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선정 라트 연방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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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개국 100주년을 맞아 지상파 방송사 ARR이 전체 언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라트 연방의 인물’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라트 연방 인구 3억 5,000만 명 중 2억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1919년 이전에 활동한 인물의 경우 후보에서 배제되었다.
상위 10인
1위 2위 3위 4위 5위
로자 룩셈부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게오르크 루카치 발터 벤야민 안드레이 사하로프
6위 7위 8위 9위 10위
카렐 코지크 아돌프 히틀러 헤르베르트 프람 에르빈 롬멜 클라라 체트킨
11위 ~ 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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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위대한 독일인 (ZDF)
빈 예술작가동맹 초대 회장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출생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린츠
사망 1938년 5월 1일 (향년 48세)
오스트리아 FSRR 클라겐푸르트 인근 야산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시스라이타니아)
라트 연방 ( 오스트리아 FSRR)
부모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
학력 빈 예술대학교 (수료)
종교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사상 마르크스주의

개요

라트 연방의 화가, 예술가, 인권운동가, 환경운동가, 정치가. 빈 예술작가동맹의 회장을 지냈으며, 추상주의, 모더니즘 사조를 옹호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주창하다 대테러 기간 당시 숙청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예술가 히틀러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알로이스 히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그의 직업으로 인하여 히틀러는 어린 시절 궁핍하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알로이스 히틀러는 심각한 게르만 우월주의자에 막장부모로 어린 아돌프를 마구 학대했는데, 이로 인하여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로이스의 사상이었던 게르만 민족주의에 반항해 다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운명이 나로 하여금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헝가리에서 태어나게 한 것은 절묘했다. 이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신념을 보여주는 세계사의 의지이다."라고 썼다.

아돌프 히틀러는 학창 시절 좋지 못한 성적을 보였지만, 역사와 미술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그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고전 화풍의 작풍을 거부하고 당대 유행하고 있던 인상주의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미술로 진로를 정하게 하였다. 그는 빈 내에서도 뚜렷한 재능을 보인 것으로 이미 유명했으며 당연히 빈 제국 미술대학교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미술대학교에서 끊임 없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신념을 보이며 권위적이고 근왕적이었던 학교 측과 충돌을 빚었고, 그의 취향이었던 모더니즘은 학교 측에서 권장하지 않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학교 생활을 정상적으로 마칠 수 없었으며, 사실상 쫓겨나듯 학교를 중퇴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히틀러가 더더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수주의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대해 혐오하게 만들었다.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활동했고, 음악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화가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등 시대를 앞서간 여러 모더니즘 성향 문예인과 깊이 있는 교류를 나누고자 하였다.

혁명에 참여하다

20대의 히틀러

그가 25세가 되었던 1914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협상국에 선전포고하며 1차 대전이 발발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일지에 이를 "무의미한 독점자본의 패싸움"이라 부르며, 참전 반대를 위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총파업을 열렬하게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하여 독일 당국에 체포되었으며, 1916년 강제로 서부전선에 투입되어 영국, 프랑스군과 싸워야했다. 솜전투, 파스샹달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투입된 히틀러는 겨자가스 중독으로 죽을 위기까지 넘겼는데, 이는 그가 1918년 제대했을 때 극렬 반전주의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1919년,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1월 혁명이 일어났다. 아돌프 히틀러는 동료 예술인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며, 이번에는 바이에른군 소속으로 자원입대해 흑적내전의 군인으로서 흑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 히틀러가 속한 부대를 이끈 정치장교가 바로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이를 계기로 히틀러는 슈트라서와 친밀감을 쌓기 시작했다.

빈의 사회주의 예술가

흑적내전 이후, 그는 빈으로 돌아와 당에서 조직하던 직능기구 사업에 동참해 빈 예술작가동맹이라는 예술인 단체 겸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예술"을 표방하며 미래주의와 추상주의,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열렬하게 옹호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삶을 위하지 않는 고전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으나, 동시에 대중과 유리된 엘리트 현대 미술도 반대하였다. 1923년, 빈에서의 예술 조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공식적인 당원으로 인정되었다.

