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1968 | SP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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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사회주의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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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온 데이비슨 브론스타인 Leon Davidson Bronstein[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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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년 11월 7일 (43세) | ||||||||||||||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 야놉카 | |||||||||||||||
국적 | 러시아 제국 (1879~1892) 미합중국 (1892~1921) 미주 사회주의 연방 (1921~) | ||||||||||||||
현직 | 미주 사회주의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중앙서기국 국장 미주 사회주의 연방 국방부장관 제3인터내셔널 총회의장 | ||||||||||||||
재임 기간 |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2] | ||||||||||||||
1921년 10월 29일 ~ 현직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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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의 브론스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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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Comrades, the revolution of workers, the importance of which was stressed by the RSPA all the time, has happened! 동지들, 사회주의혁명당이 언제나 그 중요성을 강조해온 노동자의 혁명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미국 혁명 직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의 연설 |
Insurrection is an art, and like all arts has its own laws. 반란은 하나의 예술[5]과도 같다. 그리고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반란에도 고유한 법칙이 있는 법이다. |
미주 사회주의 연방의 혁명가, 정치가, 언론인. 인류 역사상 2번째로[6]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인 미국 혁명을 주도하였으며 혁명으로 세워진 미주 사회주의 연방의 첫번째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의 지도자중에서 처음으로 미국 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며[7], 동시에 최초의 비(非)기독교도 겸 무종교인, 사회주의자 국가원수이다. 정치에 투신하기 전에는 언론가 겸 문필가로서 활동하였으며 그는 정치적인 업적 외에도 브론스타인주의로 대표되는 사상/철학적 업적과 특유의 달변가적인 기질에서 모두 최정상급이라고 평가받았다.
그가 창당한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내에서 그는 공산주의와 연쇄혁명, 중앙집권을 외치는 좌익 계파에 속하였다. 적청내전 정국 당시에는 미국 사회주의혁명당과 적군을 이끄는 국방부장관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으며, 제3인터내셔널의 성립을 주도하였다.
생애
초기 생애
레온 브론스타인은 1879년 레프 다비노비치 브론시테인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매우 부유한 유대계 부르주아였으며 그는 어릴적 어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13세에 러시아의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얻었으며, 그 이전부터 영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어보다 영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그가 자리를 잡은 뉴욕 지역은 아일랜드계를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모인 국제도시였다. 이때부터 브론스타인은 국제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학교 성적은 일취월장하여 학교를 수석 졸업하였으며 독일어, 이디시어, 프랑스어 등에 능통하였다. 브론스타인은 1897년 뉴욕 대학교의 영문학과에 진학, 영어와 영미권의 문학을 전공하였다. 1903년 뉴욕대학교 졸업 이후 부모의 지원으로 운터덴린덴 대학교로 유학을 가 1905년까지 유럽사학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과 전향
사실 브론스타인은 어린 시절까지만해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확고한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철부지 이상주의자로 여겼다. 그러나 독일 유학의 경험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독일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지원을 받은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인 나라였으며, 더구나 브론스타인은 독일어를 읽히며 많은 헤겔과 마르크스, 엥겔스, 카우츠키 등의 저서를 원어로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1904년, 그는 공산당 선언을 읽고 그 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내용을 일기에 썼다.
공산당 선언을 읽은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일대 혁명이었다. 내 마음속 잔잔한 호수는 단두대의 칼날이 몰아치는 매서운 폭포로 바뀌었고 그 위의 조각배는 풍랑으로 변하였다. 내가 그동안 어렴풋이 품고 있던 이상이 마르크스의 책을 통하여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문장으로 돌변하여 내 가슴을 사정 없이 내리 쳤다. 1904년 2월 1일, 브론스타인의 일기 中 |
따라서 그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놀라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브론스타인은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 가열차게 공산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책을 손수 영어로 번역해 미국 사회에 전파했다.
