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 만주국 |
개요
역사
초창기
한만수교기념식 (1935)[1] |
한국과 만주는 만주의 건국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만주를 포함은 중국 전역에서는 온갖 군벌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는데대군벌시대 한국은 만주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몇몇 군벌과 단체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중 하나가 장징후이, 탕위린, 짱스이등이 이끄는 군벌이었다. 이후 한국이 장징후이 등의 친한파 인사들에게 만주에서의 독립국 건국을 종용했고,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복벽주의 지식인이었던 정샤오쉬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가 이 움직임에 합류하였고 복벽파가 한국군의 지원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쭤린, 마잔산 등 반대파를 제압하였다. 이후 1927년 입헌군주제 국가인 만주국이 탄생했다.
한국과 만주의 정식 수교는 만주가 건국된지 한참 후인, 심지어는 제3차 극동전쟁까지 끝난 뒤인 1942년에야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국 정부가 만주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2] 다만 정식 수교 이전에도 양국은 서로의 수도에 대표부을 설치해 대사급 대표를 파견한 상태였기에 사실상 대사급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시대
만주를 국빈방문해 만주 복식을 입은 한국 각료들 (1938)[3] |
만주는 청나라를 계승하는 입헌군주국을 자처했기에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민중의 지지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이로 인해 만주는 더욱 한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고, 건국 직후에는 한국에 만주의 안보를 위탁한다는 한만의정서를 체결하는 등 만주의 대한 의존이 강화되었다. 반면 한국은 만주에서 자원과 인력을 값싸게 공급받고 한국의 공산품을 판매할 안정적인 시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무리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1936년, 이웃한 녹우크라이나에서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과 소련군 사이의 대규모 무력충돌인 치올코우스키 전투가 벌어지자 한국과 만주는 다급해졌다. 그동안 먼 나라 이야기라고 여기던 전쟁이 이웃나라에서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1930년대를 휩쓴 대공황으로 인해 강도높은 군축을 진행했던 터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감퇴하여 있었다. 특히 상황이 심각했던 만주는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한국도 코가 석자인 마당에 마땅히 도움을 줄 방도가 없었다.
결국 1940년, 한국, 만주, 녹우크라이나 모두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 소련군과 일본군의 맹렬한 겅격 앞에 세 나라 모두 멸망의 위기에 놓였었지만 독일의 소련 기습침공으로 인해 소련이 앵커리지 평화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한국과 만주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4]
냉전
앵커리지 조약에서 소련은 한국에는 독소전 개입 금지 외에는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으나 만주에는 중입국 선언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냉전의 시작과 동시에 한국은 자유진영에, 만주는 제3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만주는 강제적으로 중립 선언을 했을 뿐 실제로는 친한 친서방 성향이었는데, 한국이 냉전의 최전방으로서 미국 마셜 플랜의 혜택을 입으며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 재건에 있어 많은 지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표면상으로나마 중립국이었던 만주는 특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만주는 적극적인 전후복구사업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의 원조와 자체적인 역량을 통해 1950년대 후반까지 전후복구를 해야만 했다. 다만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후복구가 완료된 한국이 만주에 대규모 지원을 퍼붇기 시작했고 만주의 잔후 재건도 1960년대 초반에 마무리된다.
앵커리지 조역으로 인해 양국 간의 동맹조약은 파기되었지만 소련의 침공을 경계하는 양국의 입장으로 양국은 군사 부문에서도 비밀리에 협력했다. 한국은 만주에 비밀리에 각종 무기를 지원했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만주군 훈련을 돕기도 하였다. 또 1950년대 후반에 만주 다칭에서 엄청난 매장량을 지닌 다칭 유전이 발견되자 양국은 합자회사를 만들어 공동으로 석유를 개발하였다.
이렇듯 한만 양국은 냉전 시기 공개적으로는 평범한 국가간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물밑에서는 매우 친밀한 상태에서 다양한 협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데탕트 분위기에 힘입어 물밑에서만 이루어지건 한만 협력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하였다.
현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건의 데탕트가 벌어지던 1980년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과 대외불간섭 정책으로 인근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회로 한만 양국은 다시 공개적으로 밀착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과거 소련의 강요로 파기할 수 밖에 없었던 양국 간의 동맹조약을 한만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고 만주 영내에 한국군이 주둔하였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던 소련과 경제 개발로 먹고살기 바쁘던 중국은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녹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한만상호방위조약은 녹우크라이나까지 합류하여 극동조약기구 FETO로 발전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과 만주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로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다방면에서 협력을 거듭하며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라고 한국 학자들은 주장한다.
양국 간의 협력
경제
창춘 외곽 한만국경지대의 무역기차역 |
한국과 만주는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만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한국이며 만주는 한국의 제5 무역상대국이다.
만주 정부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다칭 유전은 개발 단계에서부터 한국측과 만주측이 지분을 50 대 50으로 나눠가져 현재까지도 공동운영하고 있으며 수익금도 나누어 갖는다. 한국은 다칭유전의 석유 등 만주로부터 매년 많은 양의 석유를 공급받고 있으며, 과거에는 석탄 역시 만주가 한국에 대량으로 수출했지만 한국이 친환경 정책의 일환으로 석탄 수입량을 줄이고 있다.
만주의 넓은 평야에는 한국 식품기업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각종 농작물과 가축들을 기르며, 농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한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또 만주는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한국에 수출한다. 반면 한국은 만주에 자본집약적이며 발달된 기술이 필요한 전자제품, 자동차 등 각종 공업제품과 반도체 등의 첨단제품을 수출한다.
1999년 한국과 만주 사이에 체결된 비자협정으로 양국 간의 왕래에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 없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고, 많은 만주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일을 한다. 이들은 보통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한다.
만주의 몇몇 시민단체들은 만주의 경제가 한국 경제에 종속되어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에 따르면 만주 경제는 한국 경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한국의 경제상황이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만주 경제도 같이 요동친다. 또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만주의 대한(對韓) 경제적 의존을 무기 삼아 만주의 정치·경제·외교정책 수립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한만 양국 정부는 부인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들로부터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반면 이것이 순전히 일반적인 국가 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상호의존이리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외교·안보
악수하는 양국 외교수장[5] |
한국과 만주는 극동조약기구에 속한 동맹국으로, 둘 중 하나가 침략받으면 다른 쪽도 자동으로 참전한다. 한국은 만주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연합작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주에 군사고문단과 군사감독관을 파견한 상태다. 외교적으로도 양국은 국제적인 사안에 대해 주로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한국-녹우크라이나, 만주-녹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양국의 외교, 안보적 협력은 주로 극동조약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문화
외교공관
만주는 한성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이외에도 평양, 여옥, 동래, 함흥, 나주 그리고 비사에 총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제주자치도 용담구에는 동래총영사관 제주파견소가 있다. 한국은 창춘에 대사관을, 봉천과 하얼빈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둘러보기
| ||||||||||||||||||||
[ 펼치기 · 접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