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식 (플로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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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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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53대 국무부총리대신 임춘식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집안 배경과 성장기

1947년 2월 15일, 황해북도 봉산군 문정면 송산리(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구 송산동)에서 아버지 임태준(林泰俊)[1]과 어머니 남여정(南汝貞)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임춘식의 집안은 대대로 봉산군에서 철강 기업인 '영풍철강'을 운영하던 명문가이다. 친가는 옛부터 봉산 일대의 대지주였으며, 외가는 봉산군 문정면에서 탄광을 운영하였다. 특히 조부는 영풍철강의 창업주로, 봉산 뿐만 아니라 한때 일본과 만주 등에도 진출하여 철강 사업을 펼쳐왔다.

아버지 남태준은 영풍철강 규슈지부 사장, 영풍철강그룹 회장, 대한석탄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황북 일대의 각종 철강 기업을 인수하며 현재의 영풍철강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지역 내 영향력이 막강해지며 정계와의 접촉도 늘어나 이승만의 도움으로 참의원 의원, 상공대신 등의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2]

임춘식은 귀족과 상류층이 주를 이루던 육영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형제가 모두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영에 뛰어든 것과 매우 대조된다. 임춘식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경영학과 진학을 강요하며 임춘식을 떄리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반항심에 국어국문학과로 가게 되었다 한다.

정계 입문

졸업 후 영풍철강에서 이사로 일하다 재건당에 입당하였고, 박정희가 이끄는 창조회의 청년국장이 된다. 정계에 입문하며 아버지 임태준의 지역구인 황북 봉산을 물려받고자 하였지만 이미 밉보일대로 밉보인지라(...) 결국 봉산군은 형 임준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여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김종필의 부름을 받아 정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김종필의 지원 아래 자유당 청년국장, 의정관방 국무조정실 청년비서관 등을 맡게 된다. 1975년에는 충청남도 6구[3]에 출마해 당선하며 의회원에 입성했다.

정유성의 추천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의정관방 정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의정관방은 총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고, 의정부 업무를 조정하는 만큼 이 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힌 것으로 전해진다.

전두환이 당권을 장악한 후 김종필이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자유민주연합을 결성하고 자유당을 나와 있게 된다. 이때 임춘식이 자유당에 남아 남은 청구동계를 이끌게 되는데, 몇년 후 그 공으로 전두환의 퇴진 이후 당권을 장악한 김종필에 의해 총재 비서실장, 당 대변인에 임명된다.

김대중 1차 의정부 당시 김종필이 신민당과의 대연정을 구성하자 당 안팎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당시 김종필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던 임춘식은 반대파였던 전두환 세력 등을 몰아내기 위해 "선거에서 참패한 무능 총재는 필요 없다"며 '정풍운동론'을 물밑에서 확산시켰고, 김종필의 자유당 장악에 크게 일조하였다. 이러한 임춘식의 활동은 정치적 입지를 크게 키웠다.

김종필 2차 의정부 이후

정권교체 이후 문화체육대신, 88올림픽 특명담당대신, 교육대신 등을 연달아 역임한 데 이어 김종필의 자민련을 물려받고, 간사장직에 오르는 등 자유당의 주요 인사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 정권을 신민당에게 빼앗긴 뒤에는 1·2차 김대중 의정부 때와는 달리 김대중, 권노갑, 한화갑을 싸잡아 비난하며 강경한 모습을 보였고 간사장으로서 대여 투쟁의 선봉에 선다. 1996년 연세대 사태를 미숙하게 대처한 김대중 의정부와 자유당에 적대적인 운동권을 함께 비판하며 동반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하였다. 이 일로 김대중 의정부는 신임을 잃게 되고 결국 1998년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충청남도지사

1997년부터 김대중에 대한 비토 여론으로 인해 신민당 정권도 무너질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이 틈을 타 간사장직에서 내려와 직접 지방선거에 뛰어들겠다며 충남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정치적 고향이고 총재 이회창이 지역 연고를 내세우던 곳이었던 만큼 8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된다.

충남지사 재직 시절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지역 균형발전인데, 대전시가 포함된 충남을 북부권, 남부권, 서부권, 중부권, 천안권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특색 산업을 만들었다.

북부권은 아산, 당진 등을 중심으로 하여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등의 산업 수요를 많이 만들었고, 중부권인 공주, 부여, 홍주 지역은 주로 역사·문화 중심으로 백제문화권 개발에 중점을 두었으며, 서부권인 태안, 보령, 서천은 서해안 관광 및 어업 산업이 발전하는 지역으로 구분하였고, 남부권인 논산, 금산 등은 농업이 중심된 지역으로 발전시키는 4대 권역 개발사업을 세웠다. 또 천안은 충청남도에서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단호한 정책으로 도민들에게 환영받기도 했다.

충남은 현대제철, 당진화력, 보령화력(신보령 포함), 태안화력 등 석탄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업장이 많은 만큼 오래 전부터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이 매우 높았다. 이에 임춘식은 '충남 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이름의 환경 정책을 펼쳐 화력발전소를 천안으로 몰아넣고 노후 경유차 운행을 전면 금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임춘식은 "화력발전소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정부와 당진화력, 보령화력을 찾아가 화력발전소를 없애라는 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했다. 그래도 도지사가 자유당의 거물이라는 게 도움이 됐는지 그 결과 당진, 보령화력의 규모가 대폭 감축되게 된다.

이 공으로 임춘식은 좌파 환경단체에게도 많은 찬사를 받게 되었으며, 좌우를 막론하고 도민 모두에게 인정받게 된다. 각종 망언으로 인해 논란이 있어도 결국 이 업적 하나로 정치경력을 이어나갔다는 것.

의회원 복귀

충남지사 퇴임 이후 자유당 상임고문이 되는 등 정계 은퇴의 조짐이 보였으나 이듬해에 바로 의회원 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출마 선언 전까지만 해도 의회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홍주로 돌아갈 것으로 보였으나 고향인 봉산에서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 형인 임준식이 사망하며 무주공산이 되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인데, 지역 유지인 영풍가의 차남인 만큼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며 드디어 평생의 소원이었던 봉산에서의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8년 만에 의회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의 회장직을 다시 맡아 영풍회로 개편하고 세를 확장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구미현, 정병현 등 북부 지방의 중진 의원들을 모은 데 이어 김태흠 등 충청 지역 의원들도 영입하며 영풍회를 중견 계파로 키우게 된다.

이러한 활발한 영입은 2031년 자유당 총재선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데, 이동미와 영풍회가 캐스팅보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존재감을 매우 크게 확대하게 된다.

2034년에는 정세현에 의해 국무부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며 높아진 영풍회의 위상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1. 영풍철강 전 회장, 황해북도 참의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2. 이승만의 자금책이 되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영풍철강 소유의 건물 하나를 팔아치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지금의 홍주시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