히틀러는 급진적 예술 사조와 그레고어 슈트라서와의 친분으로 빈 내 정치계에서도 영향을 행사했으나, 이로 인해 공격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오스트리아의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들은 그의 예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일부 보수파 예술인들은 그의 예술이 너무 "부르주아적"이며 "엘리트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는 칸딘스키와 클레 등이 받은 비판도 일치했다. 또한 히틀러는 극렬한 반전주의자였는데, 이는 여전히 군의 영향력이 컸던 전후 라트 연방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복합적인 원인으로 히틀러는 1925년 자아비판을 요구받았으나, 그는 이를 비판하고 왜 자신의 사상이 옳은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여놓았다. 분노한오스트리아의 고참 사민당원들은 그를 7일동안 감옥에 투옥시켰는데, 이것은 당대 대중들에게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히틀러의 명성을 높이는 효과만 가져왔다.

우리의 투쟁

히틀러는 감옥에 갇힌 것을 계기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책 <우리의 투쟁>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만이 독일 민족이 나아가야할 일이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오래된 사상이 아직도 독일 영토를 떠돌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반우파 문화혁명을 전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산업화 이후 파괴된 환경에 대한 복구, 반유대주의의 비과학성 비판, 인종평등과 민족해방 사상 등 선진적 사상을 주장하여 독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단숨에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2년의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슈트라서의 파벌에 속하게 된 히틀러는 슈트라서 파벌 내에서도 독보적인 "연설가"의 지위에 섰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PR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정치 연설에서도 이는 동일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해방에 대한 끝 없는 확신과 만민평등 사상으로 무장하여 가열찬 연설을 이어나갔고, 1934년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정권을 잡는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숙청과 사망

하지만 슈트라서가 집권한 후 슈트라서가 점차 독일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하자, 히틀러는 슈트라서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반드시 2번째 세계 대전은 막아야한다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반유대주의자였던 슈트라서와 달리, 히틀러는 유대인에 동정적이었고 슈트라서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라트 연방 정부에 의해 우파로 간주되었던 테오도르 헤르츨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슈트라서의 집권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히틀러의 변절은 슈트라서에게 큰 위협이었다. 슈트라서는 그가 추후 당대회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통해 자신을 몰아내고 서기장 직위를 꾀찰 수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결국 대테러라는 거대한 숙청의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38년 4월 27일, 그는 비밀경찰에 의해 급작스레 체포되었다. 히틀러는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듯 순순히 경찰의 지시에 응했고,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5월 1일 프랑스와의 내통, 반당적 행보, 우파 편향, 부르주아 예술 옹호 등의 혐의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다음날 처형당했다. 향년 48세.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의 유언은 "자유여 영원하리"였다.

사후 평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히틀러를 "비열한 기회주의자, 제국주의의 왼쪽 날개, 파시즘의 진보적 벗, 범무정부 시온주의자"라고 가혹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지에 "슈트라서의 비판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었다"라고 은밀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오랫도록 변하지 않았으며, 1940년대 시온주의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라트 연방 당국도 히틀러에 대한 복권을 주저하였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

그러나 1968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히틀러의 평화주의, 반전주의, 영구혁명론, 문화혁명론, 반-반유대주의 등의 입장이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은 그를 슈트라서와 괴벨스의 독재정권에 대항한 위대한 평화운동가라고 여겼다. 이들의 지도자였던 헤르베르트 프람은 히틀러의 사형 후 30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적 석상에서 히틀러를 칭찬했다. 프람은 이 자리에서 "히틀러는 반동적인 문화에 대한 영원한 혁명과, 다원적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계시하였다."라고 평가하며, 자신의 사상인 프람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활용했다.

