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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벨트크리그 | 대전쟁 第一次世界大戰 | 大戰爭 Erster Weltkrieg | Großer Krie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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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 |
장소 |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카리브해, 동북아시아, 태평양 | |
원인 | 사라예보 사건과 그 사건으로 폭발한, 오랜 시간 축적되던 열강들 간의 갈등과 민족주의의 충돌 등의 복합적 원인 | |
결과 | 동맹국의 승리 | |
영향 | 독일과 동맹국의 패권 장악 협상국 국가 적화 유럽 국가 독립, 중동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독립선언 전제군주제의 몰락 및 공화제의 대두[1][2] 생디칼리즘 열풍의 시작 미텔오이로파, 라이히스팍트 창설 제2차 벨트크리그의 원인[3]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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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약 3000만명 이상 | 약 4700만명 이상 | |
피해규모 | ||
사망(군 병력) 5,386,000명 부상(군 병력) 10,388,000명 실종 4,029,000명 총 사상자 19,803,000명 |
사망(군 병력) 6,525,000명 부상(군 병력) 14,831,500명 실종 4,621,000명 총 사상자 25,977,500명 | |
지휘관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제1차 벨트크리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2014년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서론
배경
발발 과정 - 7월 위기
전개
피해
영향
참전국
국명 | 날짜 | 참전 과정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914년 7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이 거부되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
세르비아 왕국 | 1914년 7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여 침공을 당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
러시아 제국 | 1914년 8월 2일 |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에게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의 영향으로 더욱 중요성이 커졌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했으며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 된다. |
독일국 | 1914년 8월 2일 |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9]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
프랑스 제3 공화국 | 1914년 8월 3일 |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며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물론, 프랑스도 삼국협상[10]에 의해 대독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벨기에 | 1914년 8월 3일 |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는 것을 벨기에군이 거부, 끝내 영토통과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한다. |
영국 | 1914년 8월 4일 | 삼국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었지만,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을 하자 이를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
몬테네그로 왕국 | 1914년 8월 5일 | 발칸반도 남부의 소왕국이었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언어, 문화, 종교적 동질성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반감 등으로 인해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
일본 제국 | 1914년 8월 23일 |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11][12] |
오스만 제국 | 1914년 11월 1일 |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강해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 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
대한국 | 1915년 3월 27일 | 한국은 본래 친협상국 국가였으나 고종의 친정 이후 서서히 친동맹국 국가로 선회하고 있었다. 1905년 한러전쟁 이후로 한일동맹의 갱신을 고종이 거부하여 파기되었고,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무술환국 당시 고종이 정부 각료들을 대거 친독 인사들로 채워 넣었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바랐던 것은 아니라 동맹국에 정식으로 가입하거나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고 있었고, 무술환국으로 친독인사들이 상당수 기용됐다고 해도 여전히 친영을 비롯한 협상국에 우호적인 관료가 많았으므로 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도 고종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전쟁 대비를 위한 그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고종의 행보로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여기고 있던 일본이 야요이 호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한국을 침공하며 대전쟁의 불길에 빨려들고 만다. |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13] | 1915년 5월 사이 | 영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이탈리아 왕국 | 1915년 5월 23일 |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14]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협상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15][16], 영국과 비밀 협상을 맺어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
