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 명황제 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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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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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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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5대 대왕ㅣ대한제국 추존황제
경조 명황제 | 景祖 明皇帝
이름 이희(李曦)
출생 1824년 12월 6일
한성부 은언궁
(現 황성 한성부 대궁)
즉위 1849년 7월 28일 (24세)
(음력 헌종 15년 6월 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황성 한성부 종로구 창덕궁 인정문)
붕어 1873년 10월 30일 (향년 49세)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별채
(現 황성 한성부 종로구 창덕궁 대조전 별채)
재위기간 조선 제25대 대왕
1849년 7월 28일 ~ 1873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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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양부 순조 숙황제 이공, 양모 순원숙황후 김씨

친부 풍계대원왕 이당, 친모 광산대원비 이씨
황후 철순명황후 임씨
후궁 귀인 박씨, 귀인 조씨, 귀인 이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숙의 김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자녀 외아들 고조 장황제 이엽
종교 유교 (성리학)
이수(而壽)
대용(大勇)
봉호 익평군(益平君)
묘호 경조(景祖)
존호 희륜정극수덕신성흠명광도돈원창화
(熙倫正極粹德神聖欽明光道敦元彰化)[1]
시호 대한: 문현무성헌인영효명황제
(文顯武成獻仁英孝明皇帝)[2]

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개요

조선의 제25대 대왕이자 대한제국추존황제. 휘는 희(曦)이며, 묘호는 경조(景祖), 시호는 명황제(明皇帝)이다.

헌종의 사망 이후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자 당대 실권자인 신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옹립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지만,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세도가의 폐혜를 끊어내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업적을 이루어 대한의 중흥을 이끌어내었다.

경조의 치세는 조선대한제국 사이에 있는 과도기였다. 경조는 세도가를 몰아내고 조선 초기를 방불케 하는 개혁을 이루어냈고, 아무런 대비 없이 개항이라는 미지의 길에 들어선 조선이라는 작은 배의 선장으로써 서세동점이라는 전례 없는 폭풍우 속에서 최선을 다해 조선의 변혁을 이루어냈고, 훗날 고조 대제의 치세를 여는 주춧돌이 되었다.

생애

출생과 입적

경조는 풍계군의 장남으로 1824년(순조 24년) 10월 16일 한성부 은언군 사저에서 은언군의 적4남 풍계군과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 생애와 헌종 대까지의 행적은 3세 때 아버지 풍계군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알 수 없다. 1904년 황성대화재로《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실린 은언군, 상계군 관련 기사들을 대량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풍계군은, 죽은 이후 숙부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경조 역시 은전군의 양손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경조는 본가의 큰아버지이자 족보 상 5촌 당숙인 상계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친아버지 풍계군과는 5촌이 되었다.

경조가 24살이던 1849년(헌종 15년)에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헌종이 21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경조를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헌종이 사망한 시점에서 왕족 남성을 찾으려면 사도세자대 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경조는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에게는 정조 말고도 아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경조의 할아버지 은언군이고 이 은언군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경조의 아버지 이담(사후 상계대원군)이었다.

당시 조선 왕실의 직계인 효종 - 현종 - 숙종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졌고, 숙종은 6남(경종, 영조, 연령군 등)을 두었으나 영조를 빼고는 아들을 남기지 못했거나 일찍 죽었다. 영조는 2남(진종, 장조)을 두었으나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해 후손을 이어간 건 장조뿐이었다. 장조에게는 5남(의소세손, 정조, 은신군, 은전군, 은언군)이 있었는데 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은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어 후계를 이은 정조에게는 2남(문효세자, 순조)이 있었는데 문효세자는 일찍 죽었고 순조도 외아들 문조를 두어 다시 아슬아슬해졌다. 그런데 문조가 즉위도 하기 전인 21세에 일찍 사망하면서 6세였던 외아들 헌종이 즉위했으나 헌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20세에 사망하면서 정조 때부터 간신히 이어온 정조계 혈통이 끝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다 보니 당시 남은 가까운 왕족이라곤 오직 은언군의 자손(친손자)들뿐이었던 것이다. 경조는 비록 서손이긴 해도 영조 - 장조의 진짜 유일한 직계 후손이라 남은 왕족 중 헌종과 촌수가 그나마 가장 가까웠다.

이 시점에서 은언군의 친손자들, 그러니까 경조와 같은 입장의 왕족은 경조 말고도 영평군과 덕평군도 있었다. 특히 경조는 종법상으로는 은언군가의 종손이어서 서열이 가장 높았고 당시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다. 나이로 보면 이욱 역시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덕평군은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하여 어리버리하며 19세의 어린 나이가 결격 사유로 작용하였다. 결국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종법상 은언군가의 종손으로 서열이 가장 높고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경조를 다음 왕으로 택했다.