1972년, 프람이 최고지도자로 집권하자, 프람은 가장 먼저 아돌프 히틀러를 복권시켰다. 프람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대대적인 조사 결과, 사형의 사유였던 프랑스와의 내통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프람은 그에게 명예 훈장을 추서했으며, 유대인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그를 위해 유대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도시인 바르샤바, 페테르부르크, 프라하 등지에 히틀러의 두상을 설치해 그를 기리도록 했다. 그는 바르샤바의 히틀러 두상 앞에서 무릎 꿇고 대테러 기간 이루어진 숙청과 유대인 억압 정책을 사죄했는데, 이를 바르샤바의 무릎꿇기(Kniefall von Warshau)라고 부른다.

프람이 퇴임한 이후로도,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별다른 수정 없이 유지되고 있다. 보수파 서기장의 대명사였던 에리히 호네커도 히틀러에 대한 우상화에 대해서 철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의 후임자인 보이트케 야루첼스키는 "인권과 자유를 위한 라트 연방의 양심"이라 그를 칭찬하였다. 2019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ZDF가 실시한 조사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인이 4번째로 존경하는 인물로 드러났다. 이는 예술인으로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어록

Das Leben verzeiht wahre Schwäche. Was das Leben nicht verzeiht, ist falsche Stärke.
인생은 진실된 나약함을 용서한다. 인생이 용서하지 않는 것은 거짓된 강인함이다.
우리의 투쟁》 中.
국가의 권위는 절대 스스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폭정이라도 스스로를 불가침화하고 신성화한다. 만약 국가의 권력 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이끈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우리의 투쟁》 中.
어떤 세계관을 폭력으로 타도하고자 하는 온갖 시도는, 그 투쟁이 어떠한 고매한 민주주의나 다원주의적 입장을 갖지 않으면 실패하고야 만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모든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타도는 항상 실패했다. 영구혁명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세계관의 발판은 정치의 기본 조건이다.
우리의 투쟁》 中.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인종적 다양함은 나에게 있어 축복과 같았다. 체코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그루지아인,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의 혼합은 보기 몹시 좋았다. 그들은 모두 노동자들이었고, 인민들이었다. 내게는 이 거대한 도시가 마치 계급투쟁을 위한 거대한 성전을 위한 예비적 장소인 것처럼 여겨졌다. 내가 이 도시에 오래 살수록, 다원주의와 다인종주의를 위한 투쟁에 대한 나의 신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투쟁》 中.
세월이 흐르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변해갔다. 빈에서는 극우파에 의해 매우 광범위한 운동인 반유대주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우파의 시대착오성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사회주의의 동료이다. 누군가는 유대주의적 유대인이 사회주의의 적이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민족해방을 위한 그들의 열망은 노동자들이 가진 그것과 같았다.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유대인들의 정당한 분노를 계급투쟁의 원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을 이끌어주어야한다.
우리의 투쟁》 中.
반유대주의는 비과학적이다. 예수를 유대인들이 죽였다는 기독교도들의 주장은 예수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하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위대한 것들을 발명했으며, 카를 마르크스도, 로자 룩셈부르크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사회주의의 적이며 유대인은 사회주의의 친구이다.
우리의 투쟁》 中.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독일 사회민주당 1913 - 1922 입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1922 - 1938 창당
정계 입문
무소속 1938 제명
사망

저서

제목 연도
우리의 투쟁
Unser Kampf
1925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Der Tod von jemandem, den niemand hasst
1968
(사후 출간)[1]

여담

  • 환경 파괴의 위험성을 일찍이 간파한 인물로, 산업혁명 이후 파괴된 독일의 자연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규제법을 제정해야한다고 소리높였다. 이는 후대에 그가 최초의 환경운동가 중 하나로 재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 그는 애견인이기도 했으며, 독일 최초의 동물보호법이 제정되는데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받는다.
  • 채식주의자였다. 그는 육식을 자연에 대한 인류의 폭력이라 간주했다.

  1. 그의 미출간 원고와 일기를 엮어서 출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