불가리아 왕국 | 1915년 10월 14일 |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 출신인지라 친독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불가리아 여론도 제2차 발칸 전쟁의 패배로 인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아 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복수하자는 보복주의가 팽배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의 활약과 불가리아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불가리아를 포섭하려 시도했으나 불가리아는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갖고 있는 마케도니아 중 일부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눈치를 봐야 했던 협상국과 달리 두 나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동맹국은 온갖 당근[17]으로 적극적으로 불가리아를 꼬드겼고 이에 넘어간 불가리아가 동맹국과 우호조약을 맺은 후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
네지드 하사 토후국[18] | 1915년 12월 16일 | 영국과의 다린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전쟁개시 |
포르투갈 제1공화국 | 1916년 3월 9일 |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이후 수백여 년간 영국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16년 2월 말엽부터 자국령에 들어오거나 항행 중인 독일 선박들을 나포하고 화물을 압류했다. 당연히 이에 격분한 독일이 포르투갈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헤자즈 왕국 | 1916년 6월 | 당시 메카 태수였던 후세인 빈 알리는 협상국 측에 '오스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준다면 아랍인들의 단일국가와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라는 약속을 받았고, 후세인 빈 알리는 이에 승락, 자신의 아들 파이살, 후세인과 함께 네지드 토후국 및 시리아와 이라크 방면 아랍 반란군과 함께 아랍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
루마니아 왕국 | 1916년 8월 27일 | 3년여 동안 중립을 지켜온 루마니아는 남쪽 불가리아의 위협, 동부전선에서 계속 죽을 쑤는 오스트리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동맹국에 불리해지는 전황 등을 토대로 전리품 획득을 위해서 늦게나마 참전을 결정하고 브루실로프 공세를 틈타서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겨우 1년 만에 독일군에게 본토를 다 털리고 항복한다. 그래도 적백내전의 결과로 베사라비아 일대를 할양 받으면서 |
미합중국 | 1917년 4월 6일 | 의외로 친독, 반영 세력도 많았으며[19] 무엇보다 먼로 독트린 때문에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 유럽 국가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와는 상관없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태도였다. 그러나, 독일의 U-Boat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어 미국인들이 휘말려서 죽게 되자 대독감정이 악화되었으며, 테러가 벌어지고,[20] 심지어 독일이 멕시코를 꼬드겨서 미국에 대한 공격을 사주했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미국 국내의 여론이 대폭발하게 되면서 마침내 협상국으로서 참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런 여론악화의 이면에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이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망해버리면 빌려준 돈을 떼먹힐까봐 우려했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테러 사건과 치머만 전보 사건이 미국의 참전 여론을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 |
쿠바 | 1917년 4월 7일 |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그리스 왕국 | 1917년 6월 30일 | 당시 친독 성향이었던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계속 유지하길 원했지만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선 궁극적으로는 협상국에 가담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렇게 그리스는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 때문에 세르비아의 지원 요청이나 협상국의 참전 요구를 모두 묵살했다. 이렇게 불안한 중립을 유지하던 와중에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실패하고 불가리아가 갑자기 동맹국에 가담해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포위당할 위기에 빠진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로 후퇴했고 불가리아군이 아직 전쟁 준비가 덜 된 그리스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베니젤로스는 영-불 연합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 세르비아를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베니젤로스의 독단에 격노한 국왕 콘스탄디노스는 베니젤로스를 해임,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미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영-불 연합군은 전쟁 준비에 나섰으며 불가리아군은 이에 대응하여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를 침공한다. 이렇게 되니 정작 중립을 선언한 그리스 영토에서 협상군과 동맹군이 전투를 벌이는 촌극이 펼쳐지고 해임된 베니젤로스는 협상군이 점령한 테살로니키로 이동해 임시정부를 수립, 협상국 측에 가담하고 그리스 여론도 친베니젤로스파와 친국왕파로 분열되어 버린다. 결국 협상국의 지지를 받은 친베니젤로스파가 승리해 1917년 6월 콘스탄디노스는 퇴위,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했으며[21] 정권을 잡은 베니젤로스는 정식으로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리스는 협상국 측으로 참전한다. |
중화민국 북양정부 | 1917년 8월 14일 | 제3혁명과 위안스카이 사망으로 공화국이 된 중국은 한국의 회유 및 압력과, 영프로부터 빼앗긴 조차지의 이권과 중국 영토를 다시 되찾기 위해 동맹국으로 가담한다.[22] 그러나 조차지는 공사관 도시로 재편되고, 중국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23] |
브라질 | 1917년 10월 26일 |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따른 피해, 그에 따른 반독여론 증가였지만…. 브라질은 당시 세계 커피생산량의 90% 이상을 독점하는 커피 플랜테이션 국가였는데, 1차 대전 직후 동맹국에 대한 해상봉쇄로 커피판로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서 수출액이 감소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이 "커피 재고 우리가 다 사줄 테니까 독일에다 선전포고해."라고 제안했고 브라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태국 | 1918년 7월 22일 | 프랑스 제3 공화국의 종말이 임박하자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 하여 빼앗긴 영토 상당수를 되찾는 성과를 얻었다. |
기타
연표
사용 장비
관련 문서
관련 어록
- ↑ 전쟁은 전제군주제 국가로 이루어진 동맹국이 승리하였지만, 협상국 국가들에서 연쇄적으로 혁명 및 왕정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이 시점 부터 공화제가 왕정을 밀어냈다.
