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튼 조사단 (개화)

만주국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 리튼과 조사위원들[1]
리튼 조사단 / Lytton Commission
상급 기관 국제연맹
정식 명칭 국제연맹 만주분쟁 조사위원회
League of Nations Commission of Inquiry into the Manchurian Conflict
조사위원장 영국의 기 빅터 불워리튼
조사위원
[ 펼치기 · 접기 ]
프랑스의 기 앙리 클로델
이탈리아의 기 루이지 마레스코티
미국의 기 프랭크 맥코이
독일의 기 하인리히 슈네
활동 개시 1928년 2월 3일
활동 종료 1928년 9월 29일

개요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은 국제연맹이 만주건국전쟁만주국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조직한 국제연맹 만주분쟁 조사위원회의 통칭이다. 조사단은 1928년 2월에 활동을 개시해 1928년 6월까지 사안을 조사하였고 동년 9월에 "리튼 보고서"라고 불리는 분쟁 조사 보고서를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배경

만주 독립군 (1927)

갑신혁명의 성공으로 개화를 시작한 한국은 빠르게 신흥국의 자리에 올라섰다. 한국은 당대의 시류였던 제국주의의 막차에 탑승하였는데,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격적인 세력 확장을 희망했다. 그 첫 목표물은 바로 한국과 입록강 및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만주 지역이었다. 당시 중국은 군벌의 발호로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할 만큼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설령 한국이 만주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하더라도 중국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게 한국의 판단이었다.

한국 정부는 만주 지역의 연성자치론자, 친한파 그리고 복벽파를 긁어모아 독립전쟁을 사주하였다. 그 결과 1927년 만주 독립을 주창하는 전만연합임시정부가 결성되어 난징의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의 만주의 독립을 선포했다.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쭤린 등 반독립 성향을 보이던 일부 토착 군벌의 저항은 분쇄되었고 반독립 세력의 수괴였던 장쭤린은 기차를 타고 퇴각하다가 황고둔에서 폭발로 인해 사망하였다. 1927년 12월에는 만주 독립군과 그들을 지원한 한국군이 만주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월 전만연합임시정부는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였다.

만주에서의 사변에 중국은 경악하였으나 만주군과 한국군에 대항해 직접 군사적 충돌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다. 그 대신 중국은 곧바로 국제연맹에 이 사변에 대해서 조사하여 시시비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제연맹은 전 벵골 총독인 리튼 백작 빅터 불워리튼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하였고,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하였다.

활동

상하이에 도착한 리튼 조사단

리튼 조사단은 1928년 2월 9일 한국에 입국해 대한민국 국무총리 이상설과 만났고 동월 13일에는 상하이에 도착해 국민정부 주석 탄옌카이, 군사위원회 주석 장제스, 장쭤민의 아들 장쉐량 등을 만나 한국과 중국 양국의 입장을 확인하였다. 중국 정부는 만주에서의 사변이 현지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한국의 침략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 반면, 한국 정부는 사변의 주체는 한국이 아닌 만주독립파 세력이며 한국은 현지 한국 국민과 한국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지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28년 3월 3일, 리튼 조사단은 중국 본토로부터 육로로 만주에 진입해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였다. 조사단은 만주 황제 푸이와 만주 총리대신 정사오쉬 등과 면담하였다. 이후 조사단은 만주 각지를 돌며 민심의 동향과 현지사정을 탐문하였다. 만주 정부는 조사단에게 만주에서의 사변은 전적으로 만주의 독립을 위한 독립전쟁이었으며 만주국이 국가로서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가졌다고 강변하였다. 또한 만주 독립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단이 방문하는 곳마다 각종 행사와 간담회 등을 개최하였고 한국 정부 역시 육화원 성원들을 동원해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 형성에 나섰다.

3개월간 만주에서 조사를 이어간 리튼 조사단은 1928년 6월 조사를 마무리하였고 7월부터 일본 도쿄에서 최종 보고서 작성을 개시하였다. "리튼 보고서"라고 이름붙여진 이 보고서는 9월 말에 국제연맹에 제출되었고 10월 2일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리튼 보고서

리튼 보고서

리튼 조사단은 1928년 7월 동년 9월까지 약 두 달 반에 걸쳐 국제연맹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보고서가 이름하여 리튼 보고서이다. 보고서에는 조사단의 구성 경위, 중국의 현대사, 만주 지역의 현대사, 만주의 중요성, 한중만 3자의 주장, 조사단의 조사 결과, 상황 타개와 분쟁 해결을 위한 조사단의 제언 등이 포함되었다.


보고서의 조사 결론은 다음과 같다.

  • 만주에서의 무력충돌은 한국군이 아닌 만주 지역의 몇몇 친독립 성향 군벌들이 주도하였다. 다만 한국이 제한적인 개입을 한 것은 사실이다.
  • 현지 주민들의 의견은 만주의 독립 과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은 독립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 현재 "만주 정부"는 한국에 상당부분 의존적이며, 한국의 지원 없이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만주는 국제법적으로 중국의 일부로 간주될 충분한 근거가 있다.
  • 한국은 만주에서의 이익과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 국민들의 안전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보고서의 제언은 다음과 같다.

