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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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대 국무총리 이승만 李承晩 | Rhee Syng-man | |
출생 | 1875년 3월 26일 |
대조선국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 |
사망 | 1979년 10월 10일 (향년 104세) |
대한민국 한성부 종로구 민국대학교병원 | |
묘소 | 대한민국 현충원 국무총리묘역 |
임기 | 제8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18일 | |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 |
1965년 11월 일 ~ 1969년 11월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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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승만의 초상화[2] |
대한민국의 제8대 국무총리.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1차 세계대전 전후 동아시아 질서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애
초기 이력
이승만은 1875년 조선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에서 태어났다. 배제학당에서 수학하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이승만은 서구 신학문에 큰 관심을 보였고 개화당 인사들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이후 서재필로부터 미국 유학을 권유받고 18세의 나이에 미국 선교사들의 추천장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에서 각각 정치학 석사 학위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01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8년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개화당에서
1901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귀국한 이승만는 서재필의 권유로 개화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고향인 황해도에서 광역 2번으로 중추원 의원에 당선된 그는 앞서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중추원 외무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10년, 박영효 내각의 외무성총판에 임명되면서 처음 입각했으며, 외교 성과를 인정받아 박영효 내각 후 이어진 유길준 내각과 서재필 내각에서도 외총을 맡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동아시아에 동맹국의 세력이 미약하고 참전 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대한민국이 협상국의 편으로 참전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온건파인 국무총리 서재필과의 의견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둘의 관계도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국 1918년 이승만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이끌고 개화당을 박차고 나와 대한국민회를 창당하였다.
국무총리
이승만 국무총리 취임식[3] |
개화당에서 탈당한 후 이승만을 주축으로 한 대한국민회는 191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보수당과 연립해 집권하였고, 총재였던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과반 의석 확보 실패는 이승만에게 있어 정치적 부담이 되었고, 이승만은 이듬해인 1919년 중추원을 해산하고 새 총선를 치렀다. 총선에서 국민회가 과반 의석을 획득하면서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은 안정되었다.
이승만은 외교적 성과와 복지 정책을 통해 민심을 사로잡았으나 독선적인 태도와 권력과 재정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서서히 지지를 잃었다. 이후 1923년에 치러진 10회 총선에서 여당인 대한국민회가 과반에 한 석 모자른 122석을 얻었다. 비록 결선투표에서 이승만이 총리로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총선에서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던 와중 의외의 부진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0회 총선 이후 이승만 내각은 권력 누수를 겪었고 당내외의 사퇴 압박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1926년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그의 후임 국무총리으로는 당시 현직 부총리 겸 기살성총판이었던 손정도가 선출되었다.
장수만세
이승만 귀국 환영식[4] (1945.9.11) |
이승만은 총리직 사퇴 후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이승만은 국무총리 손정도 뒤에서 상왕정치를 할 생각이었으나 이어진 1926년 총선에서 국민회가 자유당에서 패하며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다시는 국민회 내에서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 시기 그는 권력을 잃은 것에 대한 후유증(?)으로 정치의욕을 많이 잃었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았던 미국을 자주 방문했다.
1940년,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해 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당시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시내각도 이승만을 주미대사로 임명해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이승만은 한국을 향한 미국의 대규모 랜드리스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이승만은 3차 극동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주에서 외교활동을 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9월이 돼서야 거의 6년만에 귀국했다. 그가 탄 비행기가 착륙한 김포공항에는 환영인파가 붐볐다고 한다. 직후 이승만은 외교의 공로로 1급 훈장인 보국훈장 대한장을 수훈받았다.
종전 직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총리가 된 여운형이 외무성장관 자리를 제안하였으나 고사하였고 대산 간간히 외교 정책에 관한 조언은 해주었다. 이후 여러 명예직을 맡으며 국가원로 대접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만 90세의 나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큰 표차로 당선되어 1969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기도 하였다. 1979년 노환으로 한성부 한국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104세.
사상
어록
나는 사회주의와 연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혐오하오. 나의 국내 정책은 철저히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계획된 것이니 날더러 사회주의자니 뭐니 하지 마시오. 1920년, 중추원 국무총리 질의 중, 정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자유당 의원에게 |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내실 제, 아무 데에도 쓸모 없도록 내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1932년 |
이제 대한은 살았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소식을 듣고 |
여담
- 한국 헌정사상 최다선 중추원 의원이다. 처음 중추원 의원에 당선된 1901년부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1965년까지, 중간의 1930년부터 1934년까지의 4년을 제외하고 자그마치 총 60년간 중추원 의원을 역임했다.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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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1917 | 정계 입문 입당 | |
무소속 | 1917 | 정계 개편 위해 탈당 |
1917 - 1953 | 창당 | |
1953 - 1979년 | 신설합당 사망 |
육성
국무총리 취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