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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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4-8대 내각수상 허가이 許哥而 | Ho Ka-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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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Alexei Ivanovich Hegai |
출생 | 1908년 3월 18일[1] |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주 하바롭스크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하바롭스크 지방 하바롭스크) | |
사망 | 1989년 7월 2일 (향년 71세) |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구역 함흥시 제1인민병원 | |
묘소 | 남산혁명렬사릉 허가이동지묘소 |
재임기간 | 제4대 내각수상 |
1957년 3월 14일 ~ 1958년 9월 11일 | |
제5대 내각수상 | |
1958년 9월 12일 ~ 1962년 9월 12일 | |
제6대 내각수상 | |
1962년 9월 13일 ~ 1966년 9월 7일 | |
제7대 내각수상 | |
1966년 9월 8일 ~ 1970년 9월 9일 | |
제8대 내각수상 | |
1970년 9월 10일 ~ 1972년 12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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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제4-8대 내각수상.
약력
생애
유년 시절
1908년 러시아 제국의 프리모르스키주 하바롭스크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조선인 학교에서 근무하던 교사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상당히 기구하게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9살일 적에 요절하였고 아버지도 얼마 안 가 자살하여 그는 그의 삼촌에게서 길러졌다. 그는 11살일 때부터 각종 공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는데 1919년부터 1년 간 담배공장에서 부업을 하기도 하였고 1920년부터 3년 간 이발소 보조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1924년부터 3년 간 국영주류공장에서 노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인 1928년엔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조합학교에서 2년 간 수학하였다.
그 시대 연해주의 수많은 조선인들은 반일 성향을 드러내고 소수민족 차별 철폐를 내세웠던 공산당과 적군에 적극적으로 합류하여 이를 통한 빈곤 탈출과 지위 상승을 노렸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도 이러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1924년 소련 공산당의 청년단체인 콤소몰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2살이 되던 해인 1930년에 그는 극동 지역의 유력했던 조선계 정치인이었던 아파나시이 아르센티예비치 킴(Афанасий Арсентьевич Ким)의 추천서를 통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남다른 총명함과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하여 1929년부터 그는 콤소몰 극동지역위원회의 서기로 선출되어 4년 간 근무하였으며 이 당시 소련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가 그의 열성적 활동을 크게 눈여겨본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한다.[4]
소련에서의 활동
비슬라브계였던 그는 1920년대 국제주의를 내세웠던 소련 공산당의 정책에 걸맞는 소수민족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정치적으로 크나큰 특혜를 받았다. 그는 콤소몰 극동지역위원회에서 4년 간의 서기 재임 이후 그는 1933년부터 1년 간 모스크바로부터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키네슈마의 콤소몰 구역위원회 서기를 지내게 된다. 1935년 그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 공산농업대학에 입학하게 되지만 입학한 지 1년도 채 안된 1935년 7월 10일 가족 문제와 자금 부족으로 인해 중퇴하게 된다.
다시 극동으로 돌아온 그는 1936년 2월부터 아무르 지역위원회의 조직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36년 말에서 1937년 초에는 포시예트 콤소몰 지역위원회의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가 낙향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 당시 포시예트에 근무하던 수많은 조선인 관료들은 일본과의 내통 의혹을 받으며 줄줄이 해임 및 체포되었기에 그는 이 지역의 콤소몰을 재건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이를 성공적으로 실행한 허가이는 포시예트 지역당위원회의 제2서기로 임명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콤소몰의 관료에서 공산당의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 시기 포시예트의 콤소몰과 당의 지역위원회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공직을 맡아왔었는데 조선 전 내무상 강상호와 방학세, 1945년 소련군정이 설립한 조선신문(朝鮮新聞)의 편집장이었던 강 미하일(Михаил Кан, 강용구) 등이 이 시기 포시예트에서 활약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탄대로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이는 그 시기에 맞춰 찾아온 스탈린의 대숙청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극동에서 점점 그 세를 불려오고 있던 조선인들의 자치권 확대 요구로부터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만주국과 접경하고 있던 해당 지역의 특성 상 조선인들의 존재가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데다가 이들 사이로부터 일본이 첩자를 심어놓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1937년 8월부터 극동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대거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한다.
이 시기 조선계임과 동시에 당의 중진급이었던 허가이도 반당분자로 몰려 크나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1937년 가을엔 센코 지역위원회의 제1서기가 체포당했으며 그가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줬던 아파나시이 킴도 '인민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딸의 증언에 따르면 그 시기의 그도 만일을 대비해 현관 앞에 감옥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한 비상용품을 담은 가방을 상시 배치해두고 아내와 함께 본인이 체포된 후의 가족의 거취를 자주 논하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체포당하진 않았지만 결국 당에서 출당되었으며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양기율로 이주당하게 된다. 이 곳에서 그는 수매기관 창고의 지배인으로 근무한다.