혁명가로서
초기에 그는 미국에서 유행하던 생디칼리슴, 즉 노동조합 운동에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노동조합에 가입되어있던 사람들이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서 혁명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자신의 직장에만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실망해 이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우연히 러시아의 사회주의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접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오직 권위있는 정당이 대중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야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것의 일환으로 브론스타인은 1910년 월간 노동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자들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신랄한 비난와 조리있는 글 솜씨로 인해 그의 글은 이론적 체계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여졌다. 따라서 브론스타인의 인지도는 물론 인기 역시 폭발적으로 상승했고 1912년, 브론스타인은 뉴욕시 제6구의 하원 의원에 출마해 32.6%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반전 운동을 벌이며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전쟁을 멈출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그는 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월간 노동>에서 기성 정치인들을 신랄히 비난한 것 때문에 동료 의원들에게 연달아 소송을 맞았다. 더구나 그가 속해있던 정당인 미국 사회당 내부에서조차 생디칼리스트들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받을 수록 기성 정치권에 지쳐있던 미국의 노동자, 농민들에게서 브론스타인의 입지는 높아져갔다.
동시에 그는 비열한 정치적 술수를 통해 그의 정적들을 권력에서 밀어냈으며, 자신의 높은 인지도와 의원 경력을 통해 사회당의 당권을 사실상 탈취하기에 이른다. 1919년, 협상국의 1차 대전 패배로 인한 경제 공황이 미국을 덮치자, 사회당과 브론스타인의 지지도는 더더욱이 올라갔다.
이 시기 브론스타인이 쓴 유명한 가명으로는 안토니 앤티도트(Antony Antidot), 페너(Penna) 등이 있다.
전성기의 시작, 미국 혁명
혁명의 시작은 1920년 8월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형식상의 눈요기였던 당수 지명 투표를 통해 사회당의 당수로 선출되었고, 이후 당명을 사회당에서 사회주의혁명당으로 바꾸었다. 그는 미국 체제를 폭력 혁명으로 뒤엎자고 주장하였으며 이런 주장은 1919년 미국 공황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노동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유진 데브스, 빌 헤이우드 등 노조 관계자들에게 이익을 약속하며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브론스타인은 이 발언으로 공직에서 추방되지만,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여전히 컸다.
1921년, 대공황이 정점에 이르며 좌파 성향의 IWW와 보수 성향의 미국노동연합이 합동으로 노조 총파업을 결의하였고 브론스타인은 이를 사회주의 혁명의 결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좌파 성향 청년 장교들과 시민들을 상대로 그의 주특기인 선전 선동을 펼쳐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집단 궐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시위는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미군이 이에 강경히 대응하며 시민들이 분노했고, 결국 묵혀 쌓여있던 체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와 1921년 10월 미국 정부는 붕괴되기에 이른다.
브론스타인은 워싱턴 D.C.에 무혈 입성,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미주 사회주의 연방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이었다.
적청내전에서의 역할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단지 저 버러지 놈들의 목을 따기 위해 가는 게 아니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1922년 6월의 연설 中 |
물론 미국의 잔당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는 적청내전으로 이어졌다. 이때 적군에는 마땅히 전쟁을 이끌만한 고참 장교가 없던 상황이었고 따라서 브론스타인은 정치국 회의에서 만장 일치로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가원수직과 국방장관직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레온 브론스타인은 현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미군의 7할 이상이 청군 측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적군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대중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여 시민군을 조직하는 동시에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던 초유의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는 고전 로마의 수법을 부활시켜 탈영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 부대의 장교를 처형하도록 하였고 또 청군으로 도주하는 반역자가 나왔다면 10명중 한명을 무작위로 사형시키는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렀다. 당연히 미국의 자유주의적 문화에 익숙하였던 장병들은 반발하였으나 브론스타인의 확고한 성격과 지도력에 대다수 대중들이 감화되었다.
