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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광역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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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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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청 | 중구 장수왕대로 30 (중성동) | |||
서경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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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구 천공로 19 (청암동) | ||||
하위 행정구역 | 18구 1군 | ||||
면적 | 1,016.9㎢[1] | ||||
인구 | 5,673,312명[2] | ||||
인구밀도 | 5,579.03명/㎢ | ||||
시장 | 무소속 | 황춘자 (초선) | |||
부시장 | 행정 | 무소속 | 김틀니 (25대) | ||
민생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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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틀니 (초대) | ||||
시의회 | [ 펼치기 · 접기 ] | ||||
교육감 | 진보 | 황선자 (3선) | |||
의회원 의원 | [ 펼치기 · 접기 ] | ||||
구청장·군수 | [ 펼치기 · 접기 ] | ||||
상징 | 시화 | 목련 | |||
시목 | 버드나무 | ||||
시조 | 삼족오 | ||||
시가 | 평양찬가# | ||||
지역번호 | 071 | ||||
IATA 도시 코드 | PNG | ||||
ISO 3166-2 | KR-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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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평양광역시의 경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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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답은 오직 Population Yuj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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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ful Mighty Splendid PYEONGYANG
역시 JMS 평양광역시 |
대한제국의 광역시. 5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국내 최대 광역시로, 서쪽으로 남포광역시, 북쪽으로 평안남도, 동쪽과 남쪽으로 황해북도와 접하고 있다.
상징
평양광역시의 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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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과 아미산이 치솟은 형태를 통해 진취적 기상을, 산을 둘러싸는 건축물들을 형상화한 모습을 통해 평양의 미래 지향적 발전을 나타내 세계 지향적 개방성과 시민 번영을 추구하는 활기 가득한 도시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
평양광역시의 브랜드 슬로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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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춘자 시정에서 새로 제정된 브랜드 슬로건이다. 사전 시민 투표, 그리고 시민과 전문가 합산 투표를 통해 만들어진 브랜드이다.[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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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광역시의 마스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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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광역시의 마스코트인 엠비 'Ambitious'에서 'MB'를 따온 것으로, 야망 있는 평양, 발전하는 도시를 향한 마음을 캐릭터화한 것이다. |
역사
고조선 ~ 한사군
왕검성이 현재의 평양 지방에 있었다는 견해에 따르면, 평양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추정된다. 최소 기원전 194년 이전부터 단군조선의 수도로서 자리잡기 시작했고, 최소 86년 이상 최대 200년 미만의 기간동안 고조선의 수도로서 기능했다는 것이다. 이후 위만조선과 한의 갈등 끝에 왕검성 전투로 위만조선이 멸망하면서 평양에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을 설치하였다.[10]
낙랑군은 서진의 몰락으로 중국 본토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보낸 고구려군의 공격에 무너져 내리고 그대로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하긴 했어도 낙랑 유민이 많았기에 땅을 차지한 고구려도 낙랑 사람들의 문화를 강제로 버리게 하지 않고 천천히 유화적으로 대해서 동화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2~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낙랑 점령 이후 건설한 평양성을 당시 수도인 국내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고, 평양성은 고구려의 제2의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남쪽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은 첩첩산중의 좁은 땅에 있었고[11] 교통이 좋은 곳이라 보기도 어려워서, 영토가 넓어진 고구려에 적합한 수도는 아니었다. 이에 결국 제19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사찰 9개를 짓고, 대대적인 사민정책을 추진한 데 이어 제20대 장수왕대에 국내성과 환도성에서 평양의 안학궁과 대성산성으로 천도했다.
평양성은 장수왕 대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214년간 고구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도로 기능했다. 큰 대동강과 넓게 펼쳐진 평야가 있고, 대륙 문물을 접하기 쉬운 지리적 특성 덕에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전부터 개발된 지역들 가운데 하나로 요동 지역을 포함해서 본다고 해도 요하 언저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조선의 첫 수도와 더불어 한국 역사상 거의 최초의 도시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평양성은 인구를 부양할 평야지대와 교통로를 제공할 내륙수로가 있었을뿐만 아니라 북풍을 막아줄 북쪽 산지가 있는 등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유목민족이나 한족 화북왕조들의 위협을 받는 북부와 서부 지방에 비해 안전했으며, 인구밀도가 높아 밀도 높은 종심방어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요하 일대의 1차 방어선인 요동 방어선-압록강 방어선[12]-청천강 방어선으로 이어지는 하천을 끼고 만들어진 3중 방어선의 후방에 있는데다 대동강 연안까지 끼고 있어 수도 방어선 구축이 용이했다.
