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25의 공식 설정입니다. 세계관 연재자 외 이용을 금지합니다.
문서의 모든 내용은 허구입니다. |
이 기관의 청사(건물)에 대한 내용은 동이총독부 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의 일본 열도 통치기관 | |
---|---|
1905~1910 | 1910~1945 |
대일본제국 | 일본한치시기 |
일본통감부 | 동이총독부 |
동이총독부 관련 틀 |
---|
[ 펼치기 · 접기 ] |
동이총독부 東夷總督府 Government-General of Tongi | |
---|---|
휘장 | 인장 |
1910년 10월 1일 ~ 1945년 9월 28일 | |
설치 이전 | 해체 이후 |
대일본제국 |
소련군정 |
미군정 | |
개요
동이총독부(東夷總督府)는 대한제국이 일본한치시기 왜의 강도부에 설치한 통치 기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에 설치되어, 대한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진주한 1945년 미군정에 행정권을 이양하면서 해체되었다.
기관
동이총독
역대 총독
동이총독 |
---|
[ 펼치기 · 접기 ] |
대수 | 이름 | 임기 | 설명 | |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임시 | 朴齊純 |
1910년 8월 29일 | 1916년 6월 20일 | 경기도 출신. 일본통감부와 총독부가 공존한 시기에 통감으로서 직무 대리함. 이후 기존의 지위에 이어 총독으로 승격, 초대 동이총독으로서 무단 통치를 실시한다. 임기 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 |
초대 | ||||
대행 | 李秉武 |
1916년 6월 20일 | 1919년 X월 X일 | 충청남도 출신. 3.1 운동을 무력 탄압하는 등 무단 통치로 비판을 받아, 신사조사사업을 완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년 만에 교체되었다. |
제2대 | ||||
제3대 | 李東輝 |
1919년 X월 X일 | 1927년 X월 X일 | 함경남도 출신. 역대 최장기 총독으로 약 8년간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형식상의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
제4대 | 李容翊 |
1927년 X월 X일 | 1931년 X월 X일 | 함경북도 출신. 1931년 평안경부에서 ○○○○이 왜군 부대를 시찰하던 대한제국 황족 영친왕 이은을 칼로 찌른 사건에 책임을 물어 사임하였다. |
제5대 | 權重顯 |
1931년 X월 X일 | 1934년 3월 19일 | 충청북도 출신. 총리 출신이 총독이 된 경우. 3년 동안 총독을 재임하다 임기 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대행 | 金佐鎭 |
1934년 3월 19일 | 1940년 X월 X일 | 충청남도 출신.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했다. 한왜동조를 주장하고, 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강제징용으로 왜 청년들을 중한전쟁에 참전시켰으며, 창성개명, 서원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
제6대 | ||||
제7대 | 愼順晟 |
1940년 X월 X일 | 1944년 X월 X일 | 한성부 출신으로, 역대 총독 중 유일하게 해군 출신이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며, 왜의 소년소녀들을 신의도와 위안부로 끌려가게 했다. |
제8대 | 洪思翊 |
1944년 X월 X일 | 1945년 9월 28일 | 경기도 출신. 마지막 해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력의 수탈에 총력을 다하였다. 국민의용대를 편성하여 비협조적인 왜인을 대규모로 탄압, 검거했다. 패전 후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건물
동이총독부 청사
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청사 (1925)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