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민당

쿠리오 긴배 도프 공산1968
벨지엄 공차 DK Dent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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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의정원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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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444석[1]
신임과 보완

21석
야당


255석

46석

17석

6석

3석

3석

2석
무소속 4석
공석 1석
재적 800석
1.
10석
1석
포함.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
독립논단 민주국민당 현재
민족자주연맹 한국민주당(신)
한국독립당 제주신당
한국민주당(구) 신민당
조선국민당 민주당
민국공치회 민주공화당
중도개혁당
(개별 합류)
통일민주당
민주국민당
영문명 Democratic National Party (DNP)
약칭 민국, 민국당
표어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밝은 내일을 지키겠습니다
권력기관 개혁으로
공정한 내일을 위하여
창당일 1948년 2월 5일
전신 한국민주당, 독립논단, 한국독립당, 조선국민당, 민족자주연맹, 대한애국부인회
통합한 정당 민국공치회 (1991년 흡수 합당)
중도개혁당 (2020년 개별 합류)[1]
주소

지도를 불러오는 중...

서울수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4길 12
(여의도동, 우남빌딩)
주석 남경필 / 제12대
부주석 추미애 / 제28대
원내대표 서병수
사무총장 권영세
청년주석 박영훈
총통 이승만 / 초대, 5선 (1948.~1973.)
김영삼 / 2대, 2선 (1973.~1982.)
서석준 / 3대, 2선 (1982.~1990.)
이회창 / 5대, 2선 (1998.~2006.)
오세훈 / 7대, 단선 (2010.~2014.)
유승민 / 10대, 현직
이념 중도보수주의[2]
경제적 자유주의
우남주의
아태 연방주의
비주류: 재정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신보수주의, 중도주의, 국민자유주의, 신공화주의, 기독교 민주주의[3]
과거: 사회민주주의[4] (~1956)
국민보수주의 (~1971)
냉전적 반공주의 (~1970년대 초반)
국가자본주의 (~1970년대 초반)
2월 유신 (1956~1975)
스펙트럼 우파 빅텐트
주류: 중도우파
분파: 중도 ~ 우익
과거
중도좌파 ~ 극우 (1948~1957)
중도우파 ~ 극우 (1957~1970s)
국회의원 442석[5] / 800석 (55.25%)
광역자치단체장 31석 / 48석 (64.56%)
당 색 민국 청색 (#109CEB)
우남 청색 (#00A4F0)
거산 홍색 (#DB001C)
남색 (#353F9C) (~1999)
정책 연구소 우남연구원
국제조직 국제민주연합
중도민주 인터내셔널
아태정당 아태민국당
자매정당 틀:제주신당
당원 수 670만명 (2022년 기준)
책임당원 수 280만명 (2022년 기준)
학생 조직 젊은국민당
청년 조직 틀:청년국민당
여성 조직 여성국민당
당보 시대전환
당가 민주국민당 당가
공식 사이트
SNS | | | | |
2022년 포스터 - 믿는다 유승민

개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은 대한민국의 중도 우파 보수정당이자 제1야당인 자유민주연합의 두 배에 가까운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다. 현 당수(당 주석)는 남경필.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당이자 현재까지 총 6명의 총통을 배출한 가장 거대한 정당이며[6] 자유당계 정당과 더불어 한국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상대 정당 집권기에 항상 국가적 사건사고가 발생하여 반사이익을 얻는 운 좋은(?) 정당이기도 하다.

상징

당명


  • 영어 : Democratic National Party



당 로고

로고 변천사
1946 ~ 1951 1951 ~ 1999 1999 ~ 현재

당가


민주국민당 당가
새역사의 종소리 장엄하구나.
새 결의 함께 다진 힘찬 대열들.

(1절) 민주와 국민의 깃발을 들고
영광된 민족의 길 열어나가자.
(2절) 민주와 국민의 힘을 모아서
평화번영 부푼 꿈 이뤄나가자.

(후렴) 아 밝은 내일을 위해
뭉쳤다 나간다 민주국민당.
새 시대의 일꾼이다 우리 민국당.

1949년 제정. 이승만이 작사했으며 작곡가는 불명이다.