뒷날 평원왕 때 장수왕이 천도한 안학궁에서 동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 평양성으로 알려진 장안성(長安城)이다. 이 평양성 자리는 고려, 조선을 거쳐서 현재에도 평양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평양성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이전의 도성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집들과 궁전이 성(城) 안에 함께 존재하는 한국식 도성의 시초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성의 도시 설계는 당시 신라와 일본의 도시 설계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역사스페셜 北문화유산 8부작 중 1부 고구려 평양성 편에 따르면, 도로가 잘 정비된 계획도시였으며 고구려 때 운하가 있었고 이것은 조선 때까지도 존재했다. 이 당시 도로들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평양에서도 도로로 쓰이고 있다. 또한 의외로 많은 양의 낙타가 있었으며, 온달 설화를 보면 당시치고는 상업 수준이 꽤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큼 고구려의 유적들이 꽤 많다. 안학궁과 대성산성, 고구려 목교, 평양성(부속 건묵물들로는 대동문, 보통문, 부벽루, 연광정, 을밀대, 칠성문), 고구려 시대 무덤들 등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에 맞춰서 오랜 역사의 도시답게 많은 설화들도 함께 내려오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묶어서 발간한 책도 있다. 물론 고구려의 유적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조선, 낙랑과 그 이후의 고려, 조선 때의 유적들도 많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남북국시대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많은 주민들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전쟁으로 인한 인구 이탈이 꽤 심각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3]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 않지만, 일단 고구려 시절처럼 대도시로서의 모습은 거의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와 발해 두 나라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정확히 어느 나라가 차지했는지 명확하게 밝히는 기록은 현재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두 세력 모두 평양이 포함된 인근 지역을 접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일단 발해의 경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점유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를 그릴 때는 대강 대동강쯤을 신라와의 경계선으로 해서 대동강 이북 평양성 지역을 발해 영역으로 색칠하는 경향이 있는데, 1차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냥 다른 데다가 선 긋는 것도 고고학적 근거가 없으니 적당히 긋는 거라고 봐야 할 듯.
통일신라의 경우 대략 황해도 지역+평안남도 남부 지역을 관할하던 통일신라 후기 한정 특수 행정구역인 패강진(浿江鎭)이 평양까지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신라는 남북국시대 내내 같은 경계선을 유지했던 게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임진강부터 시작해 조금씩 북진하는 모습을 보였고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통일신라 초중기 어느 시점의 행정구역 체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의 원사료가 기록되었던 시점엔 최소한 평양 근처 남쪽 중화군까지는 영역화했지만 딱 평양 그 땅까지 찍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패강진이 평양을 포함한다는 설에 의하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기에는 직접통치영역이 대동강을 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시기의 평양은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나라가 차지했건간에 몰락한 옛 도읍 터인 유적도시이자 잘해봐야 최전방 군사 기지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평양이 존재 자체가 잊혀진 상태는 아니어서 736년에는 평양주의 지세를 살펴본 기록이나, 769년의 강원도에서 발생한 8,000여 마리의 쥐떼가 평양으로 향했단 기록 등 언급은 계속 된다.[14]
