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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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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대 국방부장관 박정희 朴正熙 / Park Chung-hee | ||||||||||||||||||||||||||||||||||||||||||||||
출생 | 1917년 11월 14일 | |||||||||||||||||||||||||||||||||||||||||||||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現 경상북도 구미시) | ||||||||||||||||||||||||||||||||||||||||||||||
국적 | 일제강점기 조선 (1917 - 1945) 미군정 조선 (1945 - 1948) 대한민국 (1948 - 1995) | |||||||||||||||||||||||||||||||||||||||||||||
사망 | 1995년 12월 19일 (향년 78세) | |||||||||||||||||||||||||||||||||||||||||||||
서울수도시 삼성병원 | ||||||||||||||||||||||||||||||||||||||||||||||
직업 | 군인, 정치인 | |||||||||||||||||||||||||||||||||||||||||||||
임기 |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 |||||||||||||||||||||||||||||||||||||||||||||
1971년 ~ 1973년 | ||||||||||||||||||||||||||||||||||||||||||||||
대한민국 국회의원 | ||||||||||||||||||||||||||||||||||||||||||||||
1976년 ~ 198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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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국방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이승만의 측근이기도 했다.[1]
생애
박정희는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북 선산(현재의 구미)에서 태어났다. 그의 큰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동생 박정희를 사범학교에 입학시켰다. 박정희는 사범학교에서의 성적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사실 그는 군인의 삶을 동경하고 나폴레옹을 존경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이 보장된 길을 버리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시계까지 하사받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가 되었으나 임관 1년만에 일본이 항복,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또한 붕괴하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박정희는 혈서까지 써가며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경비학교에 입학하여 국군으로 임관했다. 이 시기, 남로당원이었던 큰형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 중 군중을 이끌로 시위를 하다가 군경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이를 계기로 남로당은 박정희를 포섭, 박정희는 국군 장교인 동시에 남로당 당원인 신분이 되었다. 친일파+좌익이라는 더블크라운을 달성했다 숙군 과정에서 이 사실이 밝혀저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군 선배였던 고위 장교 백선엽의 도움과 박정희가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는 조사 담당자의 보고를 통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군문에서 쫓겨났고, 백선엽은 박정희를 문관으로 채용했고 월급까지 챙겨주었다.
박정희가 신세를 펴게 해준 것은 통일전쟁이었다. 박정희는 부하 김종필과 함께 1950년 6월 경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이 있을 거라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국군은 잘 훈련된 경험 있는 장교가 절실했고 만주군 소위로 복무했던 박정희는 큰 어려움 없이 군문에 복귀했다. 이후 육군본부 수송지휘관, 포병연대장 등을 거쳤다.
합참의장 시절 박정희 |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좌익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군 내에서의 박정희의 입지는 불안했다. 박정희의 이 꼬리표를 때준 이는 다름아닌 대한민국 총통 이승만이었다. 박정희의 보고서 때부터 박정희를 주시하고있던 이승만은 박정희를 총애했고 박정희는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총성을 바쳤다. 이를 토대로 박정희는 승승장구하였다. 5사단장 시절에는 연변 정권과의 국지전인 백두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단장을 거쳐 경무대 안보실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 1968년에는 제복군인의 끝판왕인 합동참모의장에 임명되었다.
동아시아 전쟁메서 국군 전략을 설계하였으며 승전의 공로로 또다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국방부장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정계에 입문해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군대 보급 개선과 신무기 도입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군대식으로 일처리를 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국군 원로 대접을 받다가 1995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가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는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만주군관학교를 3위의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통일전쟁, 백두산 전투, 동아시아 전쟁에서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의 괴뢰군인 만주군에 입대한 것이나 광복 후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로동당의 당적을 가진 것은 오늘날까지도 비판받고있다.
사진첩
사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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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선거 이력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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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총선 | 전국구 (9번) | n표 (n%) | 당선 | 초선 | |
1980 총선 | 경북 구미 | n표 (53.8%) | 당선 | 재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