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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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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대한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김규식 金奎植 | Kim Kyu-si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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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1년 2월 28일 |
경상도 동래도호부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 |
사망 | 1960년 12월 10일 (향년 79세) |
부산직할시 중구 국립부산중앙병원 | |
묘소 | 경성광역시 동작구 국립경성현충원 |
재임기간 | 제23대 각료회의 의장 (총리) |
1950년 5월 7일 ~ 1953년 9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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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공화국의 정치인, 외교관. 제23대 총리를 지냈다.
총리로서의 업적보다 외교관으로서의 업적이 더 두드러지며, 특히 자유대한정부에서 5년 내내 외교부장(외무부장관)을 맡으면서 외교 투쟁을 이끌어 대한공화국이 전후 독립국가로서 널리 인정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총리 시절에는 민주당을 창당해 극우를 배제한 중도우익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조만식, 장면과 더불어 자유주의 진영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사이다.
생애
평가
당파정치를 지양하는 모습을 보였고 유일당 노선에 따라 정당 정치를 한다라기보다도 정파를 초월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이려 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중도우익이 해방 정국에서 나름의 세력을 보존한 채 3공화국 시대까지 살아남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정파에 따라 극심한 분열이 일어났던 1950년대의 시국에서 김규식의 노선이 현실을 배격한 이상론에 불과했다는 평가도 있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에서는 김규식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으나 공화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에서 김규식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그도 그럴것이 현 공화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이기붕파 자유당은 김규식이 자유당의 온건한 의원들을 빼가고 남은 자유당의 잔존파였기 때문이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대한국민당 | 1930 - 1934 | 정계 입문 |
무소속 | 1934 - 1935 | 탈당 |
민족혁명당 | 1935 - 1945 | 창당 |
조선민주당 | 1945 - 1953 | 합당 |
1953 - 1960 | 신설 합당 정계 은퇴 작고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율 (득표수) | 당선 여부 | 비고 |
---|---|---|---|---|---|---|
1930 | 제9회 의정원 의원 총선거 | 경남 부산 1구 | 대한국민당 | 13,285 (78.4%) | 당선 (1위) | 초선 |
1934 | 제10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15,573 (81.1%) | 재선 | |||
1935 | 제11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경성 종로 | 무소속 | 4,486 (27.2%) | 낙선 (2위) | |
1936 | 제1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민족혁명당 | 7,774 (39.8%) | 당선 (1위) | 3선 | |
1939 | 제13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9,558 (36.4%) | 4선 | |||
1945 | 제3회 대통령 선거 | 대한공화국 | 조선민주당 | 38 (2.1%) | 낙선 (3위) | [1] |
제14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부산 동래 | 16,085 (69.3%) | 당선 (1위) | 5선 | ||
1950 | 제15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15,028 (64.5%) | 6선 | |||
1953 | 제16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 12,076 (53.3%) | 7선[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