중앙당사

역사

창당

광복 당시 한반도는 좌익이 우익보다 우세한 상황이었다. 2차 미소공위 이전 미군정은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중도파인 근로민주당여운형, 민족자주연맹김규식, 조선국민당안재홍 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오보 사건으로 좌우 갈등이 심해지고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됨에 따라 분단이 확실시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반공주의자들을 결집시킬 필요가 생겼다.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도 곧 수립될 정부를 반공 진영이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통합 정당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대한민국임시입법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우익의 거두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어 신당 창당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이 때까지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논단을 창설했고[7] 독립논단, 한국민주당, 민족자주연맹,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한국국민당 등 반공 우익 정당들과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요 반탁 정당과 단체들을 모아 우악 성향의 연합체인 국민의회를 창설했다.[8] 이후 1948년 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통합을 결의하면서 1948년 2월 5일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첫 번째 집권기(1948~1990)

민주국민당은 1948년에 시행된 제1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서 민국당 후보의 이승만을 당선시킨 이후 김영삼, 서석준 총통을 연이어 당선시켜 자그마치 42년 동안 집권하였다.

이승만 정부(1948~1973)

1948년 7월, 근로인민당의 여운형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총통에 당선된 이승만은 정부 내의 악질 친일파를 척결하는 동시에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또한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38선에 대전차 방해물을 설치하고 미국으로부터 전차를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지원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궤멸, 한반도는 분단된지 2년 5개월만에 남한의 주도로 재통일된다.

이승만 정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37도선 이북을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재건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대선에서도 이승만이 무난히 당선된다.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들을 파견해 자금을 마련한 정부는 본격적으로 경제건설을 시작한다.

한편,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국회의 개헌을 통한 헌법의 3선 금지조항 폐지를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남아 순방 중 버마의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던 총리 김구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배후는 연변으로 탈출한 조선로동당의 잔당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근로인민당의 최고워원이자 국회의원인 김언봉[9]이 김구 총리 일정을 유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근민당 당수 여운형이 사퇴하였고 이후 야권통합은 우익 세력이 주도하게 된다.

공안정국을 통해 개헌에 성공한 이승만은 6%의 표차로 1958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사회칸접자본과 연구개발에 큰 투자를 하여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1963년 대선에서 재집권한 이승만은 강력한 중공업화 정책을 추진한다.  공업단지, 정유소와 제철소가 건설되었고 엄청난 양의 해외투자가 유치되었다.  이승만 정부 4기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2%에 달했다.

4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소련, 중화민국, 인도와 협력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70년 중국을 침공하여 남만주를 합병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민국당 내부 개혁에 착수한다. 소련과의 수교로 당의 냉전적 반공주의가 소멸되었고 시민민족주의와 온건보수주의가 도입되어 당은 우익정당에서 중도우파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차기 대선 후보로 이승만의 정치적 계승자인 김영삼이 선출되었고 1973년, 이승만 정부는 25년의 긴 역사를 마감했다.

김영삼 정부(1973~1982)

김영삼의 재선 성공을 보도하는 KBS

1973년 대선에서 무난하게 당선된 김영삼은 전임 총통 이승만의 눈치를 봐야 했다.  김영삼이 이승만의 후광을 등에 업고 당선되기도 하였고 이승만이 비록 총통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민국당 주석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집권 초반에는 현직 총통 김영삼과 전직 총통이자 여당 주석인 이승만이 국정을 공동 운영하는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김영삼은 이승만의 뜻에 따라 개헌을 통해 총통직을 4년 중임제로 바꾸었다.  또한 아태지역 국가들의 연합체인 아시아태평양국가연합을 출범시켰다.[10]  대신 이승만은 김영삼의 바람대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지원했다.  이런 공동 운영은 이승만이 민국당 주석직을 내려놓은 1975년에 끝난다.[11]

김영삼은 앞서 말한 금융실명제등과 같은을 통해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으나 임기 말이 되면서 지지율이 많이 떨어졌다.  그 예로 김영삼은 제7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서는 야당인 자유당박순천 후보와 겨우 2% 차이로 당선됐다.

