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팍스 브리타니카)

파일:팍스 브리타니카3.png

파일:영국 국장.png 브리타니아 제국
제후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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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 제국의 식민지
황제 직할령 브리타니아 일본 제후국
Imperial Direct Principality of Britannian Japan
皇帝直轄領 ブリタニア 日本諸国
파일:브리타니아 제국 국기.png 파일:영국 국장.png
황제기 황실 문장
파일:브리타니아령 일본 국기.png 파일:브리타니아령 일본 국장.png
상선기 정부 문장
FIDELITAS SVAE MAJESTATI IMPERATORI
ET DEVOTIO AD IMPERIVM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제국에 헌신하라
국가 Impreial March
황실 찬가 God Save the King
국조 일본 꿩
지도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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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385,944km2
수도 도쿄
최대 도시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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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06,840,000명
인구 밀도 276.82명/km2
민족 구성 영국인 45.1%
명예 브리타니아인 37.3%
일본인 9.0%
한국인 5.6%
기타 3.0%
공용어 제국어 (영어, 라틴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종교 국교 황제교
분포 황제교 74.3%
일본 신토 5.3%
불교 5.2%
무종교 및 기타 15.2%
군대 황제 폐하의 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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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군사독재정, 관료독재정
브리타니아 황제 조지 5세[1]
일본 국왕
일본 대공 어윈 2세

요인
황제기사 헨리 게스코인세실
주둔사령관 스콧 헤델레인
정부
요인
총독 윌리엄 베븐버그
사회조정장관 필러드 데니스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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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PPP)
£10,684,000,000,000 | 세계 6위
1인당 £100,000
GDP
(명목)
£11,431,880,000,000 | 세계 5위
1인당 £100,700
통화 파운드 스털링 (BEP,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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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야드 파운드법 (혼용)
법정 연호 브리타니아 제국 황력
ccTLD
.jp
국가 코드
JP, JPN, 104

개요

동아시아의 일본 열도에 위치한 브리타니아 제국의 식민지이다.

상세

본래 일본(日本, 닛폰)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독립국이었고 수천년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지켜왔으나, 순간의 오판으로 인해 저질러진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의 여파로 인해 브리타니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주요 도시에 핵 공격을 맞고 민간인 850만명 이상이 브리타니아군에 의해 사망하여, 전후 경제는 복구가 불가능할정도로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30년대, 브리타니아 본토와 태평양 건너면 바로 있는데다가 중화제국, 인도제국과도 가까워 무역이 유리하다는 제국 정부의 판단 하에 경제 중심지로 육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정책의 결과 현재는 동아시아 관구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중 한 곳이 되었다.

인도제국 등 다른 식민지와 비교해봐도 강도 높은 동화 및 통제 정책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 동안 브리타니아 역시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들의 침략적 민족성을 말살시킴과 동시에 민족성을 선진 국가인 브리타니아식으로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어 사용 금지령, 일본 황족 전원 추방령[2], 일본 신토 금지령 등이 내려졌다. 54년에 엄청난 규모의 폭동이 있은 이후 현재는 일본어도 사용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등, 비교적 누그러진 식민지 정책이 시행되고있으나, 그럼에도 주요 도시에서는 일본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사라지고, 브리타니아 제국에 완전히 동화된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브리타니아 제국의 식민지를 통틀어 가장 영국인의 비율이 높은 식민지가 되었고, 더불어서 명목상으로는 제후국이어도 사실상 브리타니아의 본토나 다름 없다는 인식 때문에 수많은 기업들이 몰려들어 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브리타니아 본국은 물론이고 식민지 전체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다만 여전히 주로 농업과 3D 직종에 종사하는 일본인과, 사회 지도층에 속해있는 영국인의 경제적, 사회 지위적 격차는 매우 큰 상황이다. 또한 법적으로 브리타니아에 순종적인 일본인들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지만 "전쟁 범죄를 일으킨 국가의 민족"이라는 시선 속에 은근히 사회적 차별을 받는 면이 있어, 일본제국 지하정부, 일본 공산당과 같은 몇몇 독립 조직들이 여전히 일부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역사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의 전후 처리

브리타니아령 일본의 설립

브리타니아령 일본의 설립 이후, 주도권을 잡은 황제 폐하의 제국군 산하의 신정부는 군사 정권을 이용해 일본에 대한 폭압적 통치를 펼쳤다. 일본어 교육이 폐지되고 영어 교육이 강제되었으며, 일본 신토 신앙 역시 금지되었다. 브리타니아령 일본 정부는 황제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인에 대한 폭력적 대우를 하였는데, 이는 일본에 복무했던 황제군의 대다수가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 당시의 참전자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별것도 아닌 일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물론, 억울하게 총살당한 일본인의 수도 매우 많았다.

