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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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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상륙작전 Battle of Pohang / 浦項上陸作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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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전선의 일부 | ||
날짜 | ||
1940년 6월 6일~1940년 7월 28일 | ||
장소 | ||
대한제국, 포항 해안 | ||
교전국 | 대한국 | 일본인민공화국 |
지휘관 | 신성모[1] 권준[2] |
우메즈 요시지로[3] 이무라 조[4] |
병력 | 상륙 당시 약 24,000명 6월 24일 약 100,000명 7월 24일 약 250,000명 |
상륙 당시 약 40,000명 6월 24일 약 450,000명 7월 24일 약 1,200,000명 |
피해규모 | 총 사상자 약 25만명 | 총 사상자 약 30만명 |
결과 | ||
일본인민공화국의 상륙작전 성공 | ||
영향 | ||
일본의 한국 점령 작전 개시 |
개요
1940년 6월 6일, 우메즈 요시지로의 지휘 아래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펼친 상륙작전. 제2차 벨트크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 개전 직후의 대한제국군의 무능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기도 하다.
과정
배경
전운은 아시아에서도 감돌고 있었다. 1차 벨트크리그에서의 패배 이후 공산화 된 일본은 대한제국의 대한 복수를 부르짖으며, 아시아 곳곳의 생디칼리스트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편 1차 벨트크리그로 영원한 라이벌이 될 것만 같은 일본을 굴복시키고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자 대한제국은 이참에 아시아 전역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여 독일처럼 신질서를 구축하기를 바랐다. 적백내전에 개입함으로써 적군을 끝장내버리자, 자신감을 얻은 대한제국군은 이후 독일과 함께 장제스의 북벌을 저지하는 등 아시아 곳곳에 개입하며 영향력을 늘리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역효과를 불러내어 아시아 곳곳에서 생디칼리스트들이 준동하는 결과를 배출하고야 말았다. 특히, 일본 내전에서 일본인민공화국이 승리하며 일본이 적화되자 대한제국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좌파가 남중국을 평정할 때 개입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함으로써 더 이상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 또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성모의 총 사령관 임명 또한 그의 일환이었는데, 1차 벨트크리그 당시 수송선단을 안전하게 호위했던 그가 일본의 새로운 수송선단 습격에 맞선 적합자라고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임명된 신성모는 현장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작계를 짜기 시작했다. 해군에 너무 과도한 투자를 이어가거나, 부산에 너무 많은 병력을 밀집 시켜놓는 상황이 벌어지자 현장 사령관들은 신성모의 계획에 우려를 표했으나, 신성모는 "국군은 황제폐하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오사카에서 먹고 저녁은 도쿄에서 먹을 수 있다."라는 말로 응답했다.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제2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하자, 일본 또한 대한제국의 대한 기습적인 부산 공습과 대마도 포격을 진행하며 아시아 전선이 개막하였다. 허나 양측의 큰 포부하고는 달리 거의 1년 동안 서로 소극적으로만 대치하는 가짜 전쟁만 이어졌다. 대한제국에선 신성모가 육성했던 황립해군은 만약 큰 피해를 입는다면 정치적인 영향이 갈 것이라는 우려와 더불어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대한제국 공군과 달리 잘 육성되어있던 일본 공군에 밀려 제대로 된 작전을 전개할 수 없었고, 일본에선 1차 벨트크리그 패배와 혁명으로 인한 큰 피해를 입은 해군으론 대한제국 황립해군에게 직접적으로 맞설 수는 없었기에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일본의 포부와 달리, 일본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 못했다. 일본은 아직도 내전의 피해가 회복이 끝나지 않았던데다 장교에 대한 숙청으로 당시 육군대신이였던 무라카미 겐자부로가 "일본의 개전은 1943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1939년에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전파에서는 개전을 촉구했고,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며 일본이 속한 제3 인터내셔널이 2차 벨트크리그에 뛰어들면서 일본 또한 주전파의 요구에 따라 대한제국에게 선전포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런 양측의 상황으로 가짜 전쟁 동안 아시아 전선에서의 전투는 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황이 이렇게 끌려간다면 더욱 불리한 쪽은 일본이 될 것이 분명했고, 일본은 결단을 내려야만했다.
허나 일본의 대한제국 침공 계획은 1차 벨트크리그 때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여 대한제국의 이화함대에게 큰 타격을 주고, 부산으로의 상륙. 첫번째 단계인 기습공격까진 이루어낼 수 있었지만, 두번째 단계인 부산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이미 수차례 공격 받았던 부산에서 대한제국이 또 다시 공격을 허용할리 없었으니.
하지만 이동경로와, 보급역량 등.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일본에게도 부산을 제외하곤 마땅한 경로가 없었다. 일본 군부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부산 상륙 작전을 입안 시킬 때, 이무라 조가 포항 상륙을 제안했다.
포항 상륙은 부산 보다 더 먼 경로였을 뿐더러 보급적 역량도 그리 좋지 못했기에 처음 포항 상륙이 제안 됐을 때 많은 이들이 이 계획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일본에겐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고, 도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아라하타 칸손에 의해 입안되었다.
영향
사령부의 무조건적인 절대사수 명령과, 부족한 지원들 때문에 권준은 끝내 포항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포항의 함락 이후, 한국군의 주력군이 배치되어있던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일대는 위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속된 신성모의 오판은 끝내 경상남도의 한국군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었고, 포항에서의 패배는 울산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포항에서의 패배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성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까지 패배가 이어지며 한국군 주력이 통째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신성모는 해임. 한성의 함락까지 이어지면서 퇴역한 안중근이 다시 임명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포항에서의 패배는 초기 한국군 주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수도인 한성까지 함락 위기에 처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제2차 벨트크리그 동안 한국군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어록
국군은 황제폐하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오사카에서 먹고 저녁은 도쿄에서 먹을 수 있다. 신성모. 일본의 선전포고 직전 |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한성 함락 이후 총 사령관 재임명 명령을 받고서. 이후 대한제국군의 슬로건이 됐다. |
기타
군가 중 해안포병의 노래가 포항 전투 당시 62고지 병사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