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1968 | 리조니 | Arrondissments | 레스 어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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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 제3공화국은 1961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군림하는 체제이다. 상당히 강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하원과 상원으로 이루어진 의회와 정책을 도입하는 이원집정부제다.
제1, 2공화국과의 차이점
제3공화국 설립 당시로서는 독특했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했다. 제2공화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멸한 제1공화국을 모델로 한 내각제를 시행했는데 이 내각제는 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큰 불안정을 겪었다. 송화강 남역의 동간도와 서간도의 영유권을 두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군사적 충돌을 겪었으며 일본과의 외교관계 개선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전후 경제 복구가 더뎌 사회적인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후반에는 총리들이 1년 남짓한 기간을 두고 계속 교체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이 이어졌다. 결국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은 1961년 국민투표를 통해 행정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새로운 체제의 승인을 요청했다.
대한 제3공화국의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총리와 행정권을 분립해야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통령제와는 구분된다.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총리가 대통령의 꼭두각시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원집정부제에서 총리는 의회에 책임을 지고, 따라서 의회가 총리를 불신임해 쫓아낼 수 있기 때문에, 총리는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는 정당에서 추천하는 인물을 임명하는게 관행이다. 이러한 특이성 때문에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을 때, 다른 당의 의원을 총리로 임명해 두 당이 “동거”(Cohabitation)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동거정부 수립 시에는 의원내각제 국가처럼 국가가 운영되며 총리가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것 역시 특징적이다.
제1공화국이나 제2공화국 때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했던 것에 비해, 제3공화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임명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대통령은 하원 해산권, 사면권, 국민투표 부의권, 긴급조치권, 헌법위원회 위원 1/3 임명권 등을 가진다. 대한공화국의 헌법은 비교적 느슨하게 작성되어 있어 박정희의 시대에서 현재까지 천천히 현 상황에 적응해 왔다.
역사
제3공화국의 수립 (1961~1962)
1960년 총선 이후 민주당과 사회당 양당이 계파로 분열되어 총리를 배출하지 못하는 가운데 박헌영의 대한공산당이 총선에서 25%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선전하자 제2공화국은 붕괴의 위험을 겪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61년 5월 16일 보수파 군인들은 전국의 통신망을 이용하고 미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등에 업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혁명 세력은 제주도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보수파의 힘이 강력했던 호남 지역을 통해 경성으로 진군한다는 "경성 진군 작전"을 계획했고 이를 대한공화국 5월 위기라고 부른다. 겁에 질린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의 수뇌였던 박정희와 담판을 짓고, 박정희의 요구 사항을 일정 부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박정희는 6개월간의 비상 대권을 자신에게 부여할것, 국민투표를 통해 행정권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키는 새로운 체제의 시행 여부를 결정하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처음에는 한인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에서 반발 여론이 컸으나, 대한공산당의 커져가는 의회 내 지분을 보다 못한 조봉암, 김달호 등의 사회당 온건파는 박정희의 집권은 큰 비극이지만 공산당의 집권은 더 큰 비극이라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박정희의 혁명 세력을 지지하기로 입장을 선회한다. 따라서 1961년 6월 1일 국민원의 표결에서 박정희를 머리로 하는 비상대권 수립안이 총 465석 중 292표 찬성[1], 106표 반대[2], 67표 기권[3]으로 통과되었다. 한편 8월 20일 치러진 국민투표의 결과 이원집정부제안이 총 83%의 동의로 통과되며 제3공화국이 12월 1일부로 수립되게 된다.
이렇게 제정된 제3공화국의 헌법은 대통령에게 전 공화국에 비해 많은 권력을 양도하고 의회의 역할을 축소한다. 대통령은 하원의원, 상원의원, 지방의원 등 직접선거로 선출된 8만2천명의 대표투표자들이 뽑아, 전보다 의회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대통령은 의회를 통하지 않고 국민투표로 직접 국민들의 결정을 물을 수 있고, 사면권과 군대통솔권, 외교권, 총리와 국민원장의 건의 후 국민원 해산권을 발휘할 수 있다. 긴급 상황일 경우 긴급조치권으로 독단적으로 최장 6개월 동안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 입법권은 아직 의회가 쥐고 있지만,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하지 않는 한에는 총리가 독단으로 법을 통과시킬 수 있다.
