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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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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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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방전 Battle of Berlin Берли́н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Schlacht um Berl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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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바그라티온 작전의 일부 | ||||||||||||||||||
날짜 | 1941년 10월 2일~1942년 1월 7일 | |||||||||||||||||
장소 |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근교[1] , 브란덴부르크 | |||||||||||||||||
결과 | 독일제국의 결정적 역전승 | |||||||||||||||||
영향 | 바그라티온 작전의 중단 및 실패 베를린의 대한 공략 저지 천왕성 작전이 준비 되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드레스덴 공방전이 시작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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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삶을 위해 |
개요
베를린은 독일의 품에 남을 것이다! 독일군의 선전 구호 |
1941년 10월 2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근교에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과 팍트군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희생을 치룬 끝에 극적인 승리를 맞이하면서 러시아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중단되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 국방군은 빌헬름 2세가 칩거 중이던 베를린 성에 최고로 근접해 베를린성을 쌍안경으로 관측도 할 수 있었는데, 베를린에서 불과 30km 남쪽에 떨어진 코닉스 부스테르하우젠까지 도달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독일이 혹독한 겨울과 치열한 시가전 속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킨 이미지는 대부분 이 전투를 의미한다.
베를린 코앞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저지 시켰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 때의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반복됐다고 부르기도 한다.
서론
베를린 공방전은 제2차 독러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손꼽힌다. 보리스 사빈코프는 베를린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보았으며,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라이히스팍트를 붕괴 시키고 전후 제3 인터내셔널과의 기여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때문에 독일의 입장에서도 베를린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만 하는 도시였다.
본래 바그라티온 작전대로라면 러시아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시작하고 최소한 41년 중순에는 베를린에 근접해있어야했다. 그러나, 바그라티온 작전 초기 팍트군 수십만명을 섬멸하거나 포로로 잡는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팍트군의 끈질긴 저항은 러시아군의 피해를 서서히 누적 시키며 러시아군의 진격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러시아군은 베를린 120km 근방의 구데리안 라인까지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으로 너무나도 길어진 보급로는 러시아군의 빈약한 보급체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상황에서 시작된 갑작스러운 폭설은 러시아군의 공세 수행 능력을 심각하게 마비 시키고 있었다. 허나, 독일군은 이미 베를린에서의 결전을 예견하고서 베를린에 막대한 물자와 동계 장비들을 비축해둔 상태였다.
12월초, 러시아군의 정찰 부대가 베를린성에서 남쪽으로 30km까지 떨어진 곳으로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관측할 수 있었으나, 이미 주력부대는 빈약한 보급과 추위로 인한 약화된 전력. 그리고 독일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12월 5일, 독일군은 새로이 신설된 사단들과 국민척탄병, 국민돌격대들까지 총동원하여 베를린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독일군의 반격은 해를 지나 1942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러시아군을 베를린에서 100km 거리까지 후퇴 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 전투를 통해 독일군은 개전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군의 공세를 좌절 시켰지만, 수십만명에 달하는 참혹한 인명 손실이 그 대가로 따랐다. 베를린 공방전은 러시아군이 1941년 개전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패퇴한 전투로 러시아군 역사상 전환점이 된다. 러시아군 장성의 상당수가 해임되었으며, 보리스 사빈코프가 러시아 국방군 총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되는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배경
1941년 6월 22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과 라이히스팍트를 침공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전선군으로 나뉘어 세 갈래로 진격했고 각각의 목표는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였던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부다페스트였다. 그중 주공은 단연 독일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공략하는 벨라루스 전선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 근위 기갑군과 제3 근위 기갑군이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벨라루스 전선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9달 만에 독일 본토 바로 앞의 바르샤바에 도달했다. 발트전선군도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고전했다. 유능한 지휘관인 라이헤나우의 남부집단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도와 러시아군을 저지 중이었고, 이탈리아에 의해 빈이 함락 됐음에도 불구, 러시아의 예상보다 남은 오스트리아군이 많고 강력했었으며 동맹군의 진격이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계획한 발트와 벨라루스 전선군의 목표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요구 받고 있었다. 발트 전선군의 도달 목표인 쾨니히스베르크는 제3 인터내셔널의 방해로 인한 독일 발트함대의 지원 불가, 빈약했던 발트 연합 공국의 전력,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독일 동방주의 반발로 인한 라이히스팍트 내부의 갈등으로 그럭저럭 진격할 수 있었고, 벨라루스 전선군의 도달 목표인 베를린은 벨라루스 친러 세력의 도움과, 벨라루스 내부 정치적 변동으로 제한 받고 있던 독일군의 빈약했던 병력 배치로 중부 집단군을 재빠르게 격파하고나서는 러시아 보다 우수한 독일 철도를 따라 그럭저럭 진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일단 지도상의 거리에서 가장 먼 바이에른까지 가야했으며, 가는 길은 평탄한 우크라이나였지만 도로가 뚫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벨라루스나 발트 3국과는 달리, 반러 세력이 많았고 체급도 큰편이었다. 이에 러시아군도 동부전선에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에 상당한 전력을 배치하였지만, 발트나 벨라루스 전선군의 상황과는 달랐다.