삼국사기와 달리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평양이 '신라에 편입됐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 후삼국시대 시점엔 이미 주인 없이 황폐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한국사 교과서나 서적 등을 보면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을 포함한 평안도 일대가 발해 영토로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평안도 일대의 경우 발해가 이들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기가 힘든 부분이 많다. 발해 유적, 유물이 하나도 발굴되지 않은 점도 그렇고 사서에도 발해가 평안도 지역으로 뻗었다는 근거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요동이나 서경압록부와 인접한 평북은 발해 영향권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패강진 인근의 평남은 신라의 영향권이였을 가능성이 현재로서 더 높다. 그나마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가 평양을 점령했다고 하긴 했지만 시기적으로도 남북국시대 당대에 가깝고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친발해적인 발해고에 비해 비교적 중립적인 고려사의 기록이 조금 더 신뢰성이 높다. 그외에도 상술했듯 아방강역고에서는 평양이 신라 영토였다고 밝혔으며 이 세 사서 이외의 기록은 없다. 선왕 이후에는 신라측 기록에서 말갈 소국들(보로국 등)이 발해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신라와의 통교를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어 9세기 중후반에는 남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 대한 발해의 통제력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견해가 상당하다. 따라서 흔히 도는 남북국시대 지도만 보고 평안도 일대가 발해의 확고한 영역이었다고는 여기지 않는 편이 좋다. 오히려 그보단 신라 측에서 후삼국시대 직전 9세기 말에는 평양 일대까지 느슨하게나마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견해가 상당한 편이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신라가 평양을 접수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인 남단덕(南單德)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는데 그는 699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776년 장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조부인 남적(南狄)은 안동도호부의 마미주(磨米州)도독을 역임했다고 한다. 남단덕의 아버지인 남우(南于), 장남인 남진공(南珍貢) 또한 당나라의 관작을 역임하였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한 뒤로도 발해의 흥기 전까지 한동안은 평양 일대를 영향권 내에 넣고 있었단 사실을 시사한다고 여겨진다.
후삼국시대
대동강의 서쪽인 패서 13주가 궁예에게 투항하자 평양성주 검용(黔用)이라는 자가 같이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검용이 신라에 복속하던 변방의 호족인지, 발해에 복속하던 변방의 호족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원래부터 독립적이던(심하게는 말갈계) 호족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기 어렵다. 일단 기록에 나오는 '패서'의 범위를 감안할 때 9세기 말 쯤에는 평양성 또한 신라가 느슨하게나마 접수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검용은 발해보다는 신라와 관련있는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물론 어차피 9세기 말 쯤에 가선 신라나 발해나 끝물인 건 비슷했으므로 정황상 어느 쪽이든 성격 자체는 가까이 위치한 패서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신라나 발해의 중앙정부의 영향력에서 한참 벗어나 따로 놀던 한국계 토착세력으로 보인다. 따라서 굳이 관련이 있다면 신라쪽과 교류가 많았을 가능성이 컸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궁예 열전에 의하면 901년 기준으로 평양성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일단 남북국시대에 평양지역이 신라 땅이든 발해 땅이든 호족 검용 개인의 영지 같은 곳이었든 간에 그다지 잘 관리되던 상태는 전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로 주목 받지 못 하는 부분인데 남북국~후삼국시대는 고조선 이래로 역사의 중심부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던 평양이 유일하게 역사의 변두리 신세로 전락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고려
