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바니아 농민 봉기(알바니아어: Kryengritja e Shqipërisë së Mesme 크뤼엔그리티아 에 슈치퍼리서 서 메스메)는 1914년 5월 21일부터 1917년 3월 9일까지 알바니아 공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이다. 에사드 톱타니의 쿠데타 시도를 계기로 알바니아 공국 체제에 반대하는 오스만주의자들에 의해 발생하였다.
1912년,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13년 7월, 열강 대표들이 비준한 알바니아법에 따라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13년 가을, 독일의 빌헬름 추 비트 공자를 알바니아의 공작에 추천됐다. 1914년 3월 7일, 사실상 왕위에 오른 스컨데르베우 2세는 초기 부족한 덕목과 행정 경험으로 여러 실수를 일으켜 내부 정치 상황을 일부 악화시키긴 했으나, 국제 통제 위원회의 조언과 축적된 경험 속에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1914년 2월, 그리스 왕국의 지원으로 북이피로스에서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이 수립되어 남부 알바니아 지역의 통제권을 잃고,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이 직면한다. 스컨데르베우 2세는 국제 헌병대 및 민병대와 별도의 군사 조직―알바니아 정규군―을 조직하기 원하였으나 에사드 톱타니의 반대와 국고의 한계로 인해 1개 중대 수준의 후일 알바니아 왕실근위대가 되는 에피다믄 중대라 불리는 군사 조직을 조직했다.
농민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5월 17일에 에사드 톱타니가 시도한 쿠데타였다.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의 주민과 보스니아계 난민들을 무장시킨 후 두러스를 공격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어 5월 18일, 제1기 퍼르메티 정부에서 해임되었고, 다음날, 체포 도중 폭사하였다. 5월 21일, 에사드 톱타니의 사망으로 무장 조직은 중심점을 잃고 많은 이들이 와해되었으나, 일부 열성적인 자들에 의해 카바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점차 확대되었고, 두러스는 포위되었다. 초기 반란은 통일된 지도자가 없어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나 이후 하치 차밀리를 지도자로 세워 조직을 구성했다. 그러나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봉기군의 반동적인 행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진압군은 수도 두러스를 포위한 봉기군 세력을 돌파해내고 북쪽과 남쪽의 자원병이 남북으로 압박에 오자 마땅히 버티지 못하고 동쪽 산악 지대로 흩어져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1914년 8월 20일, 티라나 인근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봉기군이 섬멸되면서 양상은 일부 동부 지역에 남은 잔당 토벌로 바뀌었고, 마침내 1917년 3월 9일, 우더니슈트 인근에서 마지막 봉기군이 항복하면서 봉기는 완전히 진압된다.
알바니아 왕국
Mbretëria Shqiptare
배경
1914년 3월 7일, 스컨데르베우 2세가 두러스에 도착한다. 이전까지 공무를 담당하던 국제 통제 위원회는 3월 18일, 수상으로 임명된 투르한 퍼르메티에게 행정권을 넘겼고, 투르한 퍼르메티는 스컨데르베우 2세에게 공무를 인계했다. 각료협의회 임명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특히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던 에사드 톱타니가 내무부장관과 전쟁부장관으로 임명된 건에 대해 소란이 있었다.
그 사이 신생 국가는 경제 및 인프라 낙후 외에도 외부적인 여러 위협에 직면했다. 세르비아군은 1914년 봄부터 여러 차례 국경을 넘어 마을을 공격했다. 북이피로스 지역을 점거하던 그리스군은 3월 1일까지 철수하라는 열강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2월 28일, 철수하지만, 그들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켜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을 선포했다. 3월에는 수도인 지로카스터르 외에도 사란더, 히마러, 델비너, 퍼르메트, 코르처를 포함하는 국가 수립 협상이 시작되었고, 4월에는 코르푸 협정의 윤곽이 드러났다. 한편 4월 10일, 국제 통제 위원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했고, 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집행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 의회 선거를 요구했다.