대숙청의 물결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한 1938년부터 재임하기 시작한 내무인민위원 라브렌티 베리야는 1937년도에 이루어진 일련의 상황에 대해 '별도의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하였으며 이러한 덕분에 몇몇 이들은 공산당으로 복당하여 재기에 성공하게 되는데 허가이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1939년 출당 조치가 취소되고 명예를 회복한 허가이는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다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양기율 지역위원회 보좌관을 시작으로 지역위원회 강사, 조직부장 등을 지냈으며 1941년부터는 지역위원회 제2서기로 재임한다.
1941년 말에는 니즈니치르치크로 옮겨 그 곳의 지역위원회 제2서기로 재임한다. 1943년 그는 당시 양기율 지역위원회 제1서기 라술로프의 도움을 받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인근에 건설되는 파르하드 수력발전소 당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되어 1년 간 근무한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는 양기율에 위치한 고려인 콜호즈인 레닌명칭제2콜호즈에서 근무하였으며 이 시기 그는 조선인 마을에 소규모 수력발전소 건설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소련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의 북부 지역에 주둔하여 해당 지역에 군정청을 설립하게 된다. 허가이는 여기서 조선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당시 조선반도 북부에 주둔 중이었던 소련군 제25군 사령부에 통역사 역으로 파견되었다.[5][6] 이렇게 파견된 조선계 소련인들은 약 1년 간 군부대에서 근무하다 1946년 즈음이 되어서야 조선의 당과 군 지도부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지만 허가이는 파견 직후인 1945년 조선공산당에 파견되어 조직 재건이라는 크나큰 중책을 맡게 된다.[7]
조선에서의 활동
김책과 허가이와 김일성, 1950년 |
박헌영과의 불편한 공존
권력싸움에서의 패배와 숙청
사망
장의위윈회 구성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소련 이중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탓에 김일성 시기부터 박헌영 시기까지 이 이중국적을 문제 삼은 반대파들의 지속적인 정치적 공세가 들어왔으나 그는 이를 꿋꿋이 무시하고 소련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소련을 향한 애향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인명 표기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다. 그의 조선식 이름인 허가이(許哥而)는 그의 본명 중에서 '헤가이'를 한자로 음차한 것.
고려인 성씨 중 일부는 헤가이처럼 -가이(-гай)가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20세기 초 조선인들이 대거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의 극동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해당 지방의 러시아인 관리들이 기존의 짧은 조선인의 성씨에 '가이'라는 접미사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접미사는 러시아인 통계원들이 극동으로 이주하던 조선인들의 성씨를 물었을 때 이들이 "~가(哥)요"라고 답한 것을 그것까지도 성씨인 것으로 오인한 것이 그대로 굳어진 것으로 이와 비슷하게 최씨 성씨를 가진 고려인들은 '츠가이(Тягай)'가, 유씨 성을 가진 고려인들은 '유가이(Югай)'가, 오씨 성을 가진 고려인들은 '오가이(Огай)'가 되었다.
그의 조선식 이름인 허가이의 한자 표기는 김두봉이 그의 요청을 받아 지어준 것으로 而(말미을 이) 대신 誼(정 의)를 쓴 허가의(許哥誼)라는 표기도 가끔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점점 사라졌으며 현재는 而를 사용한 '허가이'라는 이름이 그의 조선식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영미권에선 Ho Ka-i라는 표기를 사용하며 이러한 표기 외에도 그의 러시아식 성씨인 Hegai도 종종 사용된다. Hegai라는 표현은 그가 조선으로 이주하기 전의 활동을 다루는 문건에서 주로 사용된다.
어록
각종 매체에서
영화
소설
게임
방송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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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1937 | 정계 입문 | |
1937 - 1939 | 제명 | |
1939 - 1946 | 복당 | |
1946 | 입당 | |
1946 - 1949 | 합당 | |
1949 - 1989 | 합당 정계 은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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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력 2월 16일.
- ↑ 사별
- ↑ 이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작성한 문건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차녀 허리라는 그가 하바롭스크가 아닌 프리모르스키주의 포시예트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선 그가 함경북도 출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 아파나시이 킴과 파벨 포스티셰프는 대숙청 시기 각각 일본의 첩자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하게 된다.
- ↑ 그러나 그는 소련에서 태어나고 한 평생을 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어를 구사하는 것에 상당히 서툴렀다.
- ↑ 이렇게 파견된 조선계 소련인들은 그를 포함하여 총 12명이었는데 이들은 후일 조선로동당의 친소련계 계파인 소련파를 조직하여 계파의 초대 지도부가 된다.
- ↑ 그 당시 허가이를 조선으로 파견할 것에 대해선 상술했던 양기율 지역위원회 제1서기 라술로프의 추천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탓에 그는 애초에 통역사 역할이 아닌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다는 의견이 존재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현재까지는 그가 통역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