이때 사빈코프는 벨라루스 전선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 근위 기갑군을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원조하는 데 돌린다. 제2 근위 기갑군 사령관 마르코프는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사빈코프는 "독일의 동맹국을 붕괴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부다페스트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
부다페스트에 입성하는 러시아군. |
8월에 남부로 전출된 마르코프군은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팍트군이 30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포로를 65만 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마르코프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도 38만의 손실을 입어서 상당 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독일의 동맹이 사실상 붕괴 국면에 접어들자 사빈코프는 다시 벨라루스 전선군의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발트 전선군에서 제4 근위 기갑군(바실렙스키 대장)까지 벨라루스 전선군으로 전출시켜 '목성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러시아군이 목표로 했던 베를린의 가치는 매우 컸다. 우선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독일 수뇌부의 근거지인데다, 라이히스팍트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병력과 보급물자들이 축적되어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을 점령하면 독일과 라이히스팍트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지상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7월 말, 러시아군은 뱌체슬라프 트카초프의 주도로 베를린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파괴해서 독일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으나 의외로 튼튼한 독일의 대공 방어[3]와 강력한 루프트바페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베를린에 대한 지상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의 진격
조용한 서부
독일이 병력을 한쪽으로 집중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러시아는 공동교전국인 인터내셔널에게 서부전선에서 공세할 것을 계속 요청했으나 인터내셔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터내셔널은 독러전쟁 발발 불과 2달 전에 라인 강 대공세에서 총체적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모든 역량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러시아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일전에 독-러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인터내셔널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한 바 있었다. 당시 인터내셔널은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반독동맹의 동맹국이 협정의 주적이자 인터내셔널의 주적과 손잡은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인터내셔널 러시아가 반독 보다 반공을 우선시 할 것이라 여길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해서도 사빈코프가 인터내셔널에 알리지 말라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프랑스 코뮌 외무장관이 독일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한달 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곧 전쟁이 일어날거 같다는 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러니 인터내셔널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이후 러시아가 먼저 독-러 불가침조약을 깨 버리고 독일을 공격한 것을 본 인터내셔널은 회의를 했고, 브리튼이 주축으로 공세에 실패한 라인 강 대신 독일 북부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브리튼군이 주축이 된 함부르크 공방전 마저 오데르-나이세 공세가 시작되기 한달 전에 실패로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서부방벽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와중에 브리튼에 있는 독일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인터내셔널이 적어도 몇달 간 인터내셔널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보내 왔는데 이미 조르게는 바그라티온 작전 몇 달 전에 러시아의 침공이 6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독일에 알린 적이 있었다.[4] 당연히 헤르만 뮐러의 조르게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져 있었고 이에 따라 서부에 주둔했던 병력 중 일부를 동부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초기 진격
10월 2일, 러시아군은 베를린 점령을 목표로 작전을 개시했다. 표트르 브란겔 벨라루스 전선군 사령관은 작전에 앞서서 "동장군이 오기 전인 11월 7일까지 작전을 끝내야 한다"고 훈시했다.
러시아군의 목표는 특유의 종심 돌파 전법으로 베를린 정면의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방의 바익셰 집단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베를린 주변에 3중 방어망을 형성하고 러시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젠휘텐스타트를 향한 러시아군의 제3, 제4 근위 전차군은 중부 집단군을 종심 돌파하여 포위했으나, 여름이나 가을과는 달리 독일군은 포위되어도 대규모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저항했다. 그리하여 러시아군은 예비병력을 이들을 섬멸하는 데 써야 했다. 한편 마르코프의 2 근위 기갑군과 데니킨의 제2군은 남방에서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며 여기서도 바익셰 집단군은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저항으로 러시아군을 애먹였으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패배가 잇따르자 빌헬름 2세와 헤르만 뮐러의 전시 내각은 베를린 방위에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10월 13일에는 독일 정부의 모든 부서를 엘베 강 서안의 뉘른베르크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또한 베를린에 위치한 외국의 외교 공관들에게 베를린에서 탈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베를린 시민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피난 가려는 사람과 약탈하는 사람, 또는 절망하는 사람으로 무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 며칠 내로 러시아군이 베를린 시내에 입성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가게의 점주들은 가게 문을 열며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 가져가라. 러시아놈들이 가져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외칠 정도였다.
