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바사니 정부

 
엘바사니 정부
Elbasani Government
제4대 각료협의회
1916년 ~ 1924년
조각 1916년 3월 7일
해산 1924년 4월 15일
구성원
군주 스컨데르베우 2세
수상 아치프 엘바사니
부수상 프렌크 비버 도다
각료 수 12명
퇴임한 각료 수 3명
총 각료 수 15명
입각정당 PPp, PLPSh, LV, 무소속
역사
이전 내각 제2기 퍼르메티 정부
다음내각 프라셔리 정부

엘바사니 정부(알바니아어: Elbasani Government 엘바사니 고베른멘트)는 1916년 3월 7일 구성된 알바니아의 4번째 각료협의회이다.

배경

1916년 알바니아 국가의회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룬 제2기 퍼르메티 정부는 그 목적을 다했고, 1916년 3월 7일, 스컨데르베우 2세가 내외적으로 알바니아 왕국을 선포하며 아치프 엘바사니을 새 수상으로 임명하며 내각을 조각할 것을 명한다.

정부 구성

각료구성
직책 성명 재임기간 정당
수상
Kryeministër
아치프 엘바사니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대중당
부수상
Zëvendëskryeministri
프렌크 비버 도다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대중당
외무부장관
Ministër i Jashtëm
메흐메드 코니차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2일 무소속
소티르 콜레아 1924년 4월 12일 ~ 1924년 4월 15일 대중당
내무부장관
Ministër i Brendshëm
아흐메트 조골리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대중당
경제부장관
Ministër i Ekonomisë
무피드 리보호바 1916년 6월 11일 ~ 1924년 4월 15일 대중당
재무부장관
Ministër i Financave
아지즈 브리오니 1916년 3월 7일 ~ 1920년 1월 11일 북부동맹
가초 아다미디 1920년 1월 11일 ~ 1920년 3월 9일 (임시) 대중당
1920년 3월 9일 ~
전쟁부장관
Ministër i Luftës
이사 볼레타니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무소속
교육부장관
Ministër i Arsimit
루이지 구라쿠치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대중당
농업부장관
Ministër i Agrikulturës
사미 브리오니 1916년 3월 7일 ~ 1920년 10월 2일 무소속
메흐디 프라셔리 1920년 10월 2일 ~ 1924년 4월 15일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
공공사업부장관
Ministër i Punëve Publike
이제트 디브라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무소속
체신부장관
Ministër i Post-Telegrafit
미드하트 프라셔리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무소속
법무부장관
Ministër i Drejtësisë
페트로 포가 1916년 3월 7일 ~ 1924년 4월 15일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

아치프 엘바시니를 비롯하여 프렌크 비버 도다, 이사 볼레타니, 아흐메트 조골리알바니아 농민 봉기에서 스컨데르베우 2세의 편에 서 공을 이룬 이들이 내각에 대거 포함되었다. 지역 내에 기반이 있는 루이지 구라쿠치, 프렌크 비버 도다, 아흐메트 조골리 등은 선출의원으로 제1대 알바니아 국가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였으나[1], 그 외의 구성원들의 경우 아치프 엘바사니가 제출한 명단을 바탕으로 지명의원으로 지명된 이들이었다.

조각 당시 구성원들은 모두 무소속이었으나, 이후 정당이 설립되고 아치프 엘바사니 또한 대중당을 설립하면서 많은 이들이 정당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제1대 알바니아 국가의회 회기 동안 아치프 엘바사니, 루이지 구라쿠치, 프렌크 비버 도다, 아흐메트 조골리, 아지즈 브리오니, 페트로 포가를 제외하고는 무소속이었으나, 1920년 알바니아 국가의회 선거를 앞두고 스컨데르베우 2세는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하여금 여당인 대중당에 입당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1920년 알바니아 국가의회 선거 이후 메흐메트 코니차, 이사 볼레타니, 사미 브리오니, 이제트 디브라, 미드하트 프라셔리를 제외한 이들은 전부 대중당 혹은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에 소속되었다.

근왕 세력이 대중당에 입당함에 따라 대중당은 크게 근왕파, 중도파, 개혁파의 세 파벌로 나뉘어졌으며, 이는 내각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중도파 아치프 엘바사니는 무소속 장관과 관계를 다지며 내각 내의 파벌 다툼을 어느정도 억제했다. 그러나 근왕파의 아흐메트 조골리와 개혁파의 루이지 구라쿠치아흐메트 조골리의 권위적이며 억압적인 여러 정책안으로 충돌했다.

재무부장관아지즈 브리오니1920년 알바니아 국가의회 선거를 앞두고 1920년 1월 11일 사망하는 바람에 제2대 알바니아 국가의회 개회 이전까지인 1920년 3월 9일까지 가초 아다미디가 임시로 재무부장관을 맡았고, 이후 지명의원으로 임명되면서 본임기를 시작했다.[2] 농지개혁법 제정과 관련된 문제로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과 타협한 결과 1920년 10월 2일,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메흐디 프라셔리농업부장관으로 교체했다.

1924년 4월 6일, 마무라스에서 발생한 미국인 살인 사건은 이윽고 여러 정치적인 논란에 휩싸였고, 이에 따른 결과로 주알바니아 미 대사관과의 관계가 악화된다. 당시 미국의 자본은 일련의 경제 발전 과정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경제 개발에 있어서 미국과의 친선은 매우 중요한 조건이었다. 4월 12일, 메흐메드 코니차미국과의 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그 뒤를 이어 친정부 성향의 소티르 콜레아를 임명한다.

활동

해산

각주

  1. 이사 볼레타니아치프 엘바사니의 경우 두러스 지역 선출의원으로 전자는 전알바니아적인 인기를 바탕, 후자는 순전히 스컨데르베우 2세의 의중에 의한 것이었다
  2. 각료협의회 구성원은 국가의회에 의석을 지녀야 한다

같이 보기

역대 알바니아 각료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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