서석준 정부(1982~1990)

이승만이 직접 영입한 서석준은 재무부 출신으로 경제 전문가였다.  1982년 대선에서 손쉽게 총통에 당선된 서석준은 김재익, 김종인 등을 앞세워 경제개혁을 실시한다.  이 경제개혁은 경제 주체를 국가에서 민간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었고, 개혁이 성공하면서 3저 호황과 맞물려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을 누리게된다.  또한 서석준 정부는 만주 자치령 민정장관 라정남의 암살을 계기로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공 민족주의 테러단체 열투단를 와해시켰다.  열투단 외에도 양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조폭 조직이 소탕되었다.

이러한 업적에 힘입어 1986년 대선에서도 서석준이 당선되었으나, 지나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과 김재익민주당 분당으로 1990년 대선에서는 민국당 심상우 후보가 민주자유당 김대중 후보한테 패배하며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다.

첫 번째 야당 시절(1990~1998)

산업화와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어낸 민국당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들은 민국당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 시기,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서석준 정부의 대국민 소통 부족이 부각되었다.  게다가 우파 주도 정당이었던 자유당이 김대중의 개혁을 통해 중도화되어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자유당과 민주당 사민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면서 야권이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1989년 대선에서 민자당 후보 김대중이 민국당 후보 김재익을 꺾고 당선되면서 민국당의 41년 장기집권은 막을 내렸다. 이 충격으로 당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비대위가 출범했다. 이후 1994년 대선에서 민국당은 칼을 갈며 정권 탈환을 노렸으나 대선 후보로 선출한 유수호 의원이 김대중에게 10% 득표율차로 패배하면서 탈환에 실패했다.

민국당에게 재집권의 기회는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각종 사회개혁과 복지정책으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던 김대중 정부였지만 집권 2기에 접어들면서 측근ㆍ친인척 비리가 연이어 터져나왔고, 1998년 대선을 1년도 남기지 않을 상황에서 터진 경제위기는 김대중 정부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비록 경제위기가 김대중 정부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동안 충실히 비축해둔 외환 보유고 덕분에 국가부도는 막았으나 김대중 정부의 지지도는 20%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1998년 대선에서 민국당의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면서 민국당은 8년만에 재집권에 성공한다.

두 번째 집권기(1998~2006)

이회창 정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이회창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출신인 이회창은 김영삼에게 영입된 법조인 출신으로 국회의원과 황해도의 초대 민선 도지사를 맡았었다.

이회창 정부의 급선무는 경제 회복이었다.  1997년 경제위기로 인해 한국 경제는 꽤나 큰 타격을 입었다.  이회창 정부는 신용카드 발급 조건을 완화하고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등 경기부양을 위해 노력했고, 또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유지된 규제는 철저히 집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반등하였다.

경제회복에 힘입어 재선에 성공한 이회창이었지만 제1야당인 민주자유당의 유력 정치인이자, 김대중 전 총통의 측근이었던 신기하가 강직한 경제 전문가의 이미지를 무기로 무섭게 치고올라왔다.  이회창은 심복 중 한 명인 박상돈을 키워 대선후보로 내세웠지만 2006년 대선에서 신기하에게 패하였다.

두 번째 야당 시절(2006~2010)

신기하 정부는 노동 개혁과 세금 인하로 보수층 표심을, 복지 확대와 최저임금 인상으로 진보층 표심을 동시에 공략했다.  하지만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세계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지율이 많이 낮아졌다.  민국당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상공세에 돌입했고,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세 번째 집권기(2010~2014)

오세훈 정부

오세훈은 스타 변호사 출신으로, 국회의원과 서울수도시장을 역임했다.  서울시장 재직 중 청계천 복원 등으로 인기를 얻은 그는 현직 총통 신기하를 꺾고 총통에 당선되었다.

오세훈 정부는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확장재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때 비교적 소외되어있던 만주 지방에 사회기반시설이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오세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물류 수송비가 부산에서 LA까지의 물류 수송비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들어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시키자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계획했으나 국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2011년 대한민국 대홍수 사태, 태풍 볼라벤 등의 자연 재해에 대처하는데 실패했고, 무상급식 중단으로 인하여 큰 비판을 받게 되면서 2012년 이후 지지율이 급속도로 하락하였다.

이때 김근태, 안철수, 정인규, 이낙연 등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큰 인기를 얻은 민주자유당 정치인들이 차기 총통 후보 1위로 떠올랐다. 민주자유당의 경선에서 승리한 정인규 후보는 2014년 총통 선거에서 접전 끝에 오세훈을 따돌리며 총통으로 당선되었고 민국당은 4년만에 다시 야당으로 돌아간다.

