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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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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한공화국 대통령 김창암 金昌巖 | Kim Chang-am | |
출생 | 1876년 8월 29일 |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現 황해남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 |
사망 | 1961년 1월 19일 (향년 85세) |
경성특별시 종로구 국립경성대학교병원 | |
묘소 | 경성광역시 동작구 국립경성현충원 |
재임기간 | 제15대 내각총리대신 |
1926년 3월 15일 ~ 1928년 7월 10일 | |
제2대 대통령 | |
1937년 12월 1일 ~ 1952년 11월 30일 | |
링크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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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은 고통받았습니다. 대한은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대한은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승전 연설에서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中 |
대한공화국의 정치인. 대한제국의 제15대 내각총리대신직과 대한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자유대한정부를 이끌고 항일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로, 현재까지 압도적으로 대한공화국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한국 중도보수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으며, 더 나아가 좌우익을 막론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 비록 현대에 들어서는 엄격한 보수주의 성향이나 매카시즘적 행보로 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 그의 독립운동에서의 영향력이 과대평가되어있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생애
젊은 동학 운동가
동학 운동가에서 우익 정치인으로
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하다
제1공화국 시절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승전 이후의 삶, 죽음
평가
긍정적 평가
공화국 설립의 주도자
대한공화국 중도우파의 아버지
계보상으로 놓고보자면 대한공화국 중도우파의 아버지는 김규식 전 총리 혹은 장면 전 총리라고 볼 수 있지만, 두명이 민주당 출신이라 공화당 일각에서는 반발 심리가 있는 반면[4], 김창암 대통령은 우익 전반의 존경을 두루 받는 인사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대한공화국 보수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강경 우익 세력 중 대다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자신들의 사상적 지주로 삼고, 일부 극우파는 제1공화국 우익의 대표자라고 볼 수 있는 이승만 전 총리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항일 외교활동 지도
항일운동 도중의 좌우익 통합
대통령으로서의 업적
부정적 평가
극단적인 반일 민족주의 성향
매카시즘 및 백색테러
과대평가 논란
어록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물론 비판하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하여,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을 대한 것 이상이다.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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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당 | 1910 - 1916 | 정계 입문 |
무소속 | 1916 - 1920 | 노선 차이로 탈당 |
대한민주당 | 1920 - 1923 | 입당 |
대한국민당 | 1923 - 1934 | 당명 변경 |
1934 - 1953 | 신설 창당 | |
무소속 | 1953 - 1961 | 탈당[5] 정계 은퇴 |
선거 이력
여담
- 평생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좌익을 혐오했던 인물 답게, 이동휘, 여운형 등 좌익 지도자들과 일화가 많다. 어느날은 대한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이동휘가 김창암과 국민원에서 예산안을 두고 맹렬한 토론을 벌였는데, 쉬는 시간에 같이 화장실을 갔을 때 김창암이 이동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이동휘가 "아니, 동지는 정치 문제를 왜 사적으로도 끌고 들어와 나를 공공연히 싫어하는 척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김창암은 "그야 이동휘 의원은 큰 것만 보면 다 국유화를 해버리려고 하지 않소!"라고 답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출중한 좌익 성향 정치인들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멀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정적이었던 여운형을 자유대한 망명정부의 외교부장관으로 임명하는 통 큰 행보도 보였다.
- ↑ 김창암 선생 기념관 홈페이지이다.
- ↑ 본래는 무학력이지만 1947년 국립경성대학(현재 경성 제1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외에도 다수의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 ↑ 현재로서도 장신인데 당시에는 주요 정치인중 가장 큰 체격을 자랑했다. 심지어 군인이었던 지청천보다도 컸다.
- ↑ 특히 장면 전 총리는 강경우익은 물론 중도우익 내에서도 구파와 싸운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보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익보다도 중도 자유주의 계열에서 존경하는 편이다.
- ↑ 김규식 총리에 의한 대대적 정계 개편에 최대한 정치적 의사를 내비치지 않음으로서 우익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일부러 자유당을 탈당했다. 실제로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자유당이나 민주당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