- ↑ 전제군주제 국가던 동맹국 국가들도 전후 입헌주의 개혁에 나섰다. 대표적으론 독일의 3월 개혁과 한국의 융희민권운동이 있다.
- ↑ 1차 벨트크리그에서의 참상으로 인한 전쟁에 대한 공포와 협상국에 대한 징벌의식의 부조화는 2차 벨트크리그 발발의 단초를 강하게 제공했다.
- ↑ 비전투 노무자(노동자) 25만명을 서부전선과 한국전선에 보내는 수준으로만 참전했다.
-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협상국 이탈
- ↑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협상국 이탈
- ↑ 1917~
- ↑ 독일 U보트의 무차별 공격과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1917년 4월에 독일 측에 선전포고하여 참전함.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 ↑ 프랑스, 러시아, 영국
- ↑ 영일동맹은 양국간의 공수동맹이지만 상대국의 자동 참전 의무같은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한 후에 14년 8월 1일 주일 영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게는 이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독일의 동양함대가 홍콩과 웨이하이를 위협할 수 있었고 8월 4일에 영국 외무부는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 워낙 갑작스러운 참전으로 독일은 일본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다. 발발 당시 칭다오의 순양함급 이상은 2척에 불과했다. 8월15일 최후통첩 이후 1주일 만에 병력을 증강시키기에는 칭다오는 너무 멀었으며 이후 전개는 칭다오 전투 참조.
- ↑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 흡수됨.
- ↑ 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상호방위조약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공격전쟁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
- ↑ 사실 삼국동맹을 믿기엔 불안한 감이 있어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몇 년 전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 하나 늘리냐 마느냐의 문제여서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일부를 점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가로막는 역사적인 숙적이고 프랑스는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우방이었다.
- ↑ 또한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일대는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고 이탈리아는 통일 완수라는 이유로 이 일대의 회복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삼국 동맹 소속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겐 독일이란 빽이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질 못했을 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 측에 참전하면 전쟁 후 이 일대의 점유를 인정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즉, 2대전의 제3인터내셔널이나 추축동맹 마냥 견고한 동맹은 아니었던 셈.
- ↑ 북마케도니아 전체와 세르비아의 동쪽 절반, 그리스나 루마니아가 참전할 경우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두 나라에게 넘어갔던 지역의 합병 인정, 막대한 차관 제공 등.
- ↑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당하며 리야드 토후국이라고도 불림.
- ↑ 대체로 독일계 이민자 800만은 독일과의 싸움을 싫어했고, 아일랜드계 이민자 450만은 영국을 싫어했다.
- ↑ 1916년 7월에 뉴저지의 영국 수출용 탄약 창고가 폭발하고 (Black Tom explosion), 1917년 1월에는 영/프에 군용자동차를 수출하는 공장이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 모두 독일에서 보낸 공작원의 소행으로 판명나면서 여론이 악화된 것도 있었다.
- ↑ 장남 요르요스 2세는 독일에 군사 훈련을 가 있었기 때문에 베니젤로스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양위가 불가능했다.
- ↑ 이때 비전투 노무자(노동자) 25만 명을 서부전선과 한국전선으로 보낸다.
- ↑ 하지만 근 100년 가까이 중국 사회를 좀 먹은 열강의 아편 판매를 종식시키는 성과를 얻었고, 5.4운동으로 형식적으로나마 공사관 도시의 지배권은 다시 인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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