세 번째 야당 시절(2014~2020)

이 시기는 민주국민당의 가장 큰 위기의 시대였다.  정인규는 신랄한 말솜씨와 부드러운 업무능력으로 높은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정인규의 첫 번째 임기 중에는 특별한 권력형 비리나 대형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17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은 전체 국회의석 400석 중 겨우 117석을 얻어 241석을 얻은 민주자유당에게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거기에다가 당권파의 공천 불이익에 반발해 온건파가 집단으로 탈당하면서 보수 분열까지 우려됐었다.

하지만 정인규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180도 뒤바뀌었다. 여당은 초토화가 되었고 정인규는 총통직에서 물러난 후 구속된다. 정인규의 뒤를 이어 총통직을 승계한 김영춘과 비대위원장에 추대된 무당파 의원 김부겸은 사태를 수습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제18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궤멸, 민주국민당이 완승을 거두었다. 김영춘과 김부겸은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총통 보궐선거가 치루어졌고 민국당의 유승민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민국당은 다시 여당으로 복귀한다..

네 번째 집권기 (2020~)

유승민 정부

재보궐 대선 당시 유세중인 유승민 당시 총통 후보[12]

2020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국민당은 유승민의 경제전문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 "경제 실용 정부"를 표방하였고, 코로나 19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도약하여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유승민 총통의 좌클릭 정책[13]은 당내 보수파들에게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산산이 분열되어있던 진보 진영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민주국민당에 단일 대오를 구축하게 되었다.[14] 비슷한 시기 부동산 대란, 주호영 법무부장관 구속 사태 등으로 인하여 유승민 정부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제18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를 앞두고 이낙연과 유승민 후보의 지지율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승민 정부는 총통 선거를 직전에 두고 국무총리를 이운석으로 교체해 쇄신 의지를 나타냈다.

2022 대선에서 유승민이 승리하며 정권 연장에는 성공했으나 0.5% 차이의 신승이라 상당한 후폭풍이 생겼다.

이념 및 성향

민주국민당은 오랜 시간 지속된 정당이라 이념도 초기와 많이 변했다. 1946년 창당 당시에는 수많은 반공 정당들을 통합한 당이었기 때문에 중도에서 극우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초기 민국당에는 김구, 신익희 등의 우익, 이승만, 장면 등의 중도 우파, 김규식, 안재홍 등의 중도파, 심지어는 조소앙, 전진한 등의 중도 좌파도 있었다.

하지만 1차 개헌 당시 김대중, 조소앙, 전진한, 원세훈 등 당내 좌파가 탈당해 호헌정우회를 창설하면서 당이 전반적으로 우경화되었다. 당시 민국당의 주요 이념으로는 보수주의, 반공주의, 우익 내셔널리즘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다 1971년, 동아시아 전쟁 종결 이후 이승만의 온건화 당책에 따라 당이 전반적으로 중도화, 온건화되었다. 국민보수주의는 온건보수주의와 자유보수주의로 대체되었고 1971년 한국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냉전적 반공주의는 점차 사라졌으며 인종적 내셔널리즘은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대체되었다.[15]

빅텐트 정당이다보니 중도부터 우익까지 포진해있어 왼쪽으로는 우파 리버럴부터 오른쪽으로는 국민보수주의 정파까지 존재한다.

경제적으로는 경제민주주의를 일부 받아들인 온건한 경제자유주의가 주류 이념으로, 낮은 법인세와 선별적 복지를 지지한다. 다만 공명회로 대표되는 경제민주주의 세력과 자유포럼, 공정광장신자유주의 세력도 존재한다. 과거 이승만-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국가자본주의가, 서석준 정부 시기에는 강경한 신자유주의가 당내 주류였다.

외교적으로는 친미, 반중공, 아태통합, PATO 확대를 추구한다. 러시아와 일본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있다. 현재는 반푸틴 성향이다. 원래는 러시아와의 마찰을 우려해 오르도스아태연합PATO 가입에 신중한 입장이었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에는 찬성하고있다. 다만 오르도스와 같이 가입을 희망하는 동투르키스탄에 대해서는 우선 인권 문제와 민주주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승만 정신의 계승을 당헌과 당 강령에 못박아두었다.