나는 귀하들에게 경고한다. 만약 어떤 부대라도 허가 없이 전선을 이탈할 경우, 첫째. 부대의 정치장교는 처형될 것이다. 둘째. 지휘관도 처형될 것이다. 그리고 용맹한 병사들이 지휘관으로 임명될 것이다. 겁쟁이, 이기주의자, 반역자들은 총알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
또한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 철도는 물론이요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전투 현장을 방문하고 장병들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여 장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치밀한 선전 전술을 사용하였다. 브론스타인의 연설에 감화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순식간에 적군 장병 수는 50만명에서 220만명으로 늘어났고 시민군 및 민병대도 70만명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그는 독재자에 가까운 지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전투를 피하는 장병들을 직접 때려 패며 겁쟁이라고 몰아 붙였다. 전쟁 공포증은 전부 나약한 병리학자들의 헛소리라고 치부하며 전쟁을 피하는 겁쟁이는 필요 없다며 권총까지 들이 밀었다고 한다. 이러한 흑역사도 있으나 그의 리더십이 적청내전에서 적군에게 막대한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상
브론스타인주의(Bronsteinism)는 브론스타인이 주창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브론스타인 개인은 브론스타인주의라고 부르지 않고 전위공산주의(Vangurad communism)이라고 불렀다. 다만 유럽 및 러시아에서 편의를 위해 브론스타인주의라고 불렀으며 대중적으로도 브론스타인주의라는 이름이 불린다.
이 이념은 미국의 친기독교,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등 미국의 문화 사회 정치적 특징을 고려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보완한 이념으로, 기존의 대중 주도 혁명이 전위당 중심의 혁명으로 바뀌었고 또 혁명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면이 보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상적으로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르주 소렐의 생디칼리슴, 로자 룩셈부르크의 직접민주제-평의회 공산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사회민주주의,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코 공산주의 등과는 대립을 겪었다.
전위당 혁명론
당 원칙과 당 규율의 거부 및 조합에 대한 무제한적 예찬은 반혁명주의자들의 주요 정치 테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업장 내에서의 조합이 조합 단위의 이익만을 실천하는 룸펜적 이익 단체로 발전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숭고한 혁명 정신을 욕구충만적 소아병으로 일궈낸다. 이것은 바로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어떤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도 박살내 버릴, 저 소부르주아적 분열과 동요로 귀결되며, 또한 지속성, 통일 및 조직적 행동에 대한 저 소부르주아적 무능이자 끝없는 개량적 집단 이기로 귀결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투쟁 속에서 단련된 철의 당 없이, 일정 계급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신뢰를 누리는 당 없이, 대중의 욕구를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과 인간 해방으로 돌려놓을 당 없이, 그것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 없이는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레온 브론스타인,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생디칼리슴'소아병>, 1919 |
브론스타인이 1912년 발간한 책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What Shall We Do?)에서 밝힌 정치적 견해로 브론스타인주의의 방법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전위당 혁명론은 다수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방법론인 <대중의 계몽을 통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혁명을 이루어야한다>가 아니라, 중앙당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여 혁명을 완수하게 해야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위로부터의 인텔리-중앙집권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브론스타인이 이러한 주장을 한 배경은 당시 미국의 사회적 상황에 있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었던 터라 사회주의가 구석 구석 뻗어나가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넘치는 풍요로 일부 공장 지역을 제외하면 블루 칼라 노동자들마저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브론스타인은 이를 미국에서는 반혁명이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하기에 대중 계몽을 통한 혁명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중들의 방향을 지도하고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가질 중앙집권적 노동자 정당을 통한 혁명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브론스타인은 당시 미국에서 우위를 잡고 있던 더리온주의 중심의 생디칼리슴, 즉 협동조합주의의 원동력 자체는 인정했으나 권리를 위한 투쟁이 곧 집단 이기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 해방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조합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부르주아와 타협하는 반동적인 행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들이 부르주아와 투쟁하는 것 대신 타협하는 것으로 점차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는 양상이 나타났으며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경향을 두고 노동조합의 자발적 종속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미국 노동 운동을 토대로 하여 조합의 원동력을 역사 발전에 올바르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구를 체제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시키도록 지도하는 전위당이 있어야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화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미국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할 노동 계급은 물론 사회주의 노동 조합마저 룸펜화되어가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경향이라면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결국 혁명은 변질될 수 밖에 없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배운 엘리트들이 혁명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대중들을 지도해야한다고 보았다.