1961년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좌파부터 극우파까지 기성 정치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박정희는 무난하게 상대 후보로 출마한 박헌영 (공산당)과 정화암 (사회당 강경파)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3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박정희는 정일권을 총리로 임명하여 정일권 내각을 출범시키고 내우외환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박정희 시대
박정희는 1961년 12월 대통령 취임 이후 일본과 재수교를 맺고, 송화강 이남의 간도 분쟁을 일시 종결시키며 외교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간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계획경제 정책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무너진 한국의 산업을 재건시키려고 노력했다. 제2공화국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사회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해나가는 박정희 정부에 많은 국민들이 지지를 보냈으며 박정희는 제도권 정치에서도 자리를 잡기 위해 자신의 정당인 민주공화회의를 기성 우익 정당인 자유당과 합병하는 식으로 파이를 늘리려고 한다.
1965년 총선에 앞서 박정희는 대통령을 직선으로 바꾸는 국민투표를 시행했고 이 국민투표에서도 압도적인 차이로 동의가 앞섰다. 뒤이은 총선에서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신생 정당 공화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공화당에 우호적인 민주당이 제2야당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박정희의 명백한 승리였다.
정일권 내각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와 경제적인 지원을 위하여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결정하였고, 1964년 9월부터 총 5만명 규모의 병력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한국의 전쟁 부담 비용이 커졌고 또 베트남에서의 인권 유린이 매체를 통해 알려지며 박정희의 포퓰리즘적 독재 통치에 반발감을 가지고 있던 대학가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1968년 5월 프랑스를 시작으로 68혁명이 일어났고 한국에서도 대학생 시위대가 월남 파병을 반대하며 들고 일어서 서울 몇 개 행정구의 행정권을 장악하는 등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정일권 총리를 해임하고 즉각 의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1968년 10월 있을 자신의 대통령 선거를 3달 앞당겨 동시에 치루는 식으로 신임 투표에 나섰다. 중도층은 박정희의 월남 파병에는 회의적이었지만 시위대의 급진성에는 더욱 회의적이었고, 중도층이 박정희를 지지하는 분위기로 기우는 가운데 동시에 치러진 1968년 총선과 대선에서 우파 진영은 종전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둔다.
김종필을 신임 총리로 둔 김종필 내각에는 기존의 보수 인사 뿐만 아니라 장준하, 김영삼 등 유명인사들도 포함되어있었고 박정희는 금세 지지를 회복한다.
박정희주의의 주요 신조는 미국, 일본과 친교를 맺으면서도 독립된 외교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제1세계에 속한 이상 미국과 친선 관계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박정희 2기 정권은 미국과도 어느정도의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외교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군사적인 독립은 불가피했고, 군사적인 독립은 핵무장을 의미했다. 박정희는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한국을 지킨다는 명목 하게 1969년부터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박정희는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1972년에는 베트남전에서 철수를 명령하는 등 미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외교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경제 5개년 계획으로 경제 성장률은 연 5% 이상을 기록하였고 국민소득 역시 다시 일본을 추월한다. 1970년에는 부산과 대구, 평양에서 지하철이 개통되며 교통 혁신이 일어났고 1972년에는 경부고속도로와 경의고속도로를 직결함과 동시에 일본의 신칸센을 연구해 부산-서울-평양-함흥을 잇는 고속철도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야심차게 경제,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고 천명한 박정희였지만 1975년 대선을 2년 앞두고 일어난 욤키푸르 전쟁의 여파로 오일 쇼크가 일어나며 경제성장률이 크게 꺾이기 시작한다. 1961년 이후 처음으로 대한공화국의 경제 성장률은 비록 한 분기에 그치긴 했지만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며 마이너스 성장은 제2공화국의 경제 불황 당시 한국인들이 얻은 트라우마를 재현시키기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공화당은 1973년 총선에서 80여석을 잃으며 크게 부진한다. 자신의 리더십이 끝장이 났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1974년 퇴임을 1년 앞두고 자진 사퇴해 조기 대선을 치루도록 한다.
삼김시대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퇴임은 한국 정치사에 큰 전환점을 찍는다. 1961년 신공화국 수립부터 박정희 일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1974년부터는 차세대 권력자라 할 수 있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각각 비박 중도파, 좌파, 박정희주의 우파가 권력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1974년 이후 2002년까지 대한공화국의 역사는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박정희와 거리가 먼 자유주의적 우파인 첫 대통령 김영삼의 임기, 둘째, 1981년부터 1995년까지의 좌파 김대중의 임기와 셋째, 1995년부터 1997년까지 김종필의 임기. 그리고 넷째,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좌우동거정부가 들어서며 조순의 중도좌파 내각이 이끌던 시기이다.