고려 건국 이후 고려 태조는 황폐화되었던 평양을 재건하고 평양대도호부, 이어 서경으로 개칭했다. 건국 초기 군사적 목적으로 재건되었던 서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호족세력의 견제와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재건되었다. 이에 따라 천수 5년(922) 서경에 '낭관'이라는 독립적인 행정기구와 관제를 갖는, 개경과 행정 및 정치적으로 분리된 조직을 설치하여 서경에 힘을 싣게 된다. 이와 같은 서경에 대한 독립적인 기구와 관제를 설치한 것은 고려 분사제도의 시초로 파악된다. 천수 15년(932)에는 신료들과 평양 천도에 관해 논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고려 정종의 서경 천도도 불발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경의 지위가 개경과 비슷했던 것 역시 아니고 개경에 대한 열위 관계 역시 엄연히 존재했다.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한 것도 그렇고 고려왕릉 역시 단 1기도 평양에 있지 않고 모조리 개성/강화 일대에 있다. 명시적으로 왕이 기거하는 기간도 개경이 9달, 서경은 고작 3달이기도 했고 그마저도 인종대 이전부터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다. 고려사에서도 개경의 언급이 서경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아무튼 고려시대 서경의 위상을 정리하자면 본수도 개경에는 확실히 밀리지만 지방 3경인 동경과 남경보다는 확실히 앞서는 명실상부한 제 2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예종 때 이루어진 서경의 전성기는 인종 13년(1135)에 발생한 서경 천도의 실패로 일어난 묘청의 난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묘청의 난을 제압한 즉시 서경의 치안과 기초적인 행정업무에 필요한 기구 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구들을 전부 폐지한다. 서경 행정기구의 대대적인 폐지 이후 중앙 개경 세력은 자신들과 행정, 정치적으로 분리된 세력의 존재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다만, 그 독립성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하고, 박탈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여 '서경은 근본이 되는 땅이고, 태조께서 일찍이 그 제도를 정한 바 있으니 예전대로 하자'는 쪽과 '서경은 반역의 땅이니 모든 제도를 강등해 동경과 같게 하자'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
이 논의는 약 2년 동안 논의되어 인종 16년(1138)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 방향으로 서경의 관제를 개편하게 된다. 이로써 서경이 지니고 있던 독립적인 지위는 사라지게 된다. 이 때 개편된 관제는 수도와 동등한 형태와 지위를 가졌던 분사제도에서 완전히 중앙에 예속되어 중앙의 인사권, 행정권 등에 대한 간섭을 받는 토관제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형태를 보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해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차이가 벌어진 것이지 서경이 남경, 동경과 동급이 된 것은 아니다. 동경은 단 한 번도 서경의 위상을 따라잡은 적이 없다. 남경 역시 고려 극후반부인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야 서경을 제치는데 원간섭기가 끝나고 공민왕 이후의 마지막 20~30여 년 정도는 남경이 서경보다 확실히 위상이 우위였다.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에 벗어난 직후인 1356년 남경을 다시 부수도로 삼기 시작했으며 우왕과 공양왕 시기에는 아예 5개월씩 수도를 남경으로 일시 천도까지 했다.
개편은 명종대에도 이어졌다. 이는 무신정변(1234)에 반발한 서경인들이 일으킨 난인 조위총의 난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개편은 이전의 분사제와 토관제를 절충한 개편과 달리 완전히 중앙에 예속시키는 토관제로의 완전한 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
서경이라는 형식만 유지한 채 토관제로 유지되던 서경은 홍복원, 필현보의 난,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영 기관(西北面兵馬使營 記官) 최탄(崔坦), 한신, 삼화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의 난으로 서경유수가 죽고, 난의 주동세력들은 서경 부근의 땅을 몽골 제국에 바쳤다. 이후 서경은 몽골이 동녕총관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게 된다.
이후 1290년(충렬왕 16) 동녕총관부를 몽골에게서 돌려받아, 서경의 행정체제를 격상하여 서경유수관을 설치하였으나 이미 서경은 크게 쇠퇴하고 난 후였다. 공민왕 대에는 막대한 쇠퇴의 영향으로 경(京)이라는 행정적 지위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공민왕 18년(1369) 만호부, 이후 평양부로 개편하게 된다.
조선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평양부로서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북부 지방의 최대 거점도시 역할을 했다. 역시 조선시대에도 수도(한양)에 이은 제 2의 도시 지위를 유지했으며, 수도와의 지역감정도 이어갔다. 지역 명문가가 각종 전란으로 뿌리뽑혀 사실상 과거 합격에도 승진이 어렵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많은 이유가 가장 컸으며, 그래서 조준 같은 명문가는 예외가 되었다. 지방 출신 자체가 승진이 어려웠던 이유는 과거 제도 문서 참조. 서북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말이 종종 나와도 명문가의 승진이 유리한 구조를 바꾸지 못해 결과적으로 암묵적인 차별의 양상이 일어난다.
