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역사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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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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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2.시대별

2.1.아관파천과 칭제건원

청일전쟁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게 경복궁을 두번이나 점령당하고, 건청궁에 감금당해 감시받던 고조 태황제1896년 2월 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직후 태황제는 친일관료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동년 9월 24일 새로운 형태의 의정부를 조직하여 국왕 중심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때 러시아를 필두로 한 열강의 막대한 이권 침탈이 자행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되면서 1904년 러일전쟁 발발까지, 제국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 있었다. 이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태황제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커지며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태황제는 환궁과정에서 칭제건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유도했고, 심순택, 조병세, 권재형 등 전현식 관료들과 정교, 장지연 등 신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후 조선 조정은 1897년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변경하고 환구단을 조성하여 10월 26일 황제에 등극하였다.

2.2.국제반포

초기 대한국의 체제는 고조 태황제독립협회나 독일식이냐 영국식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입헌군주제가 고려되었다. 하급 관료와 황실 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제국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 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 제국이 채택하고 있었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 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빼앗는 식으로 입헌 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시위와 집단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보부상들의 지지를 받았다.[1] 독립협회의 실력도 권력을 인수하기엔 부족했다.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 내 여론을 등에 업고 국내 외국 공사관들의 암묵적 지지를 배경[2]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행정심의회)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고종의 반발을 사는 독립협회 임원들의 무리한 행동으로 해산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 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중추원이 가지게 되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명성황후 암살 모의 사건[3]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박영효나 국외 추방된 미국인 서재필(필립 제이슨)[4]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 내부의 친미, 친일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5]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 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해산시켰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급진적이어서 공화주의까지 이야기되고 있었다.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가 반포되었다.

2.3.광무개혁

2.4.을사늑약과 헤이그특사

2.5.통감부 통치기

2.6.융희민정기

2.7.제2차 세계대전

2.8.분단과 통일

2.8.1.미군정과 소련군정

2.8.2.경인사변

2.9.4.19혁명과 군부독재

2.10.신군부의 쿠데타 미수와 80년체제

2.11.80년 체제 붕괴와 외환위기

2.12.외환위기 극복과 성화시대 개막

3.대한제국에서 개최한 주요 국제 행사

4.관련 링크

5.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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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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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행정심의회)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아직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지방민들은 여전히 왕을 섬기는 근왕 의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보다는 황국협회의 세력과 지지도가 훨씬 컸다. 또 단순히 독립협회에 반발하는 전근대적 반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황국협회를 주도한 홍종우 역시 프랑스 유학을 거친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2. 고종이 독립협회 해산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한양 내 독립협회 지지층이 아니라, 정동에 있던 외국 공사관들이었다.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것이 대외적으로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서양 공사관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립협회의 해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을미사변 이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이다.
  4. 당시 박영효는 반란 시도를 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귀화한 다음 독립문과 관련해서 귀국했다가 다시 정치적으로 사고를 쳐서 추방된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한국(조선) 국적도 포기했다.
  5. 특히 박영효를 쓴 사람이 주요 대상이었다. 박영효는 이 시점에서도 조선 내부와의 연결과 반란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즉 박영효를 추천한 사람은 외환죄로 취급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