결국 10월 15일 하노버행 열차가 라이히스탁의 의원들을 실어날랐고, 빌헬름 2세와 헤르만 뮐러 전시총리를 비롯한 정부 수반도 익일 새벽에 기차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일이 되자 이들은 기차 탑승을 거부하고, 베를린을 떠나지 않고 사수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때 러시아군은 전방 30km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행정 부서는 하노버로 이전되었고 다른 정부 요인들은 모두 도피시켰으면서도 스스로는 베를린 공방전 내내 베를린 궁과 라이히스탁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비밀경찰과 게슈타포 요원들이 시내에 들어와 치안을 맡으면서 베를린 시내는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이 부대들은 약탈자들을 잡는 족족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겠다고 공표했고, 진짜로 실천하며 이름값을 했다.
발터 모델의 등장
작전 지도를 보는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 대장 |
빌헬름 2세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베를린 방위를 담당한 중부집단군의 사령관인 페도어 폰 보크로는 도저히 러시아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함락 직전의 쾨니히스베르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발터 모델 상급 대장을 10월 10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빌헬름 2세는 모델에게 "귀관은 정말 베를린을 사수할 수 있겠는가?"고 물었고 모델은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겠지만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던 빌헬름 2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예비 병력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이라고 답했다. 모델은 당시 참모차장이었던 페르디난트 쇠르너와 함께 방어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독러전 초반 엄청난 대패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신속히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다. 엘베 강 유역과 식민지에 건설해 놓은 공업 지대에서는 우선 무기를 미친 듯이 뽑아내었으며, 후방에서는 계속 새로운 사단이 창설되고 있었다. 또한, 상술했던 슈코르체니의 첩보에 따라 알프스와 북유럽에서 재배치된 정예 사단들은 스칸디나비아와 알프스의 혹독한 겨울에 단련되어 동계 작전에 능했다.
젤로 고지 전투
젤로고지의 팔슈름예거 병사들[5] |
동장군의 도래
독일군의 반격
발터 모델의 역습
슈타이너의 공격 직후 전황의 변화 |
러시아군의 대규모 인사
빌헬름 3세의 무리한 반격 계획과 소강 상태
결과
기타
어록
서부전선의 병사들이여 동지들이여, 오늘 결정적이고 위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 보리스 사빈코프가 베를린 공방전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보낸 편지 |
허풍쟁이 슬라브 선동꾼들이 끊임없이 요란하게 알린 것처럼, 나치 러시아의 군대는 정말 무적인가? 물론, 아니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란 없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빌헬름 2세, 라디오 연설에서 |
베를린 수비대여! 제군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제군을 지켜보고 있다. 제군에게 그들의 인생, 운, 신변 그리고 미래가 달려있다. 제군이 제군의 임무를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제군이 그 임무를 매우 훌륭히 수행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실의 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 (중략) 나는 내 선전부 직원들과 베를린에 남을 것을 확언한다. 나의 아내와 아이들도 베를린에 있고 그들은 베를린에 남을 것이다. 카이저 폐하와 총리 또한 그럴 것이고, 우리 정부는 제국 수도에 대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실시할 것이다. 나의 행동과 생각은 전적으로 국민들의 삶과 우리의 공통 적에 대한 방어를 위한 것이다. 우리 수도의 방어벽에 몽골의 폭풍은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수도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국가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정적 전투가 될 것이다. 열성적인 수비대는 슬라브 놈들의 손에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전투와 과업앞에 굳건히 서있다. 우리의 목표는 국민의 자유와 다가오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제국의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괴벨스 선전부 장관, 상황이 급박했음을 증명해주듯 간간히 포성이 들린다. |
자유는 독일과 함께 서거나 함께 쓰러진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헤르만 뮐러 전시 총리. 러시아군이 베를린 시내 코앞까지 왔다는 보고를 듣고서. |
- ↑ 베를린 시내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 ↑ 10월 10일 해임
- ↑ 특히나 베를린 동물원 대공포탑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동물원 대공포탑은 러시아군의 무지막지한 폭격에도 견뎌냈으며, 이후 독일 루프트바페에 비하면 한수 아래인 러시아 공군의 수준을 인정하고 루프트바페와 대등한 수준, 더 많은 전력을 가지고 있던 인터내셔널의 공군과 연합하여 베를린을 폭격했음에도 종전 끝까지 베를린의 상공을 굳건히 지켰다.
- ↑ 당시 뮐러는 이를 인터내셔널 흘린 미끼라고 생각해 무시했다.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하면 서부전선의 병력을 차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뮐러와 그의 내각은 적어도 45년까지는 러시아가 동부전선이라는 거대한 전역을 수행할 역량이 없다고 봤다.
- ↑ 1941년 말, 시제형으로 극소수 보급된 MKB42와 판처파우스트 초기형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