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자간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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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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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중국 재정부장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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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4·5대 부총통
중화민국 제5대 총통
옌자간
(Yán) (Jiā) (gàn)(엄가감) | Yan Jiagan
출생 1905년 10월 23일
장쑤성 쑤저우부 오현 목도
(現 중국 장쑤성 쑤저우시 우중구 무두촌)
사망 1993년 12월 24일 (향년 88세)
중국 난징시 구러우구 난징시고루병원
재임기간 제4대 부총통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제5대 부총통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제5대 총통(계임)
1975년 4월 6일 ~ 1978년 5월 20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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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静波)
난분(蘭芬)
본관 동산 엄씨
배우자 예슈잉(葉淑英, 1922-1923)
류치춘(劉期純, 1924-1993)
자녀 슬하 5남 4녀
학력 무두소학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 (화학 / 학사)
국적 (1905~1912)
중화민국 (1912~1928)
중국 (민국 38) 중화민국 (1928~1993)
최종 당적 중국국민당
공식 초상화

개요

중국의 정치가, 제5대 총통, 제4·5대 부총통, 제8대 행정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약력

  • 1931. 징후철도관리국 재료처장
  • 1939. 후항융철도관리국 재료처장
  • 1939.1. ~ 1939.8. 푸젠성 정부 건설청장
  • 1939. ~ 1945. 푸젠성 정부 재정청장
  • 1944. ~ 1946. 전시생산국 조달처장
  • 1946. 중국 전구 타이완성 항복식 준비처 처장
  • 1946. ~ 1947.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 교통처장
  • 1946. ~ 1947. 교통부 타이완 특파원
  • 1947. ~ 1948.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 재정처장
  • 1947. ~ 1948. 타이완 은행 회장
  • 1947.5. ~ 1950.1. 타이완성 정부 위원
  • 1947.5. ~ 1950.1. 타이완성 정부 재정청장
  • 1948. 행정원 경제통제위원회 위원
  • 1950.1.9. ~ 1951.3.9. 중국석유공사 회장
  • 1950.1.26. ~ 1950.3.10. 제5대 경제부장
  • 1950.1.26. ~ 1950.3.10. 재정부장[1]
  • 1950.1. ~ 1963.9. 미국원조운용위원회 부주임위원
  • 1950.1.26. ~ 1963.12.24. 행정원 정무위원
  • 1950.3.12. ~ 1954.5.26. 제6대 재정부장
  • 1950. ~ 1957. 행정원 경제안정위원회 부주임위원
  • 1954.6.7. ~ 1957.8.16. 제5대 타이완성 정부주석
  • 1954.6.7. ~ 1957.8.16. 타이완성 보안사령관
  • 1954.11.1. ~ 1957.6.1. 행정원 국군퇴제역관병보도위원회 주임위원
  • 1957.8.22. ~ 1958.7.15. 미국원조운용위원회 주임위원
  • 1957. ~ 1958. 행정원 경제안정위원회 부주임위원
  • 1958.3.19. ~ 1963.12.14. 제8대 재정부장
  • 1963.9. ~ 1963.12. 국제경제협력개발위원회 부주임위원
  • 1963. ~ 1988. 중국국민당 중앙상무위원
  • 1963.12.10 ~ 1968.10.1. 제8대 행정원장
  • 1963.12.10 ~ 1969.8.4. 국제경제협력개발위원회 주임위원
  • 1966.5.20. ~ 1972.5.20. 제4대 중화민국 부총통
  • 1975.5.20. ~ 1975.4.6. 제5대 중화민국 부총통
  • 1975.4.6. ~ 1978.5.20. 제5대 중화민국 총통
  • 1975.4.6. ~ 1978.5.20. 국가안전회의 의장
  • 1978. ~ 1988. 중화문화부흥운동추진위원회 회장
  • 1979.9. ~ 1988.3. 국립고궁박물관관리위원회 주임위원
  • 1980.5.17. 중정기념당 지도위원회 주임위원
  • 행정원 경제안정위원회 주임위원
  • 중화경제연구원 명예회장
  • 1981. 우준시안 문교 공익기금회 고문
  • 1988. ~ 1993.12.24. 중국국민당 중앙평의위원회 주석단
  • 세계은행 이사

생애

유년기와 관료 생활

1905년 10월 23일, 청나라 장쑤성 쑤저우부에서 태어나 무두소학(現 무두실험소학)을 졸업하고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1년 난징-상하이-항저우-닝보[2] 철도 관리국 자재처장을 지냄으로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푸젠성 정부 건설청장으로 재직하면서 곡물 수입 항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어 혼란스러워진 성내의 교통 혼란을 잡기위해 도로와 하천 정비에 힘썼다. 이듬해 재정청장을 맡아 전시재정을 조달하였고 70여종의 잡세를 폐지한 뒤 성내 재정을 개선하여 매년 예산균형을 맞춰 적자가 발생하지 않게하였고 푸젠의 식량공급문제의 해결과 법폐 팽창 문제 대응을 위해 세금을 내지 않고 농작물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감액하는 전부징실(田賦徵實) 제도를 처음 만들었으며 이듬해 재정부를 거쳐 전국적인 시행을 추진하였다. 1945년에는 전시생산국 조달청 장관이 되어 무기대여법(랜드리스)와 중국-영국, 중국-캐나다 간의 대출안을 처리했다.