지지기반

전형적인 좌도우촌의 구도를 보인다. 한반도 지역에서는 관서[16], 호남 지방[17] 등에서 지지세가 강하다.  관서는 기독교의 영향이 강한 지역이다. 만주 지역에서는 시골지역에서의 지지율이 높은 편이다.

주요 지지계층은 중산층, 부유층, 일부 농민층이다.

세대별로는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40대 이상에서 지지율이 높으며, 2030에서는 지지율이 미약한 편이다.

타 정당과의 관계

국내 정당

역사적인 앙숙. 자민련의 시조 정당인 자유당과부터 으르렁대었다. 양당이 세력 면에서 경쟁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 자유당이 창당된 것도 민국당 소속 총통인 이승만개헌을 강행한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사이가 많이 안 좋다. 민주국민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의 교묘한 진보정당 탄압과 방해 공작으로 인해 진보정당들은 오랜 암흑기를 겪었었다.[18] 게다가 자민련은 사회적으로 보수파여서 민국당과 공통점이라도 있지만 새누리당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민국당과 반대쪽에 있어서 더 그렇다.

그런 대로 친한 편이다. 전진당의 경우는 민국당이 이념적으로 조금 더 우익화 된 버전이라 정책적인 면에서 부딪힐 일이 거의 없다. "자유보수주의→국민보수주의, 경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이 전진당이라고 할 수 있다.

썩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있다. 애당초에 새민당은 오로지 만주계 국민의 권리와 만주 지역 개발만을 요구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그것만 만족시킨다면 어떤 정당에게든 협조한다.

그리 좋지는 않다. 미대행은 반기성 정치를 외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기성 정당을 비판한다. 미대행이 민국당을 계속해서 비판하고는 있지만 민국당은 대응을 자제하고있다.

사이가 좋다. 제주신당의 경우 민국당 제주도당과 지역정당이 합당해서 만들어진 만큼 뿌리가 민국당이라고 할 수 있고 제주신당과 제휴를 맺어 제주신당 소속 정치인들은 제주시 밖에서는 민국당 소속으로 활동하기 때문에(ex.원희룡) 친밀하다. 다만 제주신당은 스펙트럼이 민국당보다 조금 더 넓은 편이다.

최악이다. 민중당은 민국당을 철천지원수로 여긴다. 위에서 언급한 이승만의 진보정당 탄압이 주요 원인이기는 하지만 새누리당보다 더 민국당에 적대적인 것은 그 탄압의 주 대상이 진보정당 내의 강경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원내 정당 중 민국당과 이념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정당이기도 하다. 다만 민국당과 민중당은 체급 차이가 아득하기 때문에 민국당은 민중당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같은 친이승만 정당이기는 하지만 민국댕은 온건 우파 정당인 반면 계승당은 극우에 가까운 정당이라 사이가 안 좋다. 게다가 계승당은 민국당을 "이승만을 팔아먹는 사이비 보수 정당"으로 여긴다. 하지만 민국당은 계승당에 전혀 관심이 없다(...). 원내정당인 민중당에도 관심이 없는 마당에 원외정당인 계승당에게는 어련하겠는가.

해외 정당

민국당 초대 주석 이승만과 베트남 공화당 초대 주석 응오딘지엠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민국당과 베트남 공화당은 1958년 자매결연을 맺은 이래로 계속 교류해오고 있다.

그런 대로 친하다. 양당 모두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있다. 게다가 자유당이 지한파 정당이라 양국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민국당과 자유당이 각각 여당일 때 양당의 당수가 회담을 가지기도 한다.

