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덴 대공세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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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레펠트 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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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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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공격측 방어측
1939년
독일 침공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본토 항공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러시아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티롤 전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도나우 연방
딜 계획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벨기에
네덜란드
론세 전차전 독일제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브뤼셀 전투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벨기에
1940년
아일랜드 전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아일랜드
독일제국
켈트 해 해전 독일제국
아일랜드
브리튼 연방
라인 연습 작전 독일제국
아일랜드
브리튼 연방
포르투갈 침공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포르투갈
캐나다 자치령
프랑스 공화국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미합중국
독일제국
오스만 제국
프랑스 공화국
포르투갈
캐나다 자치령
에티오피아 제국
아헨 전투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라이히스페르타이티궁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1941년
라인 강 대공세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바그라티온 작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폴란드 왕국
벨로루시아
발트연합공국
리투아니아
핀란드 왕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차르국
바브뤼스크-민스크 전투 러시아국 독일제국
벨로루시아
겨울전쟁 러시아국 핀란드 왕국
독일제국
캅카스 전투 러시아국 오스만 제국
함부르크 공방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덴마크 왕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우크라이나
도나우 연방
쿠를란트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발트연합공국
제1차 부다페스트 전투 러시아국
루마니아
도나우 연방
독일제국
자유 우크라이나군
쾨니히스베르크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베를린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자유 폴란드군
벨라루스 국민군
한니발 작전 독일제국
발트연합공국
리투아니아
핀란드 왕국
스웨덴 왕국
덴마크 왕국
러시아국
1942년
슈테틴 전투 독일제국 러시아국
천왕성 작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드레스덴 공방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청색 작전 독일제국 러시아국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독립국
토성 작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1943년
겨울폭풍 작전 독일제국 러시아국
포젠 전투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폴란드 망명정부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벨로루시아 망명정부
성채 작전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폴란드 망명정부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벨로루시아 망명정부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국
1944년
1945년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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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 · 독일 본토 항공전 |
10월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 브뤼셀 전투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1월
아일랜드 전역 |
3월
켈트 해 해전 |
4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5월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
6월
포항 상륙작전 |
7월
아헨 전투
1941년
2월
라인 강 대공세 ·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독러전쟁, 겨울전쟁 발발) |
7월
함부르크 공방전 · 대한 해협 돌파 작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개성 전투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4월
백마고지 전투 |
7월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10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2월
제3차 브레슬라우 전투 |
7월
포젠 전투 |
12월
낫질 작전(아르덴 대공세)
1944년
5월
제3차 부산 전투 |
6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7월
사빈코프 암살 미수 사건 |
8월
키이우 봉기 |
9월
샤른호르스트 작전
1945년
1월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브리튼 전투(바다사자 작전 · 귀향 작전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아르덴 대공세 (벌지 전투)
Battle of the Bulge/Ardennes Counteroffensive
Unternehmen Wacht am Rhein[1]/Ardennenoffensive
La bataille des Ardennes, Opération Wacht am Rhein
제2차 벨트크리그낫질 작전의 일부
날짜 1943년 12월 16일 ~ 1944년 1월 25일
장소 아르덴 숲 일대
결과 독일의 승리
영향 독일의 아르덴 숲 돌파 성공
낫질 작전 성공의 결정적인 역할
프랑스 코뮌의 패망 가속화
교전국
라이히스팍트
독일국
제3 인터내셔널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병력
◆ 1월 16일 기준

- 병력 483,016명
- 21개 보병사단
- 10개 기갑사단
- 2개 보병여단
- 전차 2016대
- 장갑차 5207대
- 대전차포/각종 포 4,256문
- 돌격포 3014문

◆ 1월 16일 기준

- 병력 700,520명
- 22개 보병사단
- 8개 기갑사단
- 2개 기갑여단
- 전차 2,428대
- 장갑차 7,079대
- 대전차포/각종 포 3,181문
- 돌격포 1,912문

피해규모
- 전사 28,652명

- 포로/실종 30,582명
- 부상 51,600명
- 전차/포 1000대 이상 손실
- 항공기 800대 이상 손실

- 전사 56,276명

- 포로/실종 43,554명
- 부상 84,493명
- 전차/포 2000대 이상 손실
- 항공기 1047대 손실

지휘관
에르빈 롬멜
발터 모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핫소 폰 만토이펠
요제프 디트리히
아르덴의 한스

개요

전투 당시의 지도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알프레트 요들 독일군 SOK 작전부장.