전후에는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 교통처장으로 부임되어 천이(陳義) 대만성 행정장관 겸 대만경비총사령관과 함께 주 타이완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2.28 사건 당시에는 재정처장으로 부임되어 있었는데 민정처장 저우얼리(周一鶚), 광공업처장 바오커융(包可永)등 천이의 푸젠성 시절 인맥들과 함께 4흉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후 타이완성 정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타이완성과 본토의 재정을 분리한 뒤 신타이완화를 발행하는 재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1950년 재정부장으로 발령되어 내전 이후 비대해진 국방비를 줄이는데 일조하였으며 회계연도 제도를 재정립하여 통일세금징수규정을 시행하고 재정금융정책을 개정하며 현대예산제도를 확립하였다. 1954년에는 잠시 타이완성 정부주석 겸 보안사령관으로 재임하였으며 이후 재정부장으로 복귀하여 19대 금융 개혁 조치를 통과시켰다.

중앙 정계로의 발걸음

1963년 12월, 천청 부총통 겸 행정원장이 급격한 건강 악화를 이유로 행정원장직을 사임하자 후임 행정원장에 지명되어 옌자간 내각이 출범하였으며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를 국방부 부부장으로 암명하여 그의 성장을 도왔다. 1964년에는 한국에 방문하여 장면 총리와 회담을 갖기도 하였으며 1965년 1월에는 장징궈를 국방부장에 임명하여 군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1966년 신임 부총통을 선출해야 할 시기가 왔을때 전임 부총통인 천청은 건강 악화를 사유로 재선을 포기하였다. 당시 장제스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명실상부 그의 아들인 장징궈였으나 이미 편법을 동원하여 3선 금지 규정을 깨부순 장제스에게 있어서 대놓고 본인의 아들인 장징궈를 부총통으로 임명하는 것은 당내 좌파와 민주파를 비롯하여 야권 전반에게 눈총을 사는 일이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유능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전무한 옌자간이 부총통으로 선출되게 되었다.

1968년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제1차 전민항쟁이 일어나자 옌자간은 장제스 총통의 명령을 받아 강경 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통제가 힘들 정도로 확대되자 사태의 책임을 물어 국민당 좌파의 거두인 왕징웨이에게 행정원장 직을 넘기고 1968년 10월 내각총사퇴를 결의한 뒤 사임하였다. 그러나 시위를 강경진압 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는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으며 행정원장 사임 이후에도 승승장구 하였고 이후 1972년에도 부총통으로 재선되었다.

격변기의 허수아비 총통

1975년 장제스의 죽음이 다가오자 3월 29일 장제스의 호출을 받고 장제스의 유언장에 서명하여 삼민주의 실천, 민주헌정 달성에 대해 다짐했다. 4월 5일 장제스가 사망하자 4월 6일 중국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임시회의를 통해 총통에 취임했다. 당시 장제스가 국민당의 영원한 총재로 추서된 상황에서 장징궈가 중국국민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됨으로서 옌자간이 임기를 마친 이후 장징궈에세 총통 직을 넘기고 국민당 독재가 지속될 것이란 의견이 주도적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단조롭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장제스의 장례식이 끝난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75년 5월 10일 장제스의 영원한 라이벌이던 왕징웨이 전 행정원장이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중국 내의 여론은 요동쳤다. 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국민당 정부는 난징, 베이핑, 광저우, 상하이 등 주요 대도시 지역의 치안을 강화하였다.

5월 17일, 왕징웨이의 장례식이 진행중이던 난징시에서 좌익 성향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독재 시위가 발생하였으나 난징시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5명이 사망하고 57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졌다. 정부는 이를 은폐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위의 무력 진압은 조용히 끝날 수 있던 시위를 확대시킨 최악의 수가 되고 말았다. 5월 20일을 전후로하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베이핑을 중심으로 한 둥베이 지역과 광둥 및 티베트 지방, 그리고 각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는 상황에서 장징궈 행정원장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정부는 옌자간의 입을 빌려 해당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중이던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허용하여 대규모의 사상자가 나오는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천안문 사태).

국내외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고 미국을 필두로 한 제1세계 국가들과 한국, 버마와 같은 민주주의 우방국들[3]마저도 중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를 규탄하자 장징궈 행정원장과 옌자간 총통은 백기를 들고 제1차 전민항쟁 관련 인사들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공산당계 인사들의 석방 및 복권 및 완전한 다당제의 복귀[4]와 같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공산당을 비롯한 야당이 전면 합법화 되고, 타이완성에 구금되어 있던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가 정계로 복귀하고 프랑스에 망명가있던 덩샤오핑이 귀국하는 등 정국이 격변하는 과정에서 당시 총통이던 옌자간은 별다른 특출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단에 언급되었 듯이 당시 명목상이건 실질적이건 국민당의 지도자는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 행정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장징궈는 행정원장이자 국민당 중앙위원회 주석이라는 권한을 이용하여 야당과 협상하는 동시에 내치를 담당했고 옌자간은 내각제 국가의 국가원수와 같이 외치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에 그쳤다.