또한 32년, 브리타니아 황제군의 공작을 받은 백인들과 일부 과격파 친 브리타니아계 일본인들이 신 일본 정신운동이라는 대규모 사회 운동을 일으켰다. 이 시위로 인하여 야스쿠니 신사, 아사쿠사, 오사카 성, 이쓰쿠시마 신사, 히메지성, 이세신궁, 도쿄 어소 등 구 일본의 여러 문화재들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브리타니아 제국군이 황제의 칙령으로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지정해놓은 교토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시의 역사적 문화재들이 파괴되었다. 또한 신사들도 이때 많이 불타서 전국에 남아있던 신사 1,643개소중 1,205개소가 파괴되어, 사실상 일본 신토는 거의 전멸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일본에서 브리타니아로 전해진 삼종 신기 등 몇몇 유물만이 간신히 화를 피했을 뿐이다. B.B. 1314년 창건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었던 호류지도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본인들은 이런 사회적 혼란의 상황에서 자경단을 조직하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려 하였으나, 일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브리타니아 군대는 폭동을 진압하기는 커녕 오히려 뒷공작으로 폭동을 조장해 일본인들의 피해가 엄청났다. 게다가 폭동 중반부에는 과거 일본인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던 조선인, 중국인들까지 폭동에 참여해, 최소 일본인 270,00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일부 일본 민족주의 게릴라는 그 수를 300만명 이상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일으켰으나, 브리타니아 군은 시위대를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총기난사를 저질었으며, 이로 인해 또다시 13,000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결국 이런 반인륜적 식민 통치에 학을 뗀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저항 게릴라에 참여하거나 물자를 지원하였으며 일부는 중립국 스위스에서 간신히 명목을 유지하는 일본제국 지하정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브리타니아령 일본 당시 일본 내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한 폭력적인 식민 통치를 두고 "무단 통치" 혹은 "무력 통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브리타니아 제국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를 "식민지 반란을 일으킨 비효율적 식민 통치였다"라고만 가르칠 뿐, "전쟁으로 수많은 중국인과 영국인을 학살한 당시의 일본인들이 받아야했을 응당한 대가"라며 본질적으로는 브리타니아의 무력 통치기를 옹호하고 있다.

일본 독립 운동의 부흥

48년 참다 못한 일본인들은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 독립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진행되었으나, 브리타니아 헌병대가 시위대에게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며 민심이 격양되었고 이는 닥치는데로 관공서를 불태우고 영국인들을 죽이는 의화단 운동과 같은 반외세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브리타니아 황제군을 통솔하는 브리타니아 제국 기사단은 일본으로 본국 군부대와 중화제국 주둔군, 대한국 주둔군을 파병하여 폭동을 진압하게 하였으나, 일본에서의 거대한 폭동은 본국에서도 일본에서의 잔혹한 식민 통치의 실상이 알려지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황제 직할령 식민지로의 재편

브리타니아 제국 본국에서는 "어떻게 식민 통치를 하면 과거 70년 전 청나라에서나 볼법했던 일들이 일어나는가?" 와 같은 여론이 조성되었고, 동아시아계 식민지로 일본에 악감정이 많았던 중화제국과 대한국에서조차 지나치게 가혹한 통치를 한다는 동정론이 일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브리타니아 군부와 대립하던 내각 측에서는 황제에게 총독 해임과 브리타니아령 일본의 폐지를 건의하였으며, 조용한 혁명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하여 식민지에 대한 유화 통치로 바뀌어나가던 영국에서도 브리타니아령 일본 해체 및 기존 총독 해임의 지지 여론이 높았다. 따라서 황제 에드워드 7세는 브리타니아령 일본의 총독이었던 리니어드 달스턴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브리타니아령 일본을 해체한 이후 자신의 직할 식민지로 두는 "황제 직할령 브리타니아 일본 제후국"을 건국하였다.

식민지에서 황제 직할의 제후국으로 전환됨에 따라, 기존에 군부의 직접적인 식민 통치를 받던 일본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일본 국왕 자리가 생겨서 에드워드 7세가 국왕직을 겸하게 되었으며, 일본국 평민원이 구성되어 제한적 투표권이긴 하였지만 브리타니아인과, 브리타니아에 유화적인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중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의원들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내각은 군부가 일본에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킴으로서 일본 내 민심을 온건한 방향으로 돌리는 한편 군부를 견제하였다. "명예 브리타니아인" 제도가 일본에도 도입되어, 일본인이더라도 브리타니아에 동조적이라면 브리타니아인과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경제적 발전