계파 분류

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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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정연구회: 현 민주국민당 최대 계파로, 유승민 총통의 정치적 견해를 따른다. 이운석 국무총리,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 많은 주류 정치인들이 속해있다.
  • 보수연합회: 강성 우익 성향의 분파이며 국민보수주의적인 성향이 특징이다. 그러나 2018년 총통 선거에서 최용해가 참패한 이후 몰락하였으며 현재는 이언주 광명시 국회의원이 이끌고 있다.
  • 자유포럼: 당 내에서 가장 리버럴한 색체가 강한 분파이다. 사회적으로는 헌정연구회에 비해 진보적이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등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이다. 김동연 전 국무총리가 이끌고 있다.
  • 공명회: 중도~중도우파 계파로, 전 재무부 장관이었던 김종인이 이끌고 있다. 대체로 경제, 사회적으로 전통적인 보수의 입장을 취한다. 현재는 법무부장관인 이재명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 달빛 모임: 문재인 전 국무총리를 따르는 계파이며 민주국민당 내에서 중도파의 거두를 맡고 있다. 문재인 국무총리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위세는 예전같지 않지만 박영선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등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 공정광장: 서석준 전 총통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계승하는 계파이다. 주로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주호영 법무부장관이 이끄는 계파였지만 주호영이 구속된 이후로는 추경호 재무부장관이 회장을 맡고 있다.

지도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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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승만
제2대
김영삼
제3대
서석준
제4대
심상우
비대위
이만섭
제5대
이철승
제6대
이만섭
제7대
이한동
제8대
김영대
제9대
정운찬
제10대
진영
제11대
김진표
비대위
천령위
제12대
남경필
독립논단 대표
민족자주연맹 대표
대한독립당 주석
조선국민당 대표
민국공치회 대표
대한민국 총통 · 민국당 부주석 · 민국당 계파별 의원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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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성수
제2대
안재홍
제3대
김구
제4대
허정
제5대
이기붕
제6대
김몰루
제7대
조경규
제8대
서석준
제9대
이만섭
제10대
유치송
제11대
홍길동
제12대
이회창
제13대
윤여준
제14대
김영일
제15대
이한동
제16대
김영남
제17대
남경필
제18대
심대평
제19대
한승수
제20대
유승민
제21대
원희룡
제22대
김무성
제23대
권영세
제24대
조용원
제25대
원희룡
제26대
조용원
제27대
경정환
제28대
추미애
+

중앙당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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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결기관 (당대회)
전당대회 의장 오신환 전당대회 부의장 이석현
당무집행기구
주석 남경필 부주석 추미애
주석대행 지상욱 주석 비서실장 김의겸
중앙위원 이재명 · 김재원 · 유일호 · 최강욱 · 하태경 · 김병관 (임명직) · 원희룡 (임명직)
사무처
사무총장 권영세 사무부총장 정태근
정무부총장 문대림 민생부총장 이태규
홍보소통위 김광진 사법위 공석
당내 기구
청년주석 박영훈 학생주석 박영훈[19]
여성주석 차성애 우남연구원장 김병준
대변인 라하연 부대변인 조오섭
당내 위원회
여성위 나경원 노인위 김근태
경제위 양향자 을지로위 김성식
인권위 김경수 재정위 정병국
공정위 방인협 생태위 이조청
문화위 탁현민 지역위 모평수
인재영입위 김종인 검찰개혁특위 박범계
언론개혁특위 고민정 민생개혁특위 류성걸
정책위원회
정책위의장 고종태 수석부의장 이상성
원내기구
원내대표 서병수 원내부대표 김두겸
원내대표 비서실장 김석기 원내대변인 권은희
고문단
총통고문 서석준
이회창
오세훈
상임고문 심상우
진영
김진표
최병렬
문재인
김종인
김동연
천령위

◀ 주석

◀ 계파 분류

역대 선거 결과

총통 선거

득표수 십만 단위

선거 후보 득표수, 득표율 비고
1948 이승만
49 / 70 (70%)

당선
1953 이승만
76 / 120 (63%)

당선
1958 이승만
73 / 138 (53%)

당선
1963 이승만
89 / 157 (57%)

당선
1968 이승만
100 / 171 (58%)

당선
1973 김영삼
118 / 200 (59%)

당선
1978 김영삼
126 / 254 (50%)

당선

작업중...

국회의원 선거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증감 지위
 1948 이승만
63 / 150 (42%)
 1951 이승만
174 / 250 (70%)
증가111석
증가28%
연립여당 (1당)
 1956 이승만
182 / 250 (73%)
증가8석
증가3%
연립여당 (1당)
 1961 이승만
155 / 250 (62%)
감소27석
감소11%
여당
 1966 이승만
157 / 250 (63%)
증가2석
증가1%
여당
 1971 이승만
231 / 250 (92%)
증가74석
증가29%
여당
 1976 김영삼
139 / 250 (56%)
감소92석
감소29%
여당
 1980 김영삼
127 / 250 (51%)
감소12석
감소5%
여당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증감 지위
 2016 최용해
117 / 400 (29%)
제1야당
 2020 남경필
257 / 400 (64%)
증가140석
증가35%
여당

작업중...