다만 같은 2위 도시라도 고려조와 조선조의 평양의 입지는 분명 판이하게 다르다. 고려는 평양을 서경이라 칭하며 제 2의 수도로서 대우해주었고 개경과 더불어 분사까지 설치했기에 개성을 견제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시대 평양인들의 인식은 서경별곡에 잘 드러난다. 하지만 조선은 평양을 제 2의 도시로는 취급해도 제 2의 수도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삼경제와 같은 부수도 따위를 운영하지 않았고 오로지 한양에만 몰빵한 나라였다. 굳이 따지자면 제 2 수도 취급을 해주는 도시가 있다 쳐도 조선초에는 전조의 수도 개성 정도였고 정조시기에는 수원이었다. 따라서 같은 2위 도시라도 평양의 입지는 고려보다 조선대에서 더 약화한 것. 그리고 인구 2위인 것이 무색하게도, 위상은 위에 상술했듯 원간섭기 이후 고려 말기에는 개경>남경>서경이었으니 3위 도시였고 조선 초기, 즉 15세기까지는 한양>개성>평양으로 개성의 위상이 더 높았다. 심지어 조선 성종대까지도 개성을 제 2의 수도라 여긴 듯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인구 측면은 몰라도 위상 측면에서는 풍패지향, 즉 왕실의 본관인 전주가 평양보다 더 대접받았고 정조 시기엔 수원이 평양보다 더 위상이 높았다. 물론 인구는 기록과 통계상 평양부가 훨씬 많았다는 측면이 있다.
당시 평양부 사람들은 신분 차가 크지 않아 상업을 천시하는 인식이 약했으므로 상업에 열중했다. 그래서 당대 평양은 개성과 함께 조선에서 손 꼽히는 상업도시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상업 발달을 토대로 과거 시험에도 많이 응시하여 조선 왕조에서 143명으로 6번째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인사는 한양 위주 특정 가문끼리 승진시켜주는 풍토 속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명문가가 거의 없었기에 조선 중기 이후로 관직 진출에 암묵적인 제한이 있었으며 이 차별이 극대화돼서인지 결국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홍경래의 난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라 간접적 연관은 있어도 직접 평양부를 홍경래의 군대가 점령하진 못했다.
1588년, 평양부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하자 평양의 강등 및 평안도의 이름 변경을 가지고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다른 도시들의 경우처럼 강등시켜야 하지만[15] 평양이 워낙 크다보니 이전 사례를 찾아와 상고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조가 내놓은 첫 대답은 '평양은 중국에도 유명한 만큼, 중국에서 사신들이 와서 보면 창피하니 놔두자'라는 답이었다. 그러자 선조는 이전 사례를 열거해서 다시 답을 해오라고 명을 했고, 이조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의 사례를 들어 평양부는 강등하기엔 너무 큰 도시라는 견해를 내놓아 바뀌지 않았다.
평양부에 주재하며 평안도를 관할하는 평안감사는 조선시대 3대 지방관으로 나주목사, 과천현감과 더불어 가장 선망하는 부임지였으며 특히 평안감사는 기백(箕伯)으로까지 불렸다. 이는 기자의 영지를 다스린다는 뜻. 기자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고 이 곳에 기자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도 이 평안 감사의 위세에서 기인한다. 다만 이를 '평양 감사'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관찰사들이 그랬듯, 평안 감사가 평양에 주재하고 평양부를 관리하는 평양 부윤 직책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초기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중국의 역대 천자국들이 부수도를 두었던 것을 따라해서 평양을 제 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박규수 당시 국무총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평양대학을 비롯한 유수의 연구기관들이 설립되며 '학문의 메카'로 성장했으며, 조국증권 등이 평양에 자리를 잡으며 명실상부한 금융의 메카로 성장하였다.
과거 개신교 세가 가장 센 지역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는데, 실제로 초기 한국어 성경 중에는 서북 방언으로 번역된 것도 있을 정도다. 당대 평안도 주민들은 조정과 내각의 차별 때문에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평양은 당대에 국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36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에 따르면, 비신자들도 일요일을 습관적으로 주일이라고 부르고, 일요일에는 새벽부터 교회에서 치는 종 소리 때문에 늦잠 자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평양부청은 평양역 바로 앞에 있었으며, 현재도 평양광역시청 청사로 쓰이고 있다.
