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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은 대마도 해전과 제주도 해전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한국 해군의 주요 전력을 격파시켜 해상 주도권을 획득했고, 부산 사천면 지역(현재 사상구, 사하구, 서구)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쳐 치열한 전투 끝에 동래부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대한제국 황실과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내각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성은 안전합니다"라는 말을 한 뒤 황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도피해버린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 발발 4개월이 안되어 대구 및 호남 일부를 점령함과 동시에 대한제국 내각에 화친을 제안한다. 내용은 한국이 일본제국을 형의 나라로 여기게 하고 제국의 지위를 박탈시키는, 사실상의 괴뢰국이 되라는 조건이였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적극적으로 화친에 나섰으나, 화친조약 직전 황제 직권으로 이완용을 총리대신에서 해임해버리고, 한독당-국민당 내 반이완용계를 규합하여 이동녕 중심의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이후 이완용은 평양에서 탈출하여 원산을 통해 부산에 도착, 일본이 11월 설립한 괴뢰정부인 대한민국 유신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한다. 또한 내각은 황실의 강력한 지지아래 12월 21일,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다.
이후 일본은 대마도 해전과 제주도 해전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한국 해군의 주요 전력을 격파시켜 해상 주도권을 획득했고, 부산 사천면 지역(현재 사상구, 사하구, 서구)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쳐 치열한 전투 끝에 동래부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대한제국 황실과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내각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성은 안전합니다"라는 말을 한 뒤 황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도피해버린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 발발 4개월이 안되어 대구 및 호남 일부를 점령함과 동시에 대한제국 내각에 화친을 제안한다. 내용은 한국이 일본제국을 형의 나라로 여기게 하고 제국의 지위를 박탈시키는, 사실상의 괴뢰국이 되라는 조건이였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적극적으로 화친에 나섰으나, 화친조약 직전 황제 직권으로 이완용을 총리대신에서 해임해버리고, 한독당-국민당 내 반이완용계를 규합하여 이동녕 중심의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이후 이완용은 평양에서 탈출하여 원산을 통해 부산에 도착, 일본이 11월 설립한 괴뢰정부인 대한민국 유신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한다. 또한 내각은 황실의 강력한 지지아래 12월 21일,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다.
* 1917
* 1917
1916년 안에 전쟁을 끝낸다는 일본 내각의 계획이 실패하여 경기도 남부-강원도를 중심으로 전선이 교착되면서 점점 일본은 초조해진다. 이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한단계 낮은 조건으로 화친을 제안하나, 내각은 그에 대한 회신도 하지 않았고, 중추원에서는 독일제국 중심의 동맹국에 가입안을 가결시킨다. 이에 러시아는 동아시아 전선 개입을 검토했으나 유럽에 집중해야한다는 이유로 개전하지는 않았다.대한제국이 독일제국 편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한걸 본 일본 정부는 한국이 미쳤다며 환호성을 질렀으나, 지속해서 실질적인 전선 변화 없이 고착상태가 계속되자 벙찌게 되어버린다. 이에 개빡친 일본정부는 러시아에게 차라리 대한제국을 칠 길이라도 내어달라 요구했으나, 씹힌다.
1916년 안에 전쟁을 끝낸다는 일본 내각의 계획이 실패하여 경기도 남부-강원도를 중심으로 전선이 교착되면서 점점 일본은 초조해진다. 이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한단계 낮은 조건으로 화친을 제안하나, 내각은 그에 대한 회신도 하지 않았고, 중추원에서는 독일제국 중심의 동맹국에 가입안을 가결시킨다. 이에 러시아는 동아시아 전선 개입을 검토했으나 유럽에 집중해야한다는 이유로 개전하지는 않았다.그 이후 지속해서 실질적인 전선 변화 없이 고착상태가 계속되자 군부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러시아에게 차라리 대한제국을 칠 길이라도 내어달라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 1918
* 1918
전선은 여전히 교착상태이고, 설상가상 러시아가 혁명으로 인해 사실상 세계대전에서 빠지게 되면서, 일본에게는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에 서서히 꺾이는 일본군의 사기를 파악한 한국군이 '''긴빠이 작전'''<ref>나중에 바꿀거다</ref>으로 일본군을 낙동강까지 밀어낸것은 물론, 호남을 완전히 탈환하게 된다. 결국 일본군은 사실상의 패배를 확정지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철수 및 한국과의 협상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지만, 이를 군부가 씹어버리고 막가파로 총리를 암살한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전쟁은 계속되게 된다. 거기에 낙동강전선에서 한국군이 더 이상 공격을 할수없으리라 판단한 일본군이 이완용을 회담의 이름으로 도쿄에 부른뒤 감금, 유신정부를 멸망시키고 부산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뻐기기에 들어간다.
전선은 여전히 교착상태이고 안그래도 견고하지 못했던 일본 경제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붕괴된다. 이에 일본의 ■■ ■■■■■ 내각은 군부와의 합의 없이 한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군부는 총리를 암살하고 군부의 수장격인 ■■■ ■■■■가 스스로 내각총리대신에 오르게 된다.
* 1919
* 1919
유럽에서의 전쟁은 거의 끝났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점점 장기화되며 양국 국민들은 물론 양국의 군부내에서도 빨리 전쟁을 끝내버리자는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특히 3월 26일, 아미앵이 독일에게 합락되며 협상국의 붕괴가 점쳐지자 일본에서는 빨리 평화조약을 체결하라는 의견이 대다수가 된다. 허나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던 군부는 이를 완강히 거부, 최후의 대공세인 아카파 작전을 통해 전세역전을 시도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11월 협상국이 항복하자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발생하여 군부가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12월 25일, 일본은 한국에게 전쟁배상금 지불 및 대마도를 할양하며 전쟁을 종결시켰다. 허나 일본 내에서의 시위는 멈추지않았고... 새해 직전인 12월 30일 군부는 담화를 통해 총사퇴를 발표한다.
군부는 정체되어있는 전선에 대한 타개책으로 인천부에 상륙을 준비하게 되고, 1919년 3월, 남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하지만 사전에 이를 예측했던 한국에선 방어병력을 배치해놨고, 치열한 전투 끝에 상륙에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한국 후속병력이 도착하자 상륙군 대부분이 전멸당한다. 상륙작전의 실패 후 몇일만인 3월 26일, 아미앵이 독일에게 합락되며 협상국의 붕괴가 점쳐지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 ■■■■은 자살하고, 총리  권한대행 ■■■■ ■■■■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다.
*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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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간기 ==
== 전간기 ==