물론 경조도 결격 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자가 아닌 왕손이 임금이 되려면 먼저 선왕의 양자로 반드시 입적해야 했는데 경조는 당시 은언궁의 종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조는 원래 풍계군의 친자인데, 은언군 종가를 잇기 위해 상계군에게 양자로서 입적한 상태였다. 따라서 경조가 왕위를 이으려면 선왕(순조)의 양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미 양자로 입적한 상태에서 다시 입적을 보내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손의 입적 문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장남이 입양가는 경우들도 꽤 있었고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된 선조는 원래 덕흥군(명종의 이복형)의 아들이지만, 왕이 되기 전에는 복성군(명종의 이복형)의 양자였다는 전례를 들어 결국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상계군 사건 이후 역적의 아비가 된 은언군을 조상으로 둔 탓에 봉군(封君)도 되지 못했으나 즉위 전날 순조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익평군(益平君)으로 봉해졌다. 이는 즉위 이전에 예법상 평민에서 바로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봉군해서 사대부를 만든 연후 즉위한 것이다. 즉 절차상의 문제였다. 경조가 즉위하면서 일가족이 모두 복권됐는데 작호가 없었던 아버지 이담은 상계군(常溪君)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왕의 친부이기 때문에 대원군이 더해져 상계대원군이 되었고,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며 상게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었다.

왕권 강화

경조는 즉위하고 처음으로 조정 대신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세도 가문의 위세를 꺾고),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종친을 정계에 등용하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남인을 등용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라고 물었고, 이 말을 들은 (신)안동 김씨의 김병기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는 것은 가능하겠습니다만, 어찌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즉 "너님이 아무리 용 써봐야 우리 가문 위세를 꺾을 수 있겠음?" 정도의 의미다. 그러자 경조는 코웃음을 치며 핀잔만 주고 넘어갔고, 이후 세도가의 위세를 꺾는 작업을 실시했다.

이를 위해 경조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안동 김씨들은 수백 년을 내려온 비변사를 폐지하는 것은 애석하다고 은근슬쩍 반대를 하다가, 경조와 순원숙황후의 뜻이 확고하자 타협안을 내놓아, 의정부와 비변사에게 권력을 반반씩 나누되 대신 경국대전에도 없는 비기구인 비변사의 존재를 공식화하려했다. 하지만 경조는 격분하여 그 타협안에 합의한지 불과 1년 후에 비변사를 혁파하고 비국(備局)의 인신(印信)을 녹여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의정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강화되었고, 세도 가문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는 또한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세도 가문의 위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기존에는 종친은 4대에 걸쳐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는데, 이 제한을 2대로 줄였다. 그 결과 전주 이씨는 (신)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최대 정파로 자리 잡았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면서 법제도 바로잡았다.

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사실상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나서 명예직을 지내며 조정 내 원로로 잘 대접받다가 자연사했고,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경조와 고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왕권 강화와 더불어 경조는 삼정의 문란에도 손을 대었다. 경조 집권 초기,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유랑민이 늘었고, 빈농들의 경제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이에 민중들은 곳곳에서 들고일어났고, 그런 경향은 1849년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경조는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기 위해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한다. 당연히 양반들은 반발했지만 경조는 의견을 관철시켰고, 이에 걷히는 세금이 확연히 늘어났다.

또한 이전까지 관에서 곡식을 빌려준다는 명목 하에 수령과 아전들의 돈벌이 구실이 되었던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지역의 덕망 있는 양반이 곡식을 빌려주게 하는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게 했다. 이외에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면서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경조 즉위년과 집권 11년차의 재정을 비교하면 조정이 보유한 황금은 51%, 쌀은 299%, 포는 255%, 목재가 258%, 은이 27%, 철이 673%로 늘었을 정도였다. 재정의 확충과 더불어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삼정의 문란으로 들불처럼 민란이 벌어졌던 세도 정치 말엽과 대조하여 경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서원은 이전까지 제사 비용 등을 주변의 농민에게 물리는 등 문제를 일으켰고, 사액 서원들의 면세권을 이용해 주위의 양반들이 땅을 서원에 맡기고 세금을 내지 않는 등 폐단이 심했다. 이에 그는 600여 개의 서원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밀어버렸다. 야사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고 하는데 근세조선정감에 기록되어 있다.

종교 탄압과 양요

흔히 착각하는 사실이지만, 경조는 현대 한국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것처럼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 않았다. 집권 이후 한동안 경조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고,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과 직접 만나 향후 대책을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에 영향을 받은 유림 세력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천주교를 배척하던 여론은 경조에게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라고 청했고, 때마침 청나라가 서양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당하고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불안감을 느낀 그는 1854년 8천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과 9명의 불란서인 사제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때 신자들을 처음에는 생매장까지 단행하는 등 무작정 처형했다. 충청남도 서산시와 홍성군 등에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천주교를 계속 믿겠다면 죽일 것이고, 더 이상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이것이 병인박해다.