제2차 벨트크리그 중인 1943년 12월 16일부터 1944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제국군의 겨울 대공세인 황색 상황의 낫질작전으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영미권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룬트슈테트 공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전세를 역전 시켜가던 독일군이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인터내셔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며 아르덴을 돌파하고 낫질 작전을 성공 시키게 된다. 낫질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인터군을 완전히 분쇄해버렸다. 이렇게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은 독일군은 동부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 시킬 수 있게 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배경

인터내셔널군의 회심의 한방이었던 마켓가든 작전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고, 곧바로 개시된 역습에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독일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베네룩스까지 싹 밀릴 상황에 처하자 인터내셔널군은 제방을 폭파해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동부전선에서 봄의 새싹 작전의 개시를 코앞에 둔 독일군의 입장에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와 협상군이 스페인 남부와 이탈리아에 상륙한 시점에는 서부전선의 인터내셔널군은 132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2] 그나마 남아 있는 사단의 병력도 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3] 그나마 베네룩스의 제방을 폭파해버린 덕분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느정도 막아주었지만, 이 방어선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독일 입장에서도 언제까지나 맘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던 것이 독일은 서부전선 보다 동부전선에서 아예 알박기를 시도하려던 러시아를 몰아내는 것이 더 급했던 상황에서 서부전선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었다. 이에 빌헬름 3세는 그때까지 서부전선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던 독일군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전격적으로 돌파하여 베네룩스 지역의 인터내셔널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일련의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확히는 인터내셔널군을 최대한 몰아세워서, 인터내셔널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해 버리면 인터내셔널군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것.[4]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 이후 독일군의 공세에 서서히 밀려가던 인터내셔널군은 독일 북서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던 철도와 항구 따위의 기반시설들을 직접 파괴하거나 최대한 사수하여 독일군의 보급 거점 확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인터내셔널군이 붙들고 있던 몇몇 철도 중심지들은 인터내셔널군이 항복하고 나서야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뤼티히 작전을 통해 네덜란드 강습을 시도한 것도 베네룩스 3국 연안의 항구 도시들과 제방들을 인터내셔널의 초토화 작전 이전에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뤼티히 작전으로 독일군은 독일 북서부에서 인터내셔널을 몰아냈으나 최종 목표였던 암스테르담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아른헴에서 돈좌되면서, 인터내셔널은 방어선을 안정 시킬 수 있었고 독일군의 진격은 예정보다 훨씬 둔화됐다. 간신히 방어선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인터내셔널의 상황도 녹록치 못했다. 베네룩스는 이제 최전방이었고, 카이저마리네의 방해와 루프트바페의 집요한 공습으로 프랑스 북부의 주요항구들을 사용하기 어렵게 되면서 프랑스 코뮌과 함께 인터내셔널의 주축이던 브리튼 대륙원정군의 보급이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진작에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한 안트베르펜만이 사실상 유일한 최전방 보급 창구였다. 여기를 잃으면 노르망디에서부터 보급품을 끌고 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동부 사막군과 비슷한 보급 거리를 달성한다.[5] 그러므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회심의 일격을 통해 안트베르펀을 확보한 후 베네룩스의 인터내셔널군을 괴멸 시킨 후, 여유 병력을 확보하여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향한 총 공세를 감행할 셈이었다.

거기다 빌헬름 3세는 다국적군인 인터내셔널군의 특성상 각국 수뇌부의 협의를 거치고 조율을 마친 다음에야 부대를 배치할 수 있다는 약점을 인식하고 있었다.[6] 이는 "기습 공격으로 우위를 장악한 뒤 인터내셔널군의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 전부 섬멸해 버리면 된다"는 황색 상황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 빌헬름 3세와 OHL의 예상과 같이 전황이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인터내셔널의 지휘에 혼선을 겪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시작한 1939년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지만, 그 당시에는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니 그리 부각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황이 서서히 기울고 있는 43년의 시점에선 크고 작은 모든 상황에서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일단, 명목상 인터내셔널군에서 의전서열이 가장 높은 것은 모리스 가믈랭이었으나, 실질적으론 프랑스 코뮌의 병력에 밖에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브리튼은 리델 하트를 앞세워 지휘권 경쟁을 하고 있었다.

  1. 라인을 수호하라
  2. 참고로 개전 당시 인터내셔널의 군대는 140개 사단을 넘었고,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250개 사단에 육박했다. 아예 반토막이 나버린셈.
  3. 여기서 그나마 정예로 여겨진 브리튼과 프랑스 코뮌의 군대만 계산하면 92개 사단 밖에 되지 않았다.
  4. 다른 항구도 많은데 왜 굳이 안트베르펀이냐 한다면 43년에 이르러서는 인터내셔널의, 특히 프랑스 코뮌의 철도와 항구는 협상국과 라이히스팍트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칼레나 됭케르크는 진작에 마비된지 오래였고 그나마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하여 이 공습의 피해를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었던 안트베르펀을 잃는다면 브리튼은 유럽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자국의 군대에게 원활한 보급을 전달할 수 없었다.
  5. 게다가 이 보급 문제는 백년전쟁과 과정이 거의 똑같다.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캉 먹고 뭐 먹고 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 보급 문제로 항구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6. 물론 팍트군은 인터내셔널군이나 협상군 보다도 많은 국가에서 파견한 병력으로 이루어져있었으나, 베네룩스의 함락과 동부전선의 개전 이후에는 이전의 제1차 벨트크리그과 같이 서부전선은 사실상 독일군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