김영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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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주의에 반대하는 김영삼의 당선은 대한공화국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73년 총선으로 선출된 국민원 의원 중 대다수가 박정희주의 우파였고 김영삼은 중도우파의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의회를 해산하지 않고 김종필 총리를 유임시켰다. 김종필은 확고한 보수 성향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자 한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들며 상시 대립하게 된다.
김영삼은 투표 연령을 종전의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였으며 연금수당을 확대하는 등 여러 사회 개혁 조치를 추구한다. 또 여성부를 신설하고, 지역별 학교의 수준을 없애며, 그동안 규정 위반으로만 가능했던 이혼을 합의하여 가능하게 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는 일부 우익 지지층 사이에서 김영삼의 지지 기반을 심각하게 악화시키나 중도층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으로 촉발된 오일 쇼크는 대한공화국의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닉슨 쇼크)는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불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한국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이 설립한 국제협력체인 G6 (Groupe des 6)에 1976년 가입해 G7 체제를 구축한다. 또 내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원전 건설 등 토목 사업을 벌여 시중에 돈을 풀고자 한다. 하지만 경제 성장률은 더뎠고 토목 사업으로 시중에 풀린 돈은 15%의 인플레이션률을 만들어낸다.
모든 문제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총리 때문이라고 생각한 김영삼은 김종필을 총리 자리에서 해임시키고 민주당의 총재 이철승을 총리에 앉힌다. 이철승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의적으로 물가를 조정하고, 석유 수입을 줄이는 한편 부가가치세를 감면하고 소비세를 증세한다. 이를 "이철승 계획"이라고 한다. 이철승 계획은 초기에는 효과를 보였으나 임금 억제 정책이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고 1978년 실업자 수가 100만명을 넘기며 이철승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는 박정희 시대 때부터 이어진 5% 이상의 고도 성장이 더이상 불가능했음을 의미한다. 이철승 총리는 마지막으로 고용 유연화 정책을 추진하지만 그 결과 총 1,500만명이 참여한 3공화국 역사상 최대의 파업으로 내각 지지율은 20% 이하로 하락했고 이철승 총리는 경질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79년 12월 비교적 중도적인 이미지인 유치송을 총리로 임명하여 공화당과의 관계 개선을 노린다. 1981년 대선을 앞두고 우파 진영은 결집하기 시작하고 좌파 후보로 유력한 김대중도 젊은 지식인들의 지지 속에서 지지율을 높여갔다.
김대중 시대
1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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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좌우파가 사상 최대로 격돌하기 시작한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둔 관점 차이로 갈등했으나 공산당은 사회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한다. 공화당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체인 최규하가 대선 후보로 출마하면서 좌파 김대중과 중도우파 김영삼의 결선 진출이 선거 전부터 확실하였다. 어떤 여론조사에서는 김영삼이, 어떤 여론조사에서는 김대중이 앞서며 접전 구도가 유지되었으나 결선 투표를 3일 앞두고 치러진 토론회에서 김영삼이 김대중에 밀리며 결과적으로 51.7% 득표율로 김대중이 당선된다. 이는 그동안 우파만이 지속적으로 집권했던 3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좌파가 집권한 역사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김대중은 경제적인 위기를 타개함과 동시에 좌파 진영이 신임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각종 개혁을 추구하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의욕적으로 정책들을 추진해나간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주요한 갈등점이었던 송화강 이남의 동간도와 서간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며 중국과 좋은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일본과는 대마도 문제에서 극적인 타결을 이루어냈다. 1984년에는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의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가지며 동구권과도 좋은 외교 관계를 맺어나간다.
사회적으로는 전임자 박정희 김영삼이 추진한 KTX를 최종적으로 완성해 개통시켰고, 프랑스의 미니텔 정책을 본따 전국적으로 PC 보급에 앞장서는 첨단화 정책을 추구했다. 1981년 김대중은 의회를 해산하고 1981년 조기 총선을 실시했고, 선거 결과 좌파가 압승하며 김철이 총리로 임명된다. 저명한 사회주의자였던 김철은 사회의 근본적인 체제를 바꾸어나가는 것보다는 "일상을 바꾼다"라는 슬로건 하에 보다 실용적인 좌파 정책을 추구했다. 1982년, 주39시간 노동제가 도입된다. 1984년, 김대중은 김철이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온건파 고정훈을 총리에 임명시켜 중도파들의 마음을 잡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원화와 엔화가 동시에 평가절상되며 한국의 수출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내수시장 활성화를 위해 금리를 인하하라는 우파 야당과 사회당 내 온건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은 금리 인하를 거부한다. 큰 폭으로 떨어진 경제 성장률에 김대중 정부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다. 또한 동해안에서의 포경 산업에 반대하는 그린피스의 선박을 잠수함으로 격침시켜 사망자까지 발생시킨 사건은 좌파 사이에서 김대중의 이미지를 실추시켰으며, 대한공산당 마저 연정 해소를 선언하는 가운데 치루어진 1986년 총선에서 좌파는 우파에 과반을 내준다. 이는 3공화국 역사상 첫 좌우동거정부의 설립이었는데 김대중은 총리로 김종필을 임명하고 내치의 전권을 김종필에게 맡긴다.
