리하여 만주에 이주한 한국의 부랑민, 소작민, 공장 노동자들과 광산 노동자들은 1세대 만주 개척민이 되어 지금의 만주를 형성하였다. 만약 고종의 적극적인 만주 이주, 개발 정책이 없었다면 만주 개척은 상당히 지연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한국령 만주가 온전히 한국 본토로서 편입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부정적 평가
무술환국과 반동적 정책
북방 출병
개인적인 면모
논란이 있는 평가
외교 정책
긍정적 시각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고종의 외교 정책은 한국의 백년대계를 이뤘다고 해도 무방하다. 고종은 당시까지 친영, 친협상국이던 한국의 외교노선을 친독, 친동맹국 노선으로 선회했으며 이는 독일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승리하며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고종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독일과 동맹국 편에 선 덕분에 한국은 승전국 지위를 확보했고, 이는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열강으로 등극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만약 한국이 전쟁에서 협상국 편에 섰다고 하더라도 패전국으로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할 이는 없었겠으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설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는 온전히 전제군주로서 고종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고종이 무술환국으로 정국을 장악한 이후에도 내각에는 여전히 친영 인사들이 상당히 포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협상국 국가인 프랑스에 의해서 근대화 했고, 독일 또한 상당 부분 참고했으나 대부분의 인재들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유학파 출신이었다. 때문에 상당수의 인사가 고종의 외교노선에 우려를 표했고, 제1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한 직후에 참전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애초에 한국이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는 것도 옳지 않다. 물론 고종의 친정 이후 한일관계가 이전에 비해 우호적이지 않고, 한러 전쟁 이후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한국이 동맹국에 가입한 것은 아니며 전쟁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한일관계를 최종적으로 끝장낸 것은 엄연히 일본이 한국을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한국군이 이 공격에 대비되지 않은 것 부터 한국이 한일관계의 파탄을 바라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객관적으로 바라봐도 독일에 편에 서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물론 독일은 급성장 하며 영국의 패권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계 정세를 주도하는 것은 영국과 그 협상국이었고, 협상국 편에 선 국가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고종이 이 정책을 강행한 덕분에 한국이 대전쟁의 승전국으로서 열강이 되었으며, 혈맹 독일을 얻을 수 있었다.
부정적 시각
고종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로지 결과론적인 시각에 의한 것이다. 당시로서 고종의 외교정책은 매우 재앙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협상국 국가들, 결정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감소하면서 만주 개척과 군사력 증진에 힘 쓰고 있던 한국의 경제는 한러 전쟁과 요동 사변 이후 큰 불경기를 겪었다. 만약 대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거나, 조금 늦어지기만 했어도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를 겪었을 것이다.
더욱이(물론 일본이 갑의 입장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한일 관계는 제법 우호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한 부분에서 서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었고, 이미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일 동맹을 맺어 공동전선을 형성했었다. 고종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러 전쟁까지 한일 동맹을 갱신했다. 일본과의 관계가 그리 수평적이지 못했음에도 당시의 주류는 아시아주의였기 때문에 고종의 무리한 외교노선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일본과의 관계가 깨질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일 관계를 깨트린 주범은 한국이었으며, 고종 덕분에 파국을 맞이한 한일 관계는 제2차 벨트크리그에서 일본이 한국을 공격한 이유,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험악한 양측 국민정서의 원인이 되었다.
애초에 고종이 '독일의 승리를 예측하고' 친독 노선으로 선회했다기에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버지 한인헌태왕이 형성한 기존의 외교관계에 대한 반감, 그리고 개인적인 친독 성향에 의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인적인 사유로 훗날 한국은 일본과 세차례의 전쟁을 치뤄야 했고,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국 본토가 주요 전장이었던 덕분에 수 많은 한국인이 죽는 원인을 제공했다.
고토척식계획은 정말로 필요했는가?
고토척식계획은 필요악이었다.
고토척식계획을 평가하기 위해선 당시 만주 정세를 살펴봐야한다. 당시 만주는 청의 오랜 봉금정책 이후 대륙에서 수 많은 한족이 건너오던 시기였고, 그 수는 천만에 달하고 있었다. 간도[3] 지역에서는 한인 정착민들과 한족 정착민들 간의 충돌이 잦았다. 거기다가 한러 전쟁에서 한일 연합군이 승리하기 전까지 만주에는 러시아의 위협 또한 도사리고 있었다.
만주에 대한 한국의 시각도 한몫 했다. 만주는 대만하고 그 상황이 매우 달랐다. 만주, 특히 남만주 지역은 한민족의 고향이자 부여-고구려-발해까지 이어져왔던 고토였다. 발해의 멸망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에 걸쳐 여러번의 북벌 시도가 있었다. 바다 멀리 떨어져있던 대만하고 달리 만주는 한반도 바로 위에 붙어있는 지역으로서 한국의 안보에 필수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4군6진 이후 수백년만의 영토확장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경험의 부족과 불안이 있었다.
이러한 특이성으로 인해 한국은 만주에 한인들을 이주시켜 확실히 동화시키기를 바랐다. 여기서 당시 한국의 인구가 문제가 됐다. 당시 한국의 인구는 2천만 남짓, 한국령으로 삼은 남만주 지역의 한족만 해도 수백만에 달했다. 개척 이전의 경제성이 부족했던 만주 땅에 적대적이고 타협하기 어려운 이민족이 한국 인구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당시 한국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윤리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당시 한국의 행동은 영락 없는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이었으나, 한국이 고토척식계획에 따라 대추방을 진행하고 성공적인 남만주 개척을 진행한 덕분에 현대의 한국이 완성될 수 있었다.
고토척식계획은 제노사이드에 불과했다.
[검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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