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태황제/평가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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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레펠트 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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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국의 초대 황제로서 고종의 치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의 치세동안 이뤄진 대부분의 업적은 친부 흥선헌문대원왕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으며,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왕권을 행사한 시기의 행적들은 현재까지 큰 논란거리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의 초대 황제"라는 역사 속에서의 위치 때문에 이제는 100년이나 지난 시점의 이야기임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고종의 치세에 대한 논쟁을 꺼내는 것은 매우 꺼려진다.

긍정적 평가

성공적인 확장 정책

아버지 흥선대원왕이 청과의 전쟁에서 간도[1]를 확보하며 그 기반을 다졌다면, 고종은 그 기반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비전과 연해주 일대[2]를 제외한다면 현대 한국 판도는 사실상 고종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고종은 근대화와 자주국가로서 가장 넘기 어려운 ‘러시아’라는 관문을 통과했다. 러시아를 무너뜨림으로서 한국은(비록 당시에는 일본의 경제블록에 속해있었지만)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고종은 훗날 다가올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군사력 증진에 힘 썻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체급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한국 재정에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었으나, 고종의 이러한 군증 정책은 제1차 벨트크리그 당시 한국군이 일본을 막아낼 수 있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고종의 외치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한러 전쟁이나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한번만이라도 패배했었다면 현재까지도 한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흥선대원왕의 개혁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한국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주 개척

현대에 들어서야 발달한 농업기술과 지속적인 개척으로 만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만주는 오랜 청의 봉금정책과 척박한 기후로 인해 그리 살만한 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종은 만주를 개척하기 위해서 전제군주로서의 자신의 리더쉽을 크게 이용했다. 아버지 흥선대원왕 지우기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만주에 관해서는 아버지가 기용한 인사,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확대했다.

압록강 유역에 건설된 공장들을 만주지역으로 확대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인 압록강 벨트가 등장한 것도 이 시점 부터였다. 그리고 이 공장단지들을 유지하기 위해 만주의 풍부한 자원지대를 개발해 한국 경제의 피를 수혈했다. 또한 소작민, 부랑민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소외계층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만주로 이주 시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리하여 만주에 이주한 한국의 부랑민, 소작민, 공장 노동자들과 광산 노동자들은 1세대 만주 개척민이 되어 지금의 만주를 형성하였다. 만약 고종의 적극적인 만주 이주, 개발 정책이 없었다면 만주 개척은 상당히 지연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한국령 만주가 온전히 한국 본토로서 편입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부정적 평가

논란이 있는 평가

외교 정책

긍정적 시각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고종의 외교 정책은 한국의 백년대계를 이뤘다고 해도 무방하다. 고종은 당시까지 친영, 친협상국이던 한국의 외교노선을 친독, 친동맹국 노선으로 선회했으며 이는 독일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승리하며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고종이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독일과 동맹국 편에 선 덕분에 한국은 승전국 지위를 확보했고, 이는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열강으로 등극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만약 한국이 전쟁에서 협상국 편에 섰다고 하더라도 패전국으로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할 이는 없었겠으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설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는 온전히 전제군주로서 고종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고종이 무술환국으로 정국을 장악한 이후에도 내각에는 여전히 친영 인사들이 상당히 포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협상국 국가인 프랑스에 의해서 근대화 했고, 독일 또한 상당 부분 참고했으나 대부분의 인재들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유학파 출신이었다. 때문에 상당수의 인사가 고종의 외교노선에 우려를 표했고, 제1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한 직후에 참전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바라봐도 독일에 편에 서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물론 독일은 급성장 하며 영국의 패권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계 정세를 주도하는 것은 영국과 그 협상국이었고, 협상국 편에 선 국가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고종이 이 정책을 강행한 덕분에 한국이 대전쟁의 승전국으로서 열강이 되었으며, 혈맹 독일을 얻을 수 있었다.

부정적 시각

고종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로지 결과론적인 시각에 의한 것이다. 당시로서 고종의 외교정책은 매우 재앙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협상국 국가들, 결정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감소하면서 만주 개척과 군사력 증진에 힘 쓰고 있던 한국의 경제는 한러 전쟁과 요동 사변 이후 큰 불경기를 겪었다. 만약 대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거나, 조금 늦어지기만 했어도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를 겪었을 것이다.

더욱이(물론 일본이 갑의 입장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한일 관계는 제법 우호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한 부분에서 서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었고, 이미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일 동맹을 맺어 공동전선을 형성했었다. 고종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러 전쟁까지 한일 동맹을 갱신했다. 일본과의 관계가 그리 수평적이지 못했음에도 당시의 주류는 아시아주의였기 때문에 고종의 무리한 외교노선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일본과의 관계가 깨질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일 관계를 깨트린 주범은 한국이었으며, 고종 덕분에 파국을 맞이한 한일 관계는 제2차 벨트크리그에서 일본이 한국을 공격한 이유,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험악한 양측 국민정서의 원인이 되었다.

애초에 고종이 '독일의 승리를 예측하고' 친독 노선으로 선회했다기에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버지 흥선대원왕이 형성한 기존의 외교관계에 대한 반감, 그리고 개인적인 친독 성향에 의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인적인 사유로 훗날 한국은 일본과 세차례의 전쟁을 치뤄야 했고,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국 본토가 주요 전장이었던 덕분에 수 많은 한국인이 죽는 원인을 제공했다.

고토척식계획은 정말로 필요했는가?

  1. 현재 연화도의 일부
  2. 현재 연화도와 북위부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