김종필 총리는 1976년 사임 이후 10년만에 재집권하면서 김대중의 좌파적인 정책을 뒤집는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행 총재를 교체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금리를 낮춘 것은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불러왔다. 또 한국방송공사를 민영화하고 철도청까지 민간 기업에 팔아넘기려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국민들은 김종필 총리에 대한 기대감을 순식간에 접게된다. 한편 내치에 대한 전권을 김종필에게 넘긴 김대중은 자신의 강점 분야이기도 하고 사고 칠 일도 적은 외치 분야에서 활약하며 떨어진 지지율을 수습하고 1988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린다.
2기 정부
김대중의 대통령 재선 소식을 알리는 KBS의 개표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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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에서는 김종필 총리가, 한인사회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맞붙는다. 김종필 총리는 지지율이 이미 김대중에 크게 밀려있었으며 토론회에서 김대중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본선에서 54% 대 46%로 패배한다. 김대중은 대선 직후 강성산을 총리로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해 조기 총선거를 시행한다. 총선에서 다시 좌파가 과반을 수복하며 김대중은 보다 더 수월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강성산은 사회당 내의 대표적인 개혁파로 차기 대권주자로 불렸으나 대통령의 고유 분야인 외치 분야까지 간섭하려하자 김대중은 강성산을 1991년 총리직에서 해임한다. 이후 사회당의 차세대 주자였던 이용희가 총리에 오른다. 김대중은 2기 정부에서 내치 정책에서는 1기 정부와 비슷한 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소련 해체 이후의 혼란기에서 동아시아 패권국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한다. 그러나 임기 말기에 터진 홍삼 게이트 등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는 김대중의 도덕주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으며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60석도 못얻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또 평생을 함께 한 측근이자 총선 당시의 총리였던 한화갑이 불법정치자금 수수로 자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93년 총선에서 압승한 우파연합은 청년 세대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있던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인 박찬종을 총리로 추천한다. 박찬종은 김대중과 과도한 마찰을 겪다 지지를 잃은 김종필을 반면교사 삼아 김대중 대통령과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고 김대중 대통령 역시 뛰어난 외교 전술로 지지를 회복해나간다. 1995년 김대중은 총 14년이라는 3공화국 최장의 임기를 지낸 뒤로 하고 명예롭게 퇴임한다.
김종필 시대
김종필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알리는 KBS의 개표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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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선에서는 우파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후보 선출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박찬종은 청년층의 지지를 얻으며 여러 중도우파적 개혁안을 내놓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내부에서는 확고한 우파 성향인 김종필보다 중도의 지지를 더 얻을 수 있는 박찬종이 더 정권교체에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박찬종은 1993년 총선 직후 김종필 대신 총리에 취임하는 대가로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공화당 내의 일부 온건파 의원들이 박찬종이 출마하면 쉽게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것이라며 박찬종을 설득했고 박찬종은 유혹에 넘어가 약속을 깨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공화당이 김종필과 박찬종 중 후보를 고르지 못하면서 공화당 소속으로 2명이 출마하였지만 박찬종은 암묵적으로 민주당의 후보로 여겨졌다. 사회당에서는 케인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조순이 사회당의 좌클릭을 주장하며 경선에 나선 권영길 노동부장관을 꺾고 대선 후보 자리를 차지하며 대선은 삼파전으로 흘러간다.
선거 결과, 근소한 차이로 조순이 1위, 김종필이 2위, 박찬종이 3위를 기록한다. 본래 박찬종이 1위, 김종필이 2위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막판 좌파 여론이 결집하며 박찬종이 낙선한 것이다. 2차 투표에서는 조순이 선전하기는 하였으나 예상대로 김종필이 승리하며 14년만에 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 김종필은 당선과 동시에 박찬종을 총리 자리에서 해임하고 촉망받던 관료 이회창을 총리 자리에 임명한다.
21세기의 양당제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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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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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후의 변곡점
안철수
안철수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알리는 KBS의 뉴스 속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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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대통령 재선 소식을 알리는 KBS의 뉴스 속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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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총선에서의 동거정부 수립 소식을 알리는 KBS의 뉴스 속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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