브론스타인이 주창한 전위당 혁명론은 한마디로 말하여 미국의 대중들과 노동 운동이 첫번째로 혁명에 소극적이며 두번째로 혁명의 목적을 인류 해방이 아닌 자기 이익 추구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에 이를 대중 단위에서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며 커다란 경향을 바꿀 권력을 가진 중앙 전위당의 집단 계몽을 주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위당론은 주로 아나키스트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의 비판 거리가 되었다. 이 전위대 체계론으로 여러 마르크스주의자, 브론스타인주의자 외의 공산주의자들은 브론스타인주의를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의 일종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사회혁명당 내 아나키스트 파벌의 일원인 네스터 마흐노는 다음과 같이 브론스타인을 공개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순전한 엘리트주의는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관점을 전면적으로 위배한다. 더욱이 이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선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영구혁명론
브론스타인주의의 또다른 축을 담당하는 혁명의 방법론이다. 쉽게 요약해 외부적으로 혁명을 수출하고, 내부적으로는 혁명을 계속하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외부적으로는 미국에서 혁명을 끝내지 말고 계속 혁명을 진행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 처한 국내외적인 사안들을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유지한 고립주의로 협상국의 패방과 뒤이은 경제 공황을 경험해야했다. 또한 넘쳐나는 국력에 비해 미국이 가지고 있던 외교적 발언권은 적었으며 오직 한정된 지역에서만 패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것들이 미국의 체제적 모순이었음을 지적하며, 오직 국내에서만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외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뿐인 순진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 미국은 국제적 패권을 쥐는 것을 목표로 해, 외부의 반동 국가들을 쳐 부수고 사회주의 혁명을 물질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돕는다는 것이 영구혁명론의 대외인식론이었다.
우리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입니다. 땅은 기름지고 풍요로워 세계의 인민들에게 두배나 많은 곡물을 평등히 나눠주고도 남을만큼 많은 작물을 수확해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공장에서 나오는 상품들은 전세계로 수출됩니다. 미국의 이러한 잠재적 영향력은 그동안 이기적 자본가들에 의해 감춰져있었으나, 사회주의 정부에서는 이러한 오만과 독선이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미국은 미국만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여,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을 도와주고 지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로서 마르크스의 혜안을 국제적으로 전달하며 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카리브해의 백사장에, 유럽의 고성에, 중국의 논밭에 노동자 농민의 함성이 울려퍼지게 합시다! 1921년 9월 혁명당 대회에서의 연설 |
이러한 브론스타인의 대외인식론은 제3인터내셔널의 설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판초 비야가 이끄는 멕시코 혁명당의 혁명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자 브론스타인의 대외 인식관은 대중들에게서 높은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제국주의에 불과한 무모한 발상이라는 비판 역시 받았다.
내부적으로는 전위당의 관료 독재화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노동자들이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안주하지 말고 끊임 없는 혁명을 통한 권력 감시를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브론스타인은 퇴보된 노동자 국가를 일어날 수 있는 미래라고 주장했다. 이는 관료제, 파시즘 혹은 의회민주제 체제로 퇴보한 사회주의 국가를 의미하며, 이러한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적이므로 노동자가 혁명을 일으켜 쳐 부수고 새 정부를 세울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아무리 올바른 체제더라도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 정부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정치혁명을 반동으로 탄압할 것이 아니라, 교섭해야한다고 하였다.
