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사이고


욱일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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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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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센 번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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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사이고
간조 막부 · 조센 번 · 이왕 · 조센 총독 · 조센현지사
조센 번 제14대 다이묘
리 사이고 | 李載晃
초대 이왕
형왕 | 㷗王
본명 리 사이고 ( ()載晃 (さいご))
출생 1852년 9월 8일
조센 번 간조 안고쿠초메
(現 대동아제국 조센현 게이조 안고쿠초메)
사망 1919년 1월 21일 (향년 66세)
대일본제국 게이조부 게이조고쇼
국적 파일:Merchant flag of Japan (1870).png 대일본제국
능묘 홍릉(洪陵)
재위 조센 번 다이묘
1864년 1월 21일 ~ 1900년 4월 30일
이왕 (추존)
1900년 5월 1일 ~ 1919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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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李)
사이고(載晃)
존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
부모 흥선대원군
순목대원왕비
왕후 민비
자녀 장남 리 다쿠
외 3남 1녀
신체 153cm, 70kg
종교 유교 성리학불교

개요

조센 번의 제14대 다이묘이자, 일본 역사를 통틀어 재위한 마지막 다이묘이다. 불과 12세에 자신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조센 번의 다이묘로 추대받았으며, 그후 36년간 조센 번의 다이묘로 재위하였다. 개인적인 정치술은 나쁘지 않았으나, 국가를 운영하는데에 있어서 역량이 부족하였고 또한 왕후 민비 일가의 각종 부정부패로 인하여 조센 번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생애

유년기

마지막 다이묘가 되다

친정

정유각서, 양위

말년

조센 번이 멸망하고 폐번치현이 시행된 이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으나 조센 번을 다시 세우고 일본 정부를 무너트릴 계획을 세웠다. 외국으로 밀사를 파견하는 한편, 일본 본토의 구 사무라이 및 다이묘 가문과 연락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되돌리고 에도 막부 체제의 재건을 꾀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번번히 일본 정부에 의해 발각되었으며 이는 리 사이고가 목숨만 부지한채 사실상 게이조 고쇼에 유폐되는 이유가 되었다.

1910년대 이후로는 놀라울정도로 발전한 조센의 모습에 스스로 에도 막부 체제의 재건을 포기하고 일본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조센번의 고유 언어였던 조센어 사용을 고집하는 등 조센 번에 대한 애정은 놓지 않았다.

1919년,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급사하였으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조센현 내에서는 리 사이고의 높은 인기를 의식한 일본 정부가 그를 독살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았다.

사후

1945년 선화제이왕 작위를 신설하면서, 이왕작이 만들어지기 전 사망한 의 구 조센 다이묘를 이왕으로 추존하였다. 비록 추존 이왕이긴 하나 그는 대체로 첫번째 이왕으로 대우받는다.

평가

긍정적 평가

대동아제국 내에서는 정치적인 평가를 떠나서, 강성한 유교 성리학자였던 아버지외척가의 부정부패,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즉위한 그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1919년 그가 사망하기 이전까지 조센 번에서 리 사이고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으며, 리 사이고의 이런 높은 인기는 그의 사후 기미년 만세 사태가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규슈 지방에서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인기가 매우 높듯이, 현재도 조센현 지방에서 리 사이고는 마지막 조센 지방의 독자적인 실권자로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부정적 평가

정치적인 판단 능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그 능력을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사용하였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조센 번의 경제적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경제 사정을 악화시켜 1894년 농민들의 폭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권력욕이 매우 강력하여, 1900년 다이묘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수차례나 조센의 독자적인 막부 정권을 세우려는 시도를 하여 대일본제국 황실의 골치를 썩였다. 추밀원에서는 리 사이고의 극형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의양제는 이를 모두 물리쳤다. 그나마 1910년대 이후에는 비교적 온건해져, 일본 정부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끝까지 다이묘 제도를 집착하였다는 점 등 시대착오적인 정치 성향 역시 비판받는다.

여담

독살설

대중매체에서

그의 독특한 생애와 마지막 다이묘라는 특이성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그가 인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의해 1953년 "리 사이고 다이묘 비사"로 그의 일대기가 각색되었으며, 이 영화를 원작으로 하여 1984년 가와사키 안리 감독에 의해 "마지막 다이묘"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흥행하였다.

199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바 료타로 작가는 리 사이고 다이묘의 양위 직전 상황을 1970년의 소설 "헌국"으로 각색했다. 전반적으로 동정적인 시각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 무능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조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