현재

지리

행정구역

정치

경제

브리타니아 제국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며, 심지어 본국보다도 국민소득의 수준이 더 높다. 국민 수도 1억명이 넘고, 국민 소득은 10만 파운드 스털링을 넘어가, 현재 제국에서 중화제국인도제국에 이은 3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식민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브리타니아 제국에서 건너온 브리타니아인들과 원래부터 일본에 살았던 일본인들간의 경제적인 경차는 매우 크다. 제국 전체를 봐도, 이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한 지역이 벨기에 콩고 왕국, 인도제국 등 몇 안될 정도이다. 평균적으로 보았을때 브리타니아인들의 연봉 평균이 32만 파운드인 반면, 일본인들의 연봉 평균은 9만 파운드에 불과하다.[3] 또한 브리타니아에 협조적인 소위 말하는 "명예 브리타니아인"이 아닌,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저소득층과 빈민층의 삶을 전전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도시 소득은 제국 전체에서 최상위권인 반면, 농가 소득은 과거 브리타니아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던 라오스, 캄푸치아보다도 못하다.

전체 산업으로 보았을때 일본은 제조업이나 농업과 같은 산업보다는, 금융업, 무역업, 관광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브리타니아 제국 본토와 중화제국, 인도제국 등 아시아 지역의 경제 규모가 큰 식민지를 잇는 중간 지점에 있기에 중간 거점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으며, 따라서 일본을 거쳐가는 선박과 돈도 엄청나서 자연스레 금융업, 무역업 등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은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 이전부터 익히 알려져있었으며 브리타니아와 일본의 전쟁중 많이 파괴되긴 하였지만 남아있는 역사 유적지도 많아 수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도쿄는 전 제국에서 가장 큰 경제 중심지이다. 임페리얼 캐피톨, 뉴욕, 베이징도 크긴 하지만 도쿄만큼은 아니다. 도쿄 광역권의 인구는 총 3,700만명에 달해 일본 전체 인구의 35%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광역권에는 힐링던(요코하마), 포트 에드워드(요코스카), 홀비치(지바) 등의 대도시들이 포함된다.

군사

사회

브리타니아와의 완벽한 동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브리타니아인의 비율이 40%대 중반을 넘으며, 순수한 일본인들도 대부분 브리타니아에 유화적이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와 상관 없는, "정통" 일본인의 비율은 전국민의 10%도 안된다고 보면 된다. 그마저도 대부분 농업이나 3D 산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고 있다.

이는 강도 높은 동화 정책의 결과이다. 일본어의 사용은 전후 20년동안 금지되었으며, 대규모 폭동이 있은 이후 조용한 혁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 사용이 재허가되었지만, 일본어는 현재 일본의 그 어떠한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으며, 일본어 화자를 배척하는 분위기도 있다. 심지어 브리타니아에 유화적인 일본인들마저 일본어 화자들을 "예비 테러리스트" "전쟁 범죄자" 정도로 여기며 일본어 사용을 당장 금지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브리타니아 내에서 일본어는 소멸 위기에 있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에 거주하는 브리타니아인중 98%, 조선인중 93%, 일본인중 76%가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일본어"가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모른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하였다.

역사 왜곡 교육도 이뤄졌다. 교토가 현재 황제 직할의 문화재 보존 구역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브리타니아 정부에서는 문화재 훼손 방지를 목적으로 일본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오직 학술적인 목적으로만 제한적으로 브리타니아 본토의 역사학자들에게만 구역 방문을 허가하고 있다. 그 외에 일본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신사, 고성들은 신 일본 정신운동 당시 거의 대부분이 불타버렸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다룬 책들도 이때 많이 훼손되었다. 현재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일본 문화재들은 거의 절대 다수가 나중에 복원한 것이다. 교육 과정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다루며, "일본은 조선과 중국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발전하였고 언제나 잦은 전란에 휩쌓였던 미개발 국가였다. 그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브리타니아가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을 통치하여 큰 발전을 이룬 것이다" 라고 일본의 역사를 가르친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의 대략적인 흐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실제로 일본의 길거리에서 브리타니아인이 아닌 일본인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설문조사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과거의 위인들은 물론이고 이토 히로부미, 사카모토 료마 등의 비교적 근현대의 인물을 답한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는 사례가 있다. 그나마 역사의 경우, 어느정도 구전된게 있기 때문에 비교적 제대로 알고 있는 일본인들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일본인들은 현재 자신들의 역사를 브리타니아의 식민 사관에 맞추어 알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문화

외교

  1.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일본국 국왕을 겸하여 재위한다.
  2. 히로히토 등 주요 황실 요인은 행방불명되었는데 본국으로 압송되어 비밀리에 사형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3. 사실 9만 파운드의 소득만 챙겨도 제국 전체의 제2계급 시민 중에서는 상위 30% 안에 들어가는 고소득자이다. 그만큼 일본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