2022년 10월 30일 (일) 23: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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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본 문서는 동아시아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 1914

1914년 일본이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해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 이때 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이 독일의 동아시아 식민지를 대거 점령한다.

  •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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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

일본 해군이 한국의 함대가 일본의 영해를 침범한 것을 포착(일본 해군의 주장)하고 수차례 경고했으나 영해에서 나가지 않았고, 이에 일본 해군이 포격을 감행해 한국 구축함 1척이 침몰한다. 이에 한국 해군이 반격해 일본의 어느 경순양함 2척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자신의 정당한 대응에 불법적으로 반격한 한국은 피해금을 보상하라"고 요구했고, 한국은 "우리 해군이 일본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는데 포격한 일본 해군이 잘못된 것이므로 일본이 우리에 보상해야된다"라며 맞불을 놓았고, 원래부터 한국을 노리던 일본은 급발진하여 1916년 6월 25일, 선전포고한다.

이후 일본은 대마도 해전과 제주도 해전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한국 해군의 주요 전력을 격파시켜 해상 주도권을 획득했고, 부산 사천면 지역(현재 사상구, 사하구, 서구)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쳐 치열한 전투 끝에 동래부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대한제국 황실과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내각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성은 안전합니다"라는 말을 한 뒤 황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도피해버린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 발발 4개월이 안되어 대구 및 호남 일부를 점령함과 동시에 대한제국 내각에 화친을 제안한다. 내용은 한국이 일본제국을 형의 나라로 여기게 하고 제국의 지위를 박탈시키는, 사실상의 괴뢰국이 되라는 조건이였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적극적으로 화친에 나섰으나, 화친조약 직전 황제 직권으로 이완용을 총리대신에서 해임해버리고, 한독당-국민당 내 반이완용계를 규합하여 이동녕 중심의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이후 이완용은 평양에서 탈출하여 원산을 통해 부산에 도착, 일본이 11월 설립한 괴뢰정부인 대한민국 유신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한다. 또한 내각은 황실의 강력한 지지아래 12월 21일,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다.

  • 1917

1916년 안에 전쟁을 끝낸다는 일본 내각의 계획이 실패하여 경기도 남부-강원도를 중심으로 전선이 교착되면서 점점 일본은 초조해진다. 이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한단계 낮은 조건으로 화친을 제안하나, 내각은 그에 대한 회신도 하지 않았고, 중추원에서는 독일제국 중심의 동맹국에 가입안을 가결시킨다. 이에 러시아는 동아시아 전선 개입을 검토했으나 유럽에 집중해야한다는 이유로 개전하지는 않았다.그 이후 지속해서 실질적인 전선 변화 없이 고착상태가 계속되자 군부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러시아에게 차라리 대한제국을 칠 길이라도 내어달라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 1918

전선은 여전히 교착상태이고 안그래도 견고하지 못했던 일본 경제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붕괴된다. 이에 일본의 ■■ ■■■■■ 내각은 군부와의 합의 없이 한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군부는 총리를 암살하고 군부의 수장격인 ■■■ ■■■■가 스스로 내각총리대신에 오르게 된다.

  • 1919

군부는 정체되어있는 전선에 대한 타개책으로 인천부에 상륙을 준비하게 되고, 1919년 3월, 남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하지만 사전에 이를 예측했던 한국에선 방어병력을 배치해놨고, 치열한 전투 끝에 상륙에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한국 후속병력이 도착하자 상륙군 대부분이 전멸당한다. 상륙작전의 실패 후 몇일만인 3월 26일, 아미앵이 독일에게 합락되며 협상국의 붕괴가 점쳐지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 ■■■■은 자살하고, 총리 권한대행 ■■■■ ■■■■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다.

전간기

1920년대

  • ~1930

선빵을 친 일본에게 전쟁배상금을 받아낸것은 물론, 대마도는 조선땅이라는 가사를 실현시켜 버린 한국은 극강의 애국주의 열풍에 빠진다. 허나 이와는 별개로 호남을 비롯한 영남권이 초토화된 상태였기에 조선은 일본에게 뜯어낸 배상금을 모조리 경제발전에 쏟아부어야 했다.[1] 또한 이동녕의 거국내각이 붕괴해버리고 한국독립당이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파독립당[2]과 당시 당내 청년진보의 거두였던 조소앙으로 대표되는 좌파독립당[3]으로 분당되면서 정치 갈등이 심화된다. 이에 본래 친일성격의 정당인 국민당이 어부지리로 집권했으나, 당내 외교적 중립노선을 표명했던 윤치호를 총리로 내세웠음에도 전국민적 반발로 인해 1년이 안되어 의회를 해산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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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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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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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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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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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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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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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1. 여담으로 이때 이완용이 한국으로 소환당해 반제국유지법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2. 공식 당명은 독립촉성회
  3. 공식 당명은 대한사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