불균등 복합 발전론
브론스타인의 대외 인식관이다. 불균등 발전(Uneven development) 자체는 브론스타인이 창시한 개념이 아니다. 다른 사회주의 이론이 그렇듯이 마르크스-엥겔스가 창시했으며 이후 브론스타인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마르크스의 <불균등 발전>은 사회, 국가, 민족 등의 "존재"들이 불균등(불평등)한 속도로 발전한다는 것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몇몇 후발 주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마르크스의 불균등 발전론을 진화시켜 불균등 복합 발전론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복합이란 세계적인 단위의 복합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결합된 현 시대의 상황에 있어서는 신흥공업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는게 불가능하다. 일단 초기 단계에서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자본-제국주의 체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자신의 자본을 유지하기에 거대 선진국의 착취 대상인 후진국은 선진국처럼 착실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 브론스타인에 따르면, 발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근대적 봉건제도가 유지되기에 대부분의 자산은 투기나 고리대금업으로 지출되어 축적 자본이 거의 나타날 수 없고, 이에 따라 모든 후발 주자들은 선진국에 의한 착취에 종속되고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이는 브론스타인의 영구혁명론을 옹호하는 근거로서 사용되었다. 해외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의 필수 조건인 자본주의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진 공업국이 이를 도와줘 혁명이 일어날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리한 자본화는 오히려 착취만을 부추길 뿐이므로, 제3세계 국가의 즉각 사회주의화를 외쳤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우선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고, 이들 국가가 공업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형제애의 힘으로 도와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국가는 착취라는 정글과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되며, 더 나아가 모든 국가의 인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노동계급 및 노동자정당의 주체성
브론스타인은 우선 사회 파시즘 (Social fascism)이라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이 개념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비난하기 위해 만든 용어로, 사민주의는 사실상 파시즘이나 다름 없다는 비난을 담은 용어였다. 그러나 브론스타인은 우선 사회주의화가 급선무이기 때문에 모든 국가에서 모든 노동자 정당의 단일 전선 성립을 촉구하였다. 동시에, 전위당 노선을 추구하되, 자유민주적 선거에 참여해 의회를 뒤흔들고 그 여력을 자본가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야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브론스타인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와 같은 몇몇 국가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 사회민주당의 공동전선이 성립되었다.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노동자 정당의 단결을 노동자 정당의 주체성이라고 불렀으며, 더 나아가 노동자 계급의 재정의와 자각을 촉구했다. 그에 따르면 농민은 새로운 피착취 계급이며, 또한 이민자, 소수 민족 등 억압받는 피착취 계급은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을 마르크스가 말했던것처럼 소부르주아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게 브론스타인이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에는 단순히 노동자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농민, 이민자, 소수민족, 원주민 등도 포함되는 것이며, 이들은 공동으로 자본 체제에 대항하는 전선을 구성하여 혁명을 이끌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미국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브론스타인은 어릴적 아일랜드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이민자들 사이에서 자라났고, 그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과 인종 차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입장에도 동정적인 입장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는, 남부의 주력 산업이었던 농업을 무시할 수 없었고,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이들을 전부 소부르주아지라고 간주한다면 이는 남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혁명에 동지를 늘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입장을 전개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브론스타인의 경제 정책에는 경공업과 농업, 자영업의 현실적 고충을 담고 이들의 권익과 산업 발전을 위해 반영된 부분이 상당수 발견된다.
유진 데브스를 비롯한 생디칼리스트들과 가장 크게 입장 충돌을 겪은 부분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계 노동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분적으로는 브론스타인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종교관
브론스타인은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유대교는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고[8] 나중에는 무신론으로 돌아섰다. 그는 마르크스가 주창한 종교관을 신봉하였으며, 종교의 기만성에 크게 분노하였다. 종교를 "영원히 평안한 내세를 내세우는 기만적 사기"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따라서 브론스타인은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마르크스가 주창한 유물론적 개념을 포기하고 관념론에만 기대는 나약함이자 순진함이라고 유신론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가 설정한 혁명의 방향은, 유신론에 대항하는 무신론의 투쟁, 그리고 관념론에 대항하는 유물론의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 주목을 받은 이오세브 제 쥬가슈빌리의 정교회 해방 신학에 대해서도 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조지아 여행 도중 쥬가슈빌리는 만난 이후 이렇게 적었다. "이 별난 콧수염을 가진 신부는 마르크스를 따른다기보다는 이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중들을 기만하고 잘못된 믿음을 불어넣는다. 그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인간 해방의 가치를 속세에서의 해방과 내세에서의 쾌락으로 격하시키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이념적 무지이자 사회주의에 대한 모욕이다."
