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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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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검찰청장 김기춘 金淇春 | Kim Ki-chun | |
출생 | 1939년 11월 25일 (82세) |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 |
국적 | 대한민국 |
거주지 | 서울수도시 종로구 평창동 |
직업 | 법조인, 정치인 |
현직 | 자유민주연합 상임최고주석 검사회 명예회장 |
임기 | 대한민국 검찰청장 |
1983년 5월 2일 ~ 1988년 7월 12일 | |
중앙정보성 장관 (김대중 정부) | |
1994년 7월 1일 ~ 2002년 5월 30일 | |
내무부 장관 (정인규 정부) | |
2014년 7월 12일 ~ 2017년 8월 15일 | |
법무부 장관 (정인규 정부) | |
2017년 8월 15일 ~ 2018년 4월 3일 | |
자유민주연합 상임최고주석 | |
2020년 11월 9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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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각종 더러운 정치 공작을 통하여 민주국민당의 일당우위제 정부를 무너트리는데 일조하였으며, 사실상 김대중 정권 창출에 가장 큰 공을 해낸 사람으로 불린다. 김대중 정부 내내 중앙정보성 장관을 지내면서 한국의 정보부를 동아시아 최고의 정보부로 만드는데 기여했고, 신기하 정권 때에는 정부 자문위원으로서 막후 정치를 폈다. 정인규 정부에서는 마지막으로 실제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2018년 정인규가 물러난 이후 스스로도 고령으로 정치계에서 물러났다. 이후로는 자유민주연합에서 상징적인 최고 대표인 상임최고주석의 직위를 맡으면서 검사회의 정치 후배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려깊고 부드러운 말솜씨,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통한 각종 꼼수 등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자민련의 지지자들로부터는 칭송받으나 민국당의 지지자들로부터는 민주주의의 파괴자, 법꾸라지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부정적 평을 받는다.
생애
성장기
검사 김기춘
중정의 왕
그건 국가 기밀입니다. 현행법상 위법이 아닙니다. 중정장관 시절 김기춘의 국감 단골 멘트 |
김대중 정부 수립에 큰 공을 세운 만큼, 40대 초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입각이 결정되었다. 김기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김대중은 김기춘에게 맡고 싶은 부서를 물었으나 김기춘은 "선생님[1]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김기춘의 공작 능력을 잘 알던 김대중은 그를 중앙정보성 장관에 임명했다. 민자당에서 당내 좌파가 탈당해 새누리당을 창당했을 때에는 자신의 성향과 비슷한 새누리당으로 가는 대신 민자당 잔류를 선택했다.[2]
중앙정보성 장관으로 임명된 김기춘은 김대중 정부에서의 강력한 발언권을 바탕으로 많은 예산을 중정 몫으로 편성받았다. 2021년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그가 중정성 장관으로 임명된 다음해의 '공식적인' 중정 예산은 1조 5천 5백 억 원으로, 이전 연도의 1조 2천 억 원에 비해 약 30%나 증가한 액수였다. 김기춘은 막대한 예산으로 타국의 공무원과 주요 인사들을 매수하고 해외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여기에 김기춘 개인의 실력까지 더해지면서 중정의 첩보 능력은 날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덕분에 중정은 원래부터 역량이 약했던 일본 정보기관들이나 서로를 견제하느라 여넘이 없던 동서중국의 정보기관을 제치고 동아시아 최고의 국가정보기관이 되었다.
김기춘은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이들간의 충돌에는 항상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중정에 특정 자료 공개를 요구하면 중정은 제출을 거부한다. 이후 국감장에서 국회의원들이 자료 제출을 거부한 이유를 추궁하며 자료를 내놓으라고 닦달하면 김기춘은 '국가 기밀'이라며 거부한다. 이러한 패턴이 국감시즌마다 반복되었다. 거기에다가 김기춘의 중정은 합법과 위법 사이 회색지대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국회의원들은 김기춘을 '위험분자'로 여겼다. 야당인 민주국민당, 새누리당 등 뿐만 아니라 여당인 민주자유당 소속 일부 의원들까지도 김기춘을 '중정의 왕', '소총통'이라고 부르며 경질을 요구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기춘은 김대중 정부 내내, 즉 8년간이나 중정장관을 역임했다. 이는 역대 중정장관 중 가장 긴 재임기간이다. 이는 김대중의 절대적 신임 덕분이었다.
김기춘은 중정의 강력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김대중의 국정을 뒷받침했다. 그는 특히 김대중의 외교 성공의 숨은 공신이었다. 김기춘은 중정의 우수한 정보력을 통해 일본, 동중국, 서중국 정부의 의중을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고 덕분에 김대중은 3개국 정상들과 함께 동아시아 평화공동선언을 발표하는 외교적 쾌거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 덕에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게다가 11회 대선에서도 김기춘은 중정을 움직여 회색지대에서 프로파간다를 통해 김대중의 선거운동을 지원했고 김대중은 10%라는 높은 득표율 차이로 민주국민당 유수호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3] 김대중은 계속되는 성공과 신들린 처세술을 보이는 김기춘을 두텁게 신뢰했고 김기춘을 향한 공격을 모두 막아내주었다. 덕분에 김기춘은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고 김대중의 입김으로 11회 총선과 12회 총선에서 각각 전국구 10번과 8번으로 출마,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김대중은 두 번째 총통 임기가 끝나가자 김기춘에게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라고 불리던 민자당 대선 후보 신기하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번에도 김기춘은 선거운동을 지원하였으나 김대중 정부의 낮은 지지율이 신기하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12회 대선에서 민주국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렇게 되면서 신기하 정부에서도 계속해서 요직을 맡으려던 김기춘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그는 8년 동안 몸담았던 중정에서 나와 야당 국회의원의 신분이 되었다.
야인 시절
김대중의 신임과 중앙정보성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김기춘이었기에, 김대중이 은퇴하고 중정잔관직도 잃은 상황이 되자 그는 일개 야당 국회의원 신분으로 떨어졌다. 김기춘은 권력을 잃은 허무감 때문에 한동안 술에 기대어 살았다.
정인규 정부에서
야당의 원로로
평가
긍정적
부정적
비판 및 논란
민주주의 훼손
이회창 후보 병역 비리 의혹 제기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여담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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