1978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역할인 정권 교대를 수행하기 위하여 총통 명의로 5기 2차 국민대회를 2월 19일 난징 국민대회당에서 소집한다고 공고했다. 2월 19일부터 3월 25일까지 소집된 국민대회에서 공산당의 류사오치가 6대 총통에 당선됨에 따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말년

1981년 소집된 국민당 12기 1중전회에서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91년까지 중화문화부흥운동추진위원회 위원장과 국립고궁박물원 위원을 지냈다. 1988년 장징궈가 사망했을때 국민당 주석 서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1993년 12월 24일 저녁, 뇌졸중 및 인해 심부전으로 인해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평가

이 땅을 평안케 하시고, 만방의 우상이시며, 높은 인격과 곧은 절게를 가진 분이자, 천고에 광휘가 비추는 그분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애도하리오.
장쩌민 총통의 애도문 中[5]

현대 중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그의 총통이나 행정원장으로서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일종의 "상징적 수반" 정도의 권위를 가진 인물로서 격변하는 중국 현대사 속에서 그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즉 행정원장·총통으로서의 권한 모두 실질적으로는 당대의 실권자였던 장제스·장징궈 부자와 국민당 고위층이 행사하였기 때문에 그 권한의 사용에 따른 책임 역시도 권한을 행사한 실권자들에게 돌아갈 뿐 옌자간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중일전쟁 기간은 물론 전후에도 관료로써 꽤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장제스 독재 정권에 대한 부역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의능력에 대한 평가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준수한 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가 정치 지도자보다는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라 한들, 즉 장제스 정권 하에 있었던 백색 테러나 인권 탄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입안한 인물이 아니라 한들 그는 관료로써 이러한 비윤리적인 정책들을 무비판적으로 실행한 실무자이며 그러한 체제에 편승하여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에 비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 학계 일각에서는 그를 아돌프 아이히만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옌자간의 "장제스 독재"에 대한 책임 여부는 중국 정계와 학계,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서도 갑론을박이 오가는 소재이기에, 또한 옌자간이 집행한 일련의 "부역 행위"의 주체인 장제스가 굉장히 많은 논란과 양극단의 평가를 가진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논란은 곧 장제스에 대한 논란으로 직결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그러한 부정적인 평가들을 일부러 묻어두는 경향이 강하다.

여담

  • 중국 국사관에서 펴낸 궈종칭(郭宗淸) 상장의 회고록인 '대풍장군(大風將軍)' 따르면 엄 총통은 군의 브리핑을 주재하면서 탁자 위에 있던 '극기밀' 자료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가지 않자 장징궈 당시 행정원장이 "이 자료들을 가지고 돌아가십시오.[6]"고 말했고, 옌자간은 "아니, 아니, 아니, 나는 갖고 가지 않겠네.[7]"며 사양했다고 한다.
  • 장쑤성 쑤저우시에는 쑤저우무모옌가화원(소주목도엄가화원, 蘇州木瀆嚴家花園)[8]이라는 이름의 옌자간 총통의 생가가 존재한다.
  • 타이완성에 발령받은 이후에는 전 타이완 은행 총재 숙소에서 오랜기간 머물었는데 해당 건물은 현재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깊이 생각할 때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틀곤 했다고 한다.

대중매체에서

  • 장예모 감독의 영화인 인생(1994)에서 제2차 전민항쟁 당시의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는 목소리로 출연하였다.

어록

中華民國的近代史,原就是為自由、正義、民主、憲政而堅持奮鬥的記錄。
중화민국의 근대사는 원래 자유, 정의, 민주, 헌정을 위해 분투한 기록이다.
1977년 12월 25일, "행헌 30주년 기념 대회"에서.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6 제4대 중국 총통 선거 중국 중국국민당 1,681 (55.20%) 당선 (1위) 초선[9]
1972 제5대 중국 총통 선거 2,551 (83.78%) 재선[9][10]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중국국민당 ?(1966)[11] - 1993 입당
정계입문
부총통 당선
총통 승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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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부장 직과 겸직하였으며 대수가 계산되지 않는다.
  2. 약칭 징후항융(京滬杭甬)
  3. 당시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베트남, 몽골, 태국 등은 제외.
  4. 제1차 전민항쟁 이후 중국민주당을 비롯한 자유주의 계열 정당들의 활동이 제한적으로 허가되었으나 당시로서는 권한이 적었던 입법원 및 지방의회에서의 활동만이 허가되었고 국민대회 및 총통 선거 출마는 사실상 봉쇄되었다.
  5. 의역이 포함되어 있다.
  6. 這些資料請你帶回去好了。
  7. 不、不、不、我不要帶。
  8. 옛 이름은 선원(羨園)이다.
  9. 9.0 9.1 국민대회에서의 간접선거.
  10. 1975.4.5. 전임 장제스 사망으로 인해 총통직 승계.
  11. 정확한 입당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66년 제4대 총통 선거 시점에는 국민당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