여담

  • 김씨버거 매장에서 정치인간 회동을 하는 전통이 있다.
  • 과거에는 군인 출신 의원들이 많았다. 박정희, 채병덕 등이 민국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했었다. 현재도 원내 정당들 중에선 전진당 다음으로 군인 출신자 비율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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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당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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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 ● 바로세우기연구소(2석), ● 동북공산당*, ● 대한인민총궐기, ● 한국공산당, ● 서민연합
진보 ● 새누리당(46석), ● 민중당(3석), ● 신사회민주당, ● 녹색민주당, ● 다음으로, ● 더민주당
자유당계 ● 자유민주연합(254석), ● 열린자유당, ● 민주평화당
제3지대 ● 새천년민주당(17석), ● 통일민주당(6석), ● 미래대안행동(3석), ● 시대변혁, ● 거지당, ● 국민대통합당
보수 ● 민주국민당(442석), ● 전진하는 대한민국(21석), ● 내일로미래로
극우 ● 국가사회주의대한노동자당*, ● 민족해방당, ● 애국자당, ● 자유의 쾌청당, ● 신공화당, ● 한국의자살
단일쟁점 ● 청년당, ● 이승만정신계승당, ● 개헌을요구하는국민연대, ● 한국해적당, ● KBS로 부터 국민을 지키는정당, ● 기본소득당, ● 투표를 거부한다, ● 지지정당 없음, ● 아태탈퇴당, ● 덕후도 사람, ● 2차동아시아전쟁을원하는당, ● 평평 지구의 진실을 알리는 당
종교 ● 공화혁명당, ● 기독교사회연합, ● 대한의 불교인들
지역 ● 동북공산당*, ● 만주통일당*, ● 호남기독교민주연합*, ● 제주신당*, ● 제주시민연대*, ● 강원도민먼저, ● 평양퍼스트*
해산됨 ● 한국민주당, ● 근로민주당, ● 조선민주당, ● 자유당, ● 사회민주당, 민주당, ● 호헌정우회, ●민주자유당, ● 공민참여당, ● 중도개혁당
괄호 안은 국회의석수, 상단의 *는 지방의회 의석 보유정당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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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중도개혁당 자체는 민주자유당공민참여당과 합당해 현재는 자유민주연합이다.
  2. 온건 보수주의 정당은 맞으나 자유보수주의 정당인지는 논란이 있다. 영문 위키백과의 경우 온건 보수주의(moderate conservatism)으로 표기하고있다.
  3. 기독민주회 한정
  4. 조소앙 등 비주류 세력
  5. 지역구 335석, 비례대표 107석
  6. 이와 동시에 동아시아의 주요 보수 정당 중 중국 국민당 다음으로 오래된 정당이기도 하다.
  7. 다만 이승만이 독론 소속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8. 좌익 계열 정당들은 이에 반발해 조선공산당의 주도 하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약칭 민전이라는 이름의 연합체를 만들었다.
  9. 봉과는 다른 인물이다.
  10. 창립 멤버는 한국, 중국, 일본, 남베트남 총 4개국이었다.
  11. 다만 이승만은 인제영입위원장직은 유지했고, 서석준, 김종인, 김재익,심상우 등 3040 신인들을 영입한다
  12. 남경필 주석과 정병국 당시 의원도 보인다.
  13. 탄소세 도입, 최저임금 인상 등
  14. 다만, 중도개혁당 내 자강파는 합류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국민당으로 입당해 당내 좌파와 중도파에 흡수되었다. 김재익은 합당과 동시에 정계를 은퇴하였다.
  15. 김영삼 정부 당시 이 시민 내셔널리즘은 기독교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우남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민국당의 핵심 이념 중 하나가 되었다.
  16. 평안남도, 평안북도, 평양광역시, 신의주광역시
  17.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는 제외.
  18. 4회 총선에서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신생 정당이었던 사민당은 의석 수가 반토막나는 수모를 겪었다.
  19. 청년국민당 주석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