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호네커: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128번째 줄: 128번째 줄:
==== 제국주의와 맞서다 ====
==== 제국주의와 맞서다 ====
=== 서기장 퇴임 이후 ===
=== 서기장 퇴임 이후 ===
1988년, 건강상 악화의 이유로 서기장 3선을 포기하고 평당원으로 물러났다. 후임자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보이트케 야루첼스키]]로 지명되었다. 그의 퇴임 이후 1년만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3년 후에는 [[영국 해체]]까지 일어나면서 호네커의 강경한 반미 노선이 옳았음이 다시 한번 입증되기도 했다.
그는 퇴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고향 [[노인키르헨]]에서 보냈으며, 가끔 당의 원로로서 목소리를 내는 일 외에는 뚜렷한 공개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1992년 제27차 대회에서 [[헤르베르트 프람]]이 당 의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상징적 국가원수 직위인 당 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당 의장으로서 한 일은 거의 없었으며, 노인키르헨의 개인 목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국가위원장으로서의 실무도 사실상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서기장에게 모두 맡겼다. 말년에는 칠레와 독일을 오가며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81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숙적 [[헤르베르트 프람]]이 사망한 지 2년 만이었다.
== 평가 ==
== 평가 ==
=== 긍정적 평가 ===
=== 긍정적 평가 ===

2024년 9월 8일 (일) 11:22 판



라트 연방 최고 지도자
[ 펼치기 · 접기 ]
초대
인민위원장
로자 룩셈부르크
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그레고어 슈트라서
3대
중앙위원회 의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
4대
서기장 대행
발터 셸
5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6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헤르베르트 프람
7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
8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9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니콜라스 네메트
10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그레고어 기지
11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게르하르트 슈뢰더
1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앙겔라 메르켈
13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자라 바겐크네히트
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최고 지도자 · 의장 (국가원수) · 서기장 (정부수반) · 당대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 관련 둘러보기 틀
[ 펼치기 · 접기 ]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제4대 제5대 제6대
오토 바우어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베르트 프람
제7대 제8대 제9대
에리히 호네커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니콜라스 리시코프
제10대 제11대 제12대
오스카 라퐁텐
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최고 지도자 · 의장 (국가원수) · 서기장 (정부수반) · 당대회 의장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서기국 서기장
[ 펼치기 · 접기 ]

선정 라트 연방의 인물
[ 펼치기 · 접기 ]
2019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독일어 방송사 ZDF가 전체 언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라트 연방의 인물’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라트 연방 인구 3억 5,700만 명 중 1억 2,000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상위 10인
1위 2위 3위 4위 5위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아돌프 히틀러 그레고어 슈트라서
6위 7위 8위 9위 10위
에리히 롬멜 헤르베르트 프람 에리히 호네커 파울 요제프 괴벨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11위 ~ 100위
[ 펼치기 · 접기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라트 연방 제7대 최고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
출생 1912년 8월 25일
프로이센 왕국 자를란트 노인키르헨
사망 1994년 5월 29일 (향년 81세)
프로이센 FSRR 자를란트 노인키르헨
국적 독일제국 ( 바이에른 왕국)
라트 연방 ( 프로이센 FSRR)
묘지 자를란트 노인키르헨 영웅묘지
재임기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15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1980년 5월 1일 ~ 1988년 4월 30일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7대 의장
1992년 5월 1일 ~ 1994년 5월 29일
서명
링크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빌헬름 호네커
어머니 카롤리네 호네커
배우자 샤를로테 샤누엘 (1946~1947, 사별)
에디트 바우만 (1947~1953, 이혼)
마고 호네커 (1953~1994)
자녀 슬하 2명
학력 베를린 중앙 정치학교 (수료)
종교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사상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
군사 경력
병과 보병 (정치 장교)
복무 붉은 군대 (프로이센 군)
1940년 ~ 1944년[1]
최종 계급 붉은 군대 프로이센 군 중위
참전 제2차 세계대전

개요

라트 연방의 정치가.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제15대 중앙서기국 서기장과 당 의장을 지냈으며, 라트 연방의 7대 최고지도자를 역임하였다. 재임 도중 미국과의 파워게임을 통해 미국과 제국주의 진영을 굴복시키고 사회주의 진영의 승리로 냉전을 끝낸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정책은 데탕트와 장기적 침체 국면에 빠져 있던 라트 연방에 다시 활기를 가져왔다고도 평가받지만, 엄격한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와 보수적 통치로 인하여 부정적인 평가 역시 병존하고 있다.