에사드 톱타니의 쿠데타 미수
에사드 톱타니는 국가의회 구성을 반기지 않았다. 의회의 구성은 그의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방해할 수 있었다. 알바니아 중부의 지지자들을 통해 정부의 영향력 있는 일원으로써 야망을 실현할 세력을 구축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반대파들을 위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14년 4월 10일, 에사드 톱타니의 조카인 아흐메트 조골리가 마트족의 수장이 되자 그는 아흐메트 조골리가 위협이 된다며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아흐메트 조골리는 이전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지지한 전적이 있었을 뿐더러, 국가의회 수립에 호의적이었기에 스컨데르베우 2세는 그를 신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에사드 톱타니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아흐메트 조골리를 체포하고자 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에사드 톱타니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한다. 자신의 영지의 주민과 보스니아 난민들을 무장시켜 시야크 인근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에사드 톱타니에 대한 지지는 특이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더러 스컨데르베우 2세에게서도 신용을 잃고 있었다. 5월 8일, 에사드 톱타니가 사직서를 제출하며 스컨데르베우 2세의 의심을 해명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는데는 성공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스컨데르베우 2세의 신임을 확인한 에사드 톱타니는 다시금 민병대를 조직하였고, 5월 17일, 그 규모는 200명에 달했다. 명분은 북부 해적 토벌이었으나 두러스의 군사 사령관인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도시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고, 에사드 톱타니가 이를 중지할 것을 명령했음에도 스컨데르베우 2세가 두둔하면서 계획은 진행되었다.
5월 18일, 스컨데르베우 2세는 에사드 톱타니를 해임했고, 그 다음날 새벽, 에사드 톱타니의 체포를 명령한다. 요한 슬라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에사드 톱타니의 집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에사드 톱타니는 이를 거절, 그의 안방에서 수류탄이 폭발해 에사드 톱타니가 폭사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다음날인 5월 20일, 제1기 퍼르메티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에사드 톱타니의 세력을 제거한 제2기 퍼르메티 정부를 출범시킨다. 동시에 에사드 톱타니의 세력원은 정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정보조직의 조사 결과, 에사드 톱타니의 쿠데타 시도는 이탈리아가 배후에 있었음이 밝혀져 6월 5일, 이탈리아 장교 몇 명이 알바니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음모는 멈추지 않고 이후 봉기의 배후에 서서 봉기를 지원한다.
경과
에사드 톱타니가 제거되며 정치적 상황은 해소될 것 같이 보였으나, 5월 21일, 카바여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에사드 톱타니가 무장시킨 병력이 그대로 폭동의 주역이 되었다. 다만 에사드 톱타니가 사망함으로써 쿠데타 병력 절반 가량은 자진 해산하였으나 몇몇 이들에 의해 세력이 구축되어 그대로 카바여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카바여의 봉기 소식을 접한 두러스에서는 사르 대위와 80여 명의 중무장한 병력을 파견하여 봉기를 초기에 진압하고자 했다. 다음날, 카바여에서 북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서 사르 대위의 병력과 봉기군 일부가 격돌하였다. 카바여강이 흐르고 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르 대위는 다리 위에 중기관총 진지를 구축했고, 병력을 강을 따라 배치시켰다. 봉기군은 에사드 톱타니로부터 전해 받은 신예 이탈리아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형과 화력, 전문적인 우위에 숫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사르 대위 측의 피해는 2명 부상이 전부였던 반면, 봉기군은 수 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더불어 수 십 정의 신예 소총을 노획했다.
카바여을 시작으로 봉기는 티라나와 크루여 등 에사드 톱타니의 세력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카바여강에서의 전투는 봉기군의 대패로 끝났으나 수 백의 봉기군은 카바여 도심에 숨어 시가전을 벌였고, 그 사이 봉기군은 엘바산을 공격한다. 엘바산에는 약 500명의 아치프 엘바사니의 병력이 있었고, 곧이어 전투가 발생한다. 한편, 티라나와 크루여에서 봉기한 3,000명의 봉기군 중 2,000명이 아흐메트 조골리의 마티족 세력으로 진격해 200명 가량의 조골리의 병력이 맞서 싸우지만 패배한다. 아흐메트 조골리는 패잔병 백여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프렌크 비버 도다와 이사 볼레타니의 병력과 합류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이들은 남하하여 라치에서 추격 부대를 격파한다.