현대
양차대전 이후 평양부가 평양시로 개칭되고, 1963년 평안남도 평양시가 평양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동군 남형제산면(현 서포구), 용산면(현 만경대구), 김제면(현 대동구), 서천면(현 용성구), 부산면(현 용성구 남부 및 용악구 북부), 용악면(현 용악구), 임원면(현 서경구), 시족면(현 도광구), 고평면(현 만경대구 남부, 평천구 서부) 등 현재 평양시의 대동강 이북 지역이 모조리 편입되는 대확장이 이루어지며 대동강 이북 지역의 '평양직할시 대동군'과 이남 지역의 '평안남도 대동군'이 공존하게 되었다.
1973년에는 평안남도 대동군과 중화군이 평양시에 편입되었으며, 기존의 평양직할시 대동군은 만경대구, 대동구, 서포구, 용성구(현재의 용성구, 용악구, 도광구)로 분구, 평안남도 대동군에서는 남관면이 낙랑구로, 용연면, 율리면, 청룡면이 사동구로 분리되었다.
1978년에는 사동구가 사동구(현재의 사동구, 미림구)와 역포구로 분리되었으며, 1980년에는 용성구가 용성구와 용악구(현재의 용악구, 도광구)로 분구되었고, 1983년에는 사동구가 사동구와 미림구로 분구되었다. 뒤이어 1988년에 용악구에서 도광구가 분리되고, 1995년에는 평안남도 중화군이 평양시에 편입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 시절 평양 도심지의 인구가 유출되며 교외 지역을 제외한 평양 지역은 20년간 인구 증가 없이 정체기가 이어졌으나, 교외 지역에서는 금융 산업의 발달 등 호재가 이어지며 인구가 급증하였다. 특히 북부 서포, 서경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하며 대동강 이북 지역의 인구와 생활 수준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지리
자연지리
대동강과 그 지류들인 보통강, 무진천 등 여러 하천들에 의해서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서부와 북부 일대에는 오랜 기간 동안 침식작용을 받아서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많이 분포했다. 평양평야는 경작이 가능한 낮은 구릉지들이 많고, 근처에 안주평야와 재령평야가 있으므로 굉장히 넓은 평야를 주변에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냉대 동계건조 기후(Dw)에 속하기 때문에 연교차가 서울보다 조금 큰 편이다. 연 평균 기온은 10.9℃, 1월 평균 기온은 -5.4℃, 8월 평균 기온은 24.9℃로 서울보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조금 시원한 편이다.[16] 대략 서울보다 겨울은 3도, 여름은 1도, 나머지는 2도 평균기온이 2도 정도 낮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남한 철원군 시가지에서 측정되는 기온이 1월 평균 -5.7℃, 8월 평균 23.9℃이다. 물론 중강진이나 함경 지방보다는 당연히 따뜻하다. 같은 위도에 있는 스페인 이비자의 1월 평균 기온은 무려 12℃다. 북위 60도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헬싱키와 겨울철 평균 기온이 비슷하다. 연 평균 기온은 시카고와 비슷한 수준이다.
연 평균 강수량은 936.4mm인데, 한반도의 강수량 특징이 그러하듯이 강수량의 70% 가량이 여름에 집중되어 내린다. 특히 7~8월에만 484mm가 내려 두 달 동안 한 해 강수량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반대로 겨울에는 한국의 서울특별시보다도 강수가 적다. 실제로 12~2월의 평균 강수량은 각각 18, 9.6, 14.5mm로 서울의 60%에 불과할 뿐더러 세 달을 합쳐도 50mm가 채 안 된다.
인문지리
생활권으로 지역을 구분하면 원도심[17][18]의 중구/평천구/동구/서구/남구/북구/유경구, 구 대동권의 대동구/서포구/만경대구, 강북권[19]의 서경구/용성구/용악구/도광구, 강남권의 낙랑구, 사동구, 역포구, 미림구, 마지막으로 교외 지역인 중화군으로 나눌 수 있다.
- 원도심
한강을 남쪽의 방어 시설로 삼고 도시를 강북에 지어서 북한산 일대를 북쪽 방어 시설로 삼았던 서울과 마찬가지로, 평양 또한 대동강을 남쪽의 방어 시설로 삼고 도시를 강북에 지어서 보통강을 북쪽 방어 시설로 삼았기에 대동강 이북의 중구 등지가 원도심으로서 기능했다.