그럼에도 브론스타인은 만약 종교인들이 사회주의 정당에 협조한다면 이를 막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인민에게 "다가가는" 사회주의로서 이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하였다. 마치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의 시대로 나아가듯, 유신론을 거쳐 유물론으로 나아가야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그는 유신론을 배척하고, 종교를 금지하기보다는, 그들이 가진 선량함과 관념론을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으로 변화시키도록 계몽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교회를 불태우고 신부를 학살하는 행위는 그저 살인 행동일 뿐이라며 올바른 도덕적 신념을 가진 모두는 올바른 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브론스타인은 전위당 혁명론에 입각하여, 혁명당이 예술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이 예술의 궁극적 방향을 이데아를 드러내는 도구라고 보았다면 브론스타인은 이데아의 자리에 공산주의를 놓고자 하였다. 브론스타인에게 있어, 예술은 인민들이 계급투쟁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다. 일단 브론스타인의 입장에서 귀스타브 쿠르베와 같은 비판적 사람의 예술은 <비판적 리얼리즘>이었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제국주의-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성과 거기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노동자들과 각계층의 분노를 불러오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따라서 더욱 적극적으로 계급의 모순과 계급 투쟁 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대중들을 사회주의 혁명에 포섭시킬 수 있어야한다. 한마디로 말해 선동을 하는 것이다. 브론스타인은 이를 위해 예술이 크게 세가지의 성질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정당성, 계급성, 인민이다. 정당성은 예술이 철저히 전위당, 그러니까 혁명당을 위해야한다는 것이다. 계급성은 예술이 노동 계급의 이익을 담아내야한다는 것이다. 인민성은 예술이 모든 계층을 위한 것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리얼리즘이 철저히 객관적인 사실을 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인데, 그중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노동 계급의 눈으로 본 사실을 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히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러한 기계적 중립에 비판적이었다. 우리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대 부르주아라는 양극단의 계급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어떻게 "중간" 계급의 시각으로 사실을 바라보냐며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리얼리즘"이란, 철저하게 마르크스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으로 바라본 사실의 "해석"이라고 봐야한다.
비판
이념적 비판
이 순전한 엘리트주의는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관점을 전면적으로 위배한다. 더욱이 이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선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네스터 마흐노 |
결국은 불확실한 혁명이라는 모험에 기대는 극좌적 이상론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빌 헤이우드 |
아무리 봐도 그는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조합을 이루는 이유를 이해를 못하는 듯 합니다. 존 리드 |
그의 사상은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며, 교조적이고, 권위적이라는 비판을 동료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받아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22년, 그의 저서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브론스타인의 전위당 혁명론을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며, 인민의 자발적 의지를 통한 평의회 공산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관료 독재 국가가 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9]
또한 브론스타인은 아나키스트들로부터 국가의 폐지가 아니라 영속을 바라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의 권위성을 옹호하며 궁극적으로 독재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생디칼리스트들에게는 모든 혁명이 아래의 노동 조합에서 결정되어야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지도 못하는 중앙당이 멋대로 지휘하게 냅두면 그것은 착오적 지시가 될 뿐임을 지적받았다.
개인사
브론스타인을 가까이 만나본 이들의 공통된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의 친구들은 "브론스타인은 신사적이며 품위있다. 그는 말을 조리있게 한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게 많다는 것을 과시하고 아는채하며 남을 깔보는 나쁜 습성이 있다."라고 브론스타인의 성격을 지적하였다.