이 난리 통에 살아난 베르뇌 주교는 북경에 주둔하고 있던 불란서 극동 함대에 연락하는데 불란서 극동 함대는 이를 구실로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며 출정했다. 이들 불란서군은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여서 35명의 조선군을 전사시켰고, 강화성과 문수산성, 정족산성, 갑곶진, 광성진까지 함락하여 강화도를 장악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갑인양요로, 268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반면에 불란서군의 피해는 2명이 사상을 당한 것에 그쳤을 정도로 양국 군대의 무장 수준 차이가 극심하였다. 이 사건은 만약 불란서 전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양에 포격을 가하려고 하면 조선군이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었기에 조선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불란서는 갑인앙요 전에 먼저 청 정부와 접촉했다. 이때 청은 불란서에 '소속방토(所屬邦土)'인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아닌 이상 조선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향이 없음을 전달했다.

1854년 당시 청은 태평천국 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반란에 시달리고 있어 조선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굳이 불란서와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하면 속방 조선이 불란서에 공격당할 것이 명약관화했으므로, 조선이 불란서와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이에 1854년 12월, 청은 조선 정부에 불란서와 조약을 맺도록 종용하는 서한을 보낸다.

결국 경조와 조선 정부는 조약의 채결이 불가피함을 인지하여 시원임대신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

개항과 어일신

결국, 1855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이 채결된다. 이 조약은 한국이 서구와 채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겪게 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을 줌으로써 조선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조선에서는 이 조약이 채결되자, 위정척사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으나, 수신사로 불란서 파리에 방문했던 경평군과 박규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서구의 발전된 기술 문명에 경악했고, 귀국하자 이를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 조정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던 1859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베이징이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개항장을 통해 서양인들이 만든 신문을 통해 전황이 상세하게 전해졌다. 이 소식은 경조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불과 2만도 안되는 영불 연합군은 수적 열세였지만, 20만의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수도 베이징이 함락시키고 자금성에 유니언 잭과 삼색기가 휘날렸으며 원명원이 불태웠기 때문이다. 내심 청나라를 흉보았지만 중화사상을 당연시 하던 조선인들은 이 전쟁을 통해 서구의 압도적인 힘을 체감했다.

베이징 함락 이후, 충격을 받은 경조는 기존의 제한적 개항이라는 방침을 바꾸어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우선 영길리에 영선사를, 불란서에는 조사시찰단을, 미국에는 보빙사를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불란서의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강력한 군대 양성을 추진했고, 총포와 조선 기술을 도입하고, 서구의 제도나 근대식 교육과정, 서구의 기술과 군사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조는 왕실의 내탕금까지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국가를 근대화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과 더불어 의외의 경제적 수익도 증가했다. 아편 중독으로 건강을 해친 청 사람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명약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 인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마침 이때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인삼 재배가 성한 이래로 홍삼 가공이 흥하던 시점이라 18세기 중반 미국 백삼의 청 유입과 일본의 인삼 재배로 적자로 돌아섰던 무역 수지가 크게 개선되어 근대화의 자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화 정책은 경조의 아들인 고조대에서도 이어지며 조선을 열강으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경조와 고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한국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어일신의 전개와 함께 조선은 국제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1868년 경조는 보신전쟁 당시 일본의 막부군에 불란서와 함께 총포를 판매하여 폭리를 취했고, 대마번주 소 요시아키라에게 대마도가 과거 조선의 속주였던 점을 들어 귀부를 권유한다. 이렇게 대마주는 조선의 정식 영토로 편입된다. 또한 조선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막부군이 간신히 보신전쟁에서 승리하자, 패배한 토막파 잔당이 유구로 도망처 유구왕 상태를 몰아내고 충승 공화국(오키나와 공화국, 沖繩共和國)을 세웠는데, 유구왕 상태가 밀지를 통해 이를 경조에게 고하자, 경조는 군함을 파견하여 유구의 통치권을 복원하는 대가로 유구와의 비밀리에 군신관계를 맺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해군 육전대 4000명이 포함에 나누어 타고 불란서 군사고문단의 지휘에 따라 유구섬에 상륙하여 토막파를 사살하고 잔당 포로를 유구법에 따라 처분했다. 이를 현대 한국에서는 유구 출병이라 부른다.

천붕

원래 몸이 약하던 경조는 1863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서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서구 의학의 도움을 받아 건강이 차도를 보였으나 1872년 겨울의 지방 순행 도중 감기에 걸려 앓아눕기 시작했고, 결국 1873년 10월 30일, 창덕궁 대조전 별채에서 향년 49세를 일기로 천붕했다.

사후 신료들이 묘호로 고종(高宗)이나 성종(聖宗)을 추천했다. 원래라면 묘호는 고종으로 결정되어야 했지만, 아들인 고조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나라를 다시 일으키시고, 서세동점의 난세에서 대조선의 존엄을 수호하신 공덕을 제대로 기릴 수 없다며 경조(景祖)를 제안했다. 신료들은 이에 대해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소심하게 반항하였으나, 고조는 이를 대차게 무시하고 경조를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대행대왕의 묘호는 경조로 결정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의 예릉(睿陵)으로 중전 철순명황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경조의 예릉은 조선 왕릉 형태로 조성한 마지막 왕릉이다.

여담

가계

대중 매체에서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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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굵은 글씨은 황제 추존 시 추가한 존호이다.
  2. 완전한 시호는 경조희륜정극수덕신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명황제(景祖熙倫正極粹德神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明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