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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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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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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봉기 Київське повстання Kyiv Uprising Восстание в Киеве Der Aufstand von Kiew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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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러시아 점령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봉기 | ||||||||||||||||||
날짜 | 1944년 8월 1일~1944년 10월 2일 | |||||||||||||||||
장소 | 우크라이나 키이우 | |||||||||||||||||
결과 | 봉기진압 | |||||||||||||||||
영향 | 러시아의 키이우 파괴 및 민간인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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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봉기 기념비 |
개요
블라이스카브카(блискавка, 번개)[2]를 들고있는 우크라이나 국내군 병사 |
1944년 8월 1일부터 1944년 10월 2일까지 나치 러시아 치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지하국이 일으킨 봉기이다. 독일의 우크라이나 망명정부가 지시한 우크라이나 전역 봉기 계획인 회오리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군과 팍트군이 진입하기 전에 키이우를 자력으로 탈환하기 위해 발생했다.
서론
키이우 1944에서 나타난 키이우 봉기 |
1944년 여,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격파하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로 진격해 오고 있었으나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요새화하고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독일군과 팍트군이 키이우에 당도하기 전에 자력으로 우크라이나를 독립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내 지하 저항 운동 조직인 우크라이나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을 지시했다.
따라서 키이우 봉기의 목표는 첫째로 러시아 국방군을 키이우에서 몰아내는 것이었고, 둘째로 독일군이 키이우를 해방시키기 전에 우크라이나인들의 손으로 키이우를 해방시켜 전후 독일이 소유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이권을 돌려받아 평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할 목적이었다. 봉기 초기 우크라이나 지하국가 하의 우크라이나 봉기군은 키이우 중심가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주요 요충지인 무기고를 탈취하는 데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에 시달리며 장기간 봉기를 이끄는 데에 한계를 보이게 된다.
키이우에 도착한 독일군은 전력 재정비 문제로 우크라이나 측의 무전 접촉에도 불구하고 키이우 경계 밖에서 대기만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은 대신에 키이우에 공중 보급을 하지만 대부분 러시아군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우크라이나 측에 도착한 물품들도 대부분 당장 사용할 수 없는 기호품들과 러시아의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가 전부였다.
9월에 이르자 상황은 극도로 암울해져 봉기군은 하수도로 들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하수도의 봉기군을 소탕했다.
키이우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수많은 저항 운동 중 가장 거대하고 중요했던 봉기로 꼽힌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우크라이나를 끝없이 수탈하던 러시아에 대항해 2차 대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봉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배경
1944년 6월 22일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군의 진격에 동부전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러시아의 벨라루스 전선군은 궤멸당했고 엄청난 크기의 지역이 다시 독일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독일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곧 우크라이나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작전이 끝나갈 즈음엔 키이우 함락도 목전이었다. 키이우 시내에선 독일군의 포성이 들릴 정도였다.
한편, 베를린의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1942년 말부터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무장봉기를 통해 러시아를 몰아내고 자력 독립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우크라이나 지하국가(Українська підпільна держава, 속칭 Упд)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3년 중순부터 계획은 소규모로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지배가 강력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선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오면서 러시아군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독일군에 의한 우크라이나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우크라이나의 자력 해방과, 전쟁에서의 기여분 확보, 그리고 전후 독일과의 평등한 관계 수립을 위해[3]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우크라이나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로 진격하기 전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빈니차, 크리비리흐, 드니프르, 우만, 하르키우 등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서 7월 말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서부의 주요 도시 빈니차가 해방되었고 이 밖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작은 도시들이 다시 탈환되는 등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었다.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우크라이나인의 수도 키이우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고 Упд의 주력인 우크라이나 국내군(внутрішні війська, вв)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1일 17시(W-Hour)를 기해 키이우 봉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