농민 봉기군은 초기에는 통일된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점차 하치 차밀리를 중심으로 아리프 히치메티, 무사 차지미, 무스타파 은드로치 등이 봉기군을 이끈다. 또한 카바여, 티라나, 크루여에서 봉기한 4,500명 가량의 봉기군은 엘바산을 함략시킬 무렵에는 일 만 여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여러 목적을 가졌으나 서구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반발과 정치적인 반동주의인 하지차밀리스트(알바니아어: haxhiqamilistët 하지차밀리스터트) 혹은 둠바비스트(알바니아어: dumbabistët 둠바비스터트)라 불리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복구시켜야 한다는 친오스만적 반동주의자가 중심이 되었다. 그들의 불만은 지주들로부터 농민을 해방시키려고 하지 않은 부처에 대한 불만과 교사가 성직자보다 많은 돈을 받고 그가 가르키는 것들에 대한 반발, 수 백 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충성에 기원했다.
시야크를 향한 농민 봉기군의 공격이 수차례 격퇴되고 카바야가 정부군에 함략되면서 두러스를 둘러싼 모양새이던 세태는 타파되었다. 또한 라치에서 이사 볼레타니와 프렌크 비버 도다의 병력이 봉기군을 격파하고 마티를 해방하면서 봉기 세력이 스컨데르베우 산맥 동쪽으로 개척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카바야, 티라나, 크루여 등 봉기의 중심지가 아닌 각지에서 발생한 소규모 봉기는 각 지역에서 모집된 민병대에 의해 대부분 격퇴되었다. 그러나 엘바산에서 500명의 방어군이 전멸하다시피 저항했으나 함략되고 슈쿰빈강을 따라 동쪽으로 봉기 세력이 확장되기도 하는 등 일진일퇴의 양상을 맞이한다.
6월 중순, 데볼강을 따라 코르처까지 세력을 늘리던 봉기군을 베라트와 블로러에서 합류한 지원군이 슈터르멘에서 기습한다. 정부군의 병력 수는 약 600명인데 비해 봉기군의 병력은 수 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봉기군은 패닉 상태에 빠져 제대로된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부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대열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슈터르멘 마을 내로 들어가 저항했고, 몇몇은 패퇴한 잔당을 재조직해 유의미한 무리를 이루는 등 일망타진에 실패한다. 더군나 유의미한 무리는 동쪽과 남쪽의 산과 숲으로 들어가 저항하는 등 상황은 점차 게릴라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봉기 발생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루마니아 왕국 등 외국의 무기 지원과 자원병이 두러스에 도착했고, 시야크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이를 통해 병력을 증강하고 재조직할 시간을 벌었다. 약 한 달 여간의 시간을 거쳐 8월 11일, 티라나, 크루여, 엘바산을 향한 공세가 네 방향에서 개시되었다. 8월 13일, 엘바산이 함략되었고, 8월 17일, 티라나, 8월 18일, 크루여가 함략되면서 봉기군은 주요 거점을 잃고 뿔뿔히 흩어졌다. 티라나 함략 과정에서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무사 차지미가 전사하였고, 며칠 뒤 티라나 인근에서 잔당 토벌 도중 아리프 하치메티 또한 사살되었다.
주요 거점과 주요 지도자를 잃은 봉기군은 이후 뿔뿔히 흩어져 몇몇은 산지와 숲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이는 진압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게릴라전 도중 행한 기독교인 및 교사 습격 등은 현지인이 그들을 고발하도록 유도했으며, 봉기군 사이에서 내부 분열 또한 이어지며 봉기는 빠르게 와해되어 갔다. 하지 차밀리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흩어진 봉기군을 재결합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1915년 여름, 지니카스 인근에서의 전투로 하지 차밀리가 전사하면서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이 이루어졌으며, 1917년 무렵이 되어서야 사그라들었다. 토벌 과정에서 병력을 동원한 알바니아 공국은 한동안 적자 재정에 시달렸고, 수 년 후에나 관련 채권을 갚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