조선 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평양의 중심 역할을 했던 평양성 주변 지역으로, 전통적인 평양의 중심지이자 타 지역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평양스러운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특성 덕에 부산 하면 떠오르는 대부분의 관광지는 대부분 이 지역에 몰려 있으며, 평양광역시의 중앙에 있어 각종 대표하는 것들이 많다. 중구에는 시청과 법원, 검찰청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동구, 서구, 남구, 북구 등지에 많은 대학이 존재한다.
- 구 대동권
구 대동군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지역으로, 만경대구를 중심으로 대동구, 서포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심하게 소외되어오던 대동강 이남의 교외 지역과는 달리, 중구 등 원도심과 밀접해 있어 대동강 이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평양 외곽 지역으로서 큰 수혜를 봐왔다. 대동구는 베드타운 기능을 하지만, 만경대구와 서포구는 나름대로 부촌이 많은 상태다.
- 강북권
금융 산업 발달로 형성된 부촌으로, 서울의 강남과 대응되는 지역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평양의 강북권은 과거부터 평양 원도심의 주변 지역으로서 활발히 기능하던 곳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다양한 증권사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부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각종 대기업들이 서경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성구와 도광구 서부 지역은 그 영향으로 부촌으로 취급 받는다. 그러나 용악구, 도광구 동부와 같이 서경구와의 거리가 조금 있는 지역은 서울의 노도강과 같은 베드타운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 강남권
1960년대 이후 방직공장 등이 들어서고, 공단이 형성되며 허름한 주택가가 형성된 곳이다. 노동운동의 상징과 같은 곳이기도 하였으며, <무진천 엘레지>와 같은 산업화와 노동 현실을 다룬 작품들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평양의 핵심 산업이었던 섬유 산업뿐만 아니라 건설기계공업, 전자기계공업의 중심지로도 활약했다. 생활 수준은 원도심, 만경대 등 주변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공장들이 외곽 지역인 중화, 평안남도, 황해북도 등으로 빠지면서 변화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는 달리 이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어두운 면이 아직도 남아있다.
- 교외 지역
평양광역시 남부의 중화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남권의 도시화로 다양한 공업 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시가지로 가득찬 평양의 중심지에 비해 미개발지역이 많고 개발 잠재성이 무궁무진하다보니 각종 개발계획 등의 떡밥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원도심 재개발과 함께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는 곳 중 하나이다.
교통
경제
관광
교육
문화
정치
평양광역시 제74대 의회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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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광역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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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광역시는 평안남도, 평안북도와 함께 진보 강세를 띠는 지역이다. 신민당 출신의 무소속 황춘자 현 시장이 신민당과 한국공산당의 독자 출마에도 승리를 차지했을 정도로 상당한 진보 성향을 띠는 도시다.
하지만, 과거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을 정도로 개신교·우파 성향이 강한 도시였으며, 이로 인해 개신교 우파 성향의 자유당 인사들이 연고로 삼아 활동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총리가 TK를 자유당의 지지기반으로 삼는 과정에서 평양 홀대론이 대두되며 진보 색채가 강해진 것이다. 다만 여전히 대도시라는 특성과 자유당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제74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평양 내 제1당을, 제1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시의회 1당을 각각 차지하는 등 평양이 호남 수준의 진보 텃밭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치구 별로 따져 보면, 중구, 평천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 등의 원도심 지역에서는 자유당이 강남 3구 급의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서초구, 강남구 급의 부촌인 용성구, 서경구 등에서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기도 한다. 이외 지역에서는 신민당이 여유 있게 당선되곤 한다.