생애

젊은 사회민주주의자

1912년 8월 25일 독일제국 자를란트 주 노인키르헨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 1881–1969)와 카롤리네 카타리나 바이덴호프(Caroline Catharina Weidenhof, 1883–1963) 부부의 4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6남매 중 첫째인 카타리나(Katharina, 1906–1925), 둘째인 빌헬름(Wilhelm, 1907–1944), 막내인 카를로베르트(Karl-Robert, 1923–1947)는 다들 요절했고 셋째인 프리다(Frieda, 1909–1974)와 다섯째 게르트루트(Gertrud, 1917–2010)만이 에리히와 함께 오래 살아남았다.

그는 유년기에 1919년 독일 혁명을 경험했으며,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지지자로 거듭났다. 또 그가 어린 시절 프랑스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 미이행을 이유로 루르 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해 광부인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역시 그의 강경한 마르크스주의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0살 생일 직후 스파르타쿠스 연맹 비벨스키르헨(Wiebelskirchen) 지구 소년단에 들어갔다. 1926년, 14살의 나이로 사회민주당의 청년 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Jusos)에 입단했고 2년 후인 1929년에는 정식 사회민주당이 되었다.

청년 조직에서 활동

1930년대부터 사회민주당에서 촉망받는 젊은 정치가로 주목받았던 호네커는 당 내에서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좌파로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때 참전하여 정치장교로 동부전선에서 싸웠는데, 우크라이나 서부 공세 도중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그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2년간 시베리아의 강제 형무소에서 러시아의 잔혹한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렸지만, 그것은 호네커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꺾이지 않는 신념과 의지로 감옥에서 동료 독일인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호네커는 라트 연방 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1944년 라트 연방군이 호네커가 수감된 형무소를 해방시켰을 때 그는 이미 라트 연방에서 가장 유명한 청년 사회민주주의자 중 한명이 되어있었다.

종전 후, 그는 베를린 중앙당에서 사회민주당의 당무를 맡았으며, 사회민주당 청년 조직의 수장을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약 10년간 지내며 차기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보수적인 파벌에 속해있었고, 당내 개혁주의의 반대파로 명성을 얻었다.

1968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관료 투쟁 당시, 호네커는 괴벨스의 편을 들어 시위를 비판하고 개혁주의를 배격해야한다는 입장을 냈지만, 이는 청년당원 사이에서 심하게 인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중년 당원이 되어있던 호네커는 보수파의 대표격인 인사로 찍혀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정권과 헤르베르트 프람의 정권에서 중책을 맡지 못했고, 연방 건설부 장관 등의 한직을 전전해야했다.

정권을 잡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정권을 잡은 헤르베르트 프람의 정권은 라트 연방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좌파적인 개혁을 여럿 내놓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정권의 지지도는 점차 하락했다. 더구나 프람의 개인 비서관 중 한명이 MI5의 요원이라는 사실이 발각된 권터 기욤 사건이 터지면서, 프람은 내부적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었다. 결국 1980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24차 대회에서 프람은 서기장 3선을 포기했다. 호네커는 보수파의 거두로서 자연스럽게 차기 서기장 주자로 주목받았으며 내부 표결에서 잡음 없이 개혁파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좌파의 울리케 마인호프를 누르고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최고 지도자로서 정책

내부 정책

제국주의와 맞서다

서기장 퇴임 이후

1988년, 건강상 악화의 이유로 서기장 3선을 포기하고 평당원으로 물러났다. 후임자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보이트케 야루첼스키로 지명되었다. 그의 퇴임 이후 1년만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3년 후에는 영국 해체까지 일어나면서 호네커의 강경한 반미 노선이 옳았음이 다시 한번 입증되기도 했다.

그는 퇴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고향 노인키르헨에서 보냈으며, 가끔 당의 원로로서 목소리를 내는 일 외에는 뚜렷한 공개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1992년 제27차 대회에서 헤르베르트 프람이 당 의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상징적 국가원수 직위인 당 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당 의장으로서 한 일은 거의 없었으며, 노인키르헨의 개인 목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국가위원장으로서의 실무도 사실상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서기장에게 모두 맡겼다. 말년에는 칠레와 독일을 오가며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81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숙적 헤르베르트 프람이 사망한 지 2년 만이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소속 정당

여담

  1. 복무 기간 중 절반 이상을 포로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