  • 만주는 매우 특수한 상황과 위치에 있으며, 사변 이전으로의 원상회복도 만주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승인도 현재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 중국 정부는 만주의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 중국 정부는 만주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
  • 한국 정부는 만주에서 모든 한국군을 철수시켜야 한다.
  • 한중 양국은 새로이 불가침조약과 통상조약을 맺어 관계를 회복하고 분쟁을 조정해야 한다.
  • 만주는 인접국 간의 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비무장 완충지대가 되어야 한다.
  • 만주의 치안은 전적으로 국제연맹에서 감독해야 하며, 국제연맹의 감독을 받는 치안조직 외의 모든 무장조직은 만주에서 철수하거나 해체되어야 한다.
  • 국제연맹은 합의사항의 이행을 보장하고 관리하기 위해 폭넓은 권한을 가진 위원회 내지 기관을 만주에 파견하거나 조직해야 한다.


보고서는 어느 한쪽 편은 들지 않으면서도 만주 지역의 분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사단의 고심의 결과물이었다. 보고서는 한중만 3자의 의견을 취합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였다. 만주를 중국의 일부라고 규정한 것에서는 중국 정부에 대한 배려를, 만주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장한 것은 한국 정부에 대한 배려를, 만주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하려고 한 것은 "만주 정부"에 대한 배려를 나타낸다고 해석될 수 있다.

각국의 반응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전통적인 서구 열강들은 리튼 보고서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조절하고자 한 조사단의 의도와는 달리 당사국들은 저마다 불만을 표출했다.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 후한민은 성명을 내어 만주를 중국의 일부로 인정한 것에 대해서는 환영하면서도 만주의 비무장화와 자치권 부여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반발했다. 중국 측은 만주 정부가 한국의 꼭두각시이기 때문에 만주 정부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상 한국에게 만주의 통치권을 넘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주 정부 역시 반발했다. 외무상 셰제스는 리튼 보고서 발표 직후 성명을 내고 만주는 독립국이 갖춰야 할 모든 요건을 만족하고 있으며 각 지역의 합법적 통치기관인 지역 정무위원회들이 독립을 선포하였으므로 독립 과정도 국제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보고서 제안의 일부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만주국을 승인하지도 만주국과 수교하지도 않았으며, 1929년 2월까지 "한국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주에 파견된 병력"[2]을 철수시켰다.

보고서 제출 얼마 후에 소집된 국제연맹 총회에서도 한국과 만주는 뚜렷한 입장차를 보였다. 만주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만주 외무상 셰제스가 만주국은 명실상부한 독립국이며 만주 정부가 만주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주장한 것에 반해 한국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외무성총판 김규식은 만주를 독립국으로 승인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한만 양국의 입장차는 사실 양국이 미리 조율한 일종의 연극이었다. 한국과 만주 사이의 의견 충돌을 공개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중국과 리튼 보고서의 만주가 한국에 의존적이라는 주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이었다. 실제로 여러 서구 외교관들은 만주가 한국의 괴뢰국이라는 중국의 주장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경과

한국군이 만주에서 철군하자 만주는 안보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총리 정샤오쉬와 외무상 셰제스는 만주의 안보를 보장해줄 군사 밀약의 체결을 한국에 요청하였다. 한국 정부 역시 속으로는 만주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고 싶었기에 조약에 관한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1929년 초에 양국은 비밀 방위조약인 한만의정서를 체결하였다.

한국은 리튼 보고서의 제안을 상당 부분 수용했지만 만주국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는 반드시 관철해내려고 하였다. 중국은 중국대로 만주의 분리독립만은 막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연맹의 경제 제재를 우려했고 중국은 당장 만주 지역을 수복할 방법이 없었기에, 양국은 리튼 보고서의 제언에 기반해 국제연맹의 중재에 따라 현상유지와 상호불가침을 골자로 하는 나가사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결과적으로 만주국은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해 미승인국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한국은 당초에 계획했던 만주로의 세력권 확장에 성공하면서도 서방 세계와의 심각한 관계 악화는 성공적으로 회피하여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상설 총리는 뛰어난 외교 역량을 입증하였으나 그의 내각이 거둔 성과는 1년 후의 어떤 핵폭탄급 사건으로 인해 빛이 바라고 만다. 반면 중국은 하루아침에 만주를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민중 사이에서 "사변을 획책한" 한국과 이를 막을 역량조차 없는 군벌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만주 정부는 의외로 보고서가 제안한 "국제연맹의 만주 치안 관리 및 이 외의 무장조직 해체"를 수락하고 충실히 이행했다. 이는 만주 내부의 권력투쟁과 연관이 있다. 정샤오쉬, 셰제스, 차이윈성 등의 관료들은 장징후이, 짱스이 등의 군벌과 대립관계였는데, 리튼보고서가 제안한 "기타 무정조직의 해체"가 군벌의 권력기반인 사병조직을 무력화할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3] 마침 국체 논쟁으로 인해 군벌들과 갈등을 겪었던 한국 정부도 이에 찬동하면서 무개추는 관료 쪽으로 기울었다.[4] 마침내 국제연맹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한국군에 의해 군벌의 사병조직이 해체되면서 군벌들은 권력기반을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해체된 사병들 중 상당수는 국제연맹의 감독을 받는 만주 특별경비총국에 편입되었다.

기타

  • 리튼 조사단이 작성한 리튼 보고서는 만주의 건국 과정과 당시 만주의 상황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객관적인 1차 사료다. 따라서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만주건국전쟁과 만주국 성립에 대해 연구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료 중 하나다.

각주

  1. 가운데의 양복 입은 남자가 조사단장인 리튼 백작이다.
  2. 1개 사단 약 1만 5천 명이 만주애 주둔해 있었다.
  3. 여기에 더해 당시 총리였던 정샤오쉬는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군대를 보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4. 관료집단과 한국 정부는 입헌군주정을, 군벌들은 공화정을 주장하면서 영측 사이에서 심한 마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