최근 선거 결과
총선
평양광역시 개표 결과 (시·군·구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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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 비례대표 | ||||
정당 | 자유당 | 신민당 | 자유당 | 신민당 | 한국공산당 |
의석수/비례1위 | 14석 | 13석 | 14개 | 5개 | - |
득표율 | 1,697,568 (49.87%) |
1,523,625 (44.76%) |
1,528,390 (44.90%) |
1,434,780 (42.15%) |
310,784 (9.13%) |
중구 | 54.41% | 42.67% | 46.12% | 32.55% | 7.61% |
평천구 | 65.38% | 33.51% | 59.05% | 28.08% | 6.19% |
동구 | 51.92% | 46.50% | 46.86% | 32.97% | 7.13% |
서구 | 54.19% | 40.41% | 45.50% | 32.14% | 6.92% |
남구 | 56.13% | 42.95% | 53.15% | 32.95% | 5.92% |
북구 | 50.63% | 44.13% | 47.16% | 34.80% | 7.19% |
유경구 | 52.03% | 46.29% | 49.85% | 36.15% | 5.23% |
사동구 | 49.63% | 44.41% | 44.21% | 39.95% | 6.69% |
대동구 | 42.98% | 53.19% | 41.36% | 39.10% | 9.53% |
미림구 | 39.75% | 55.26% | 36.58% | 45.86% | 9.58% |
역포구 | 40.74% | 56.77% | 39.65% | 47.14% | 9.96% |
낙랑구 | 29.59% | 67.34% | 27.15% | 58.34% | 9.51% |
만경대구 | 54.10% | 44.88% | 48.10% | 36.85% | 7.95% |
서포구 | 38.27% | 58.90% | 35.18% | 47.18% | 11.58% |
용성구 | 61.12% | 36.92% | 57.08% | 29.65% | 6.72% |
용악구 | 49.85% | 48.83% | 44.12% | 40.15% | 7.85% |
서경구 | 60.76% | 37.15% | 55.21% | 31.18% | 5.98% |
도광구 | 42.18% | 55.13% | 41.10% | 45.18% | 10.51% |
중화군 | 43.25% | 53.47% | 41.82% | 38.33% | 12.49% |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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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구 22석, 비례대표 2석
- ↑ 지역구 2석, 비례대표 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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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틀니(대동), 김틀니(미림), 김틀니(역포), 김틀니(낙랑), 김틀니(만경대), 김틀니(서포), 김틀니(용성), 김틀니(용악), 김틀니(도광)
- ↑ 평양 미래 50년을 이끌어 갈 진취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하였으나, 의미 전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이 많다. 또 슬로건이 정명석의 사이비 종교인 JMS를 연상케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 왕검성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은 동의하고 있는데, 이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유물은 있어도,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 ↑ 국내성이 있던 지안 땅은 신라의 수도가 있던 경주 분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협소한 분지다.
- ↑ 668년 연남생과 사부구 등의 배신으로 요동 방어선이 붕괴된 고구려가 가동한 2차 방어선이 압록책이 설치된 압록강 방어선이었다.
- ↑ 삼국시대 당대에 아마 평양성 출신이었을 안승이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면서 속민들을 끌고가기 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탈한 평양성을 보며 슬퍼한 기록이 남아있다.
- ↑ 그런데 이는 숫자까지 비교적 정확한 데다 이동거리가 매우 긴 것으로 볼 때 도적떼나 흉년으로 인한 난민 등의 비유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 ↑ 조선시대에 반역이나 직계살인 같은 패륜적인 참사가 발생하면 그 고을의 현감은 파직하고 고을을 강등시키곤 했다. 만약 해당 고을이 '도(道)'의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대표 도시라면 아예 도의 이름까지 몇년간 바꿔버리기도 했다. 조선 역사 내내 수시로 이름이 바뀌어져 온 충청도가 대표적.
- ↑ 1973년 이후 관측된 평양 최저기온은 2001년 1월 12,15일 -26.5℃이며, 비공식적으로 1917년 1월, 1920년 1월에 기록한 -28.5℃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 ↑ 과거 평양부의 중심이었던 지역으로, 가장 오래된 평양 권역
- ↑ 평양부의 관할 구역이 아니더라도 인근 지역 또한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어 원도심의 범위에 포함한다.
- ↑ 현재의 신도심이다.
- ↑ 평양광역시청 본청 소재지.
- ↑ 평양광역시청 서경청사 소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