성격이 매우 오만하고, 잘난체하는 면이 있어, 혁명당 내부에서는 단순히 브론스타인 개인을 싫어하여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는 젊은 독수리라고 불릴만큼 영웅주의적인 면이 있었으나 그런만큼 그의 정적도 많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정권을 잡으면 나폴레옹처럼 군사 독재를 할 것이라는 우려까지 하였다. 그가 국방부장관 직을 지내고 있었으며 적군 내에서 지지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면박을 당하거나 망신을 산 인물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헨리 A. 월리스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강하기보다는 고분 고분 일을 잘하는 관료에 가까웠다. 브론스타인은 그런 그의 성격을 대놓고 조롱하며 놀렸고, 월리스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수는 없소.라고 항변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미국 사회당 | 1906 - 1920 | 정계 입문 |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 1920 - | 당명 변경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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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1912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뉴욕주 제6구 | 미국 사회당 | 28,532 (32.6%) | 당선 (1위) | 초선 |
1914 | 1914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32,274 (39.6%) | 재선 | |||
1916 | 1916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30,117 (36.1%) | 낙선 (2위) |
여담
- 브론스타인 스스로는 언어를 잘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어인 영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였고 독일에서는 유학한 경험 때문에 독일의 사회주의 학자와 토론까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정작 그가 태어난 지역인 우크라이나의 언어인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에는 미숙해서 기초적인 의사 표현밖에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신, 영어 실력이 발군이라, 영어의 아름다움과 기교를 살린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데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 그는 토론의 달인이었으며 그 어떠한 상대도 브론스타인에게는 토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토론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수십권 읽고 정리하여 미리 근거를 정해두었다. 또한 역사, 경제, 정치, 문화, 사회 등 인문학 전 분야에 걸쳐있는 엄청난 지식양으로 남을 압도하였다. 그러면서도 남을 조롱하고 놀리는 화법으로 토론 상대를 분노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으며 이는 그의 추종자와 적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교 신앙은 거의 없었고 자신도 유대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사실상 무종교인이었고, 집에서 종교 행사조차 치루지 않았다. 그는 유대교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식재료인 새우, 게 등의 갑각류를 즐겨 먹었으며, 시온주의는 소아적인 민족주의 발상이라고 극렬히 비난하였다.
-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러시아의 구시대적인 전통, 특히 정교회를 매우 혐오하였다. 그러나 같은 처지에 있는 이민자들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는데, 자신과 같은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네스터 마흐노[10]와는 각각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을 추종한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공개 석상에서 언제나 맞붙었지만 사석에서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 성격이 무척 고집이 세서, 한번 결심을 하면 아버지가 와도 꺾을 수 없었다.
- 아버지는 보수주의자였다. 독일 유학 이후 브론스타인이 공산주의자가 되자, 그의 아버지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앞으로 천년은 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몇년 뒤, 미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가 사회주의 미국의 국가원수가 되자, 아버지는 "네가 다시 세운 미국이니, 앞으로 새 미국이 천년을 가도록 노력하도록 하거라"라고 덕담을 하였다고 한다.
- 사회주의자였으나, 사회주의을 극렬히 탄압하는 황정국가를 매우 좋아했다. 반대로 가장 싫어한 것은 세계 혁명의 본고장이었다. 그는 가끔씩 파리에서 업무상 머무를 때가 있었는데, 언제는 묵은 숙소 앞에 돼지를 잡는 푸줏간이 있었다고 한다. 돼지 창자 냄새가 너무 심해서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열 수 없었고, 이는 브론스타인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브론스타인은 "프랑스는 규칙도 규율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원시 시대에 가까운 국가이며, 다시는 방문하고 싶지 않는 더러운 오작품이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런데 뒤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푸줏간 주인은 독일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브론스타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 판초 비야와의 만남에서 브론스타인이 판초 비야와 악수를 한 후 손을 닦은 적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공석이 아닌 사석에서는 서로를 싫어하였는데, 비야는 브론스타인을 안경 쓴 당나귀라고 불렀고, 브론스타인은 비야를 술과 여자에 환장하는 망나니라고 표현했던 것이 일기장과 편지에서 각각 보이곤 했다.
멕시코에서 술담배와 싸구려 여자 향수 냄새나 풍기고 다니는 망나니와 만났다. 그가 마르크스가 누군지는 알까? 브론스타인의 일기장 中 |
훌리오 말이 맞았네. 무슨 자신이 예수님이라도 되는듯 행동하더군. 솔직히 말하면 당나귀가 안경을 쓰면 그렇게 생기지 않았겠나? 판초 비야가 자신의 부관에게 보낸 편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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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시 이름은 레이바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Ле́йба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
- ↑ 초대 국방부장관 재임.
- ↑ 신앙심은 거의 무종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
- ↑ 지역구는 뉴욕주 제6구.
- ↑ 술책이나 학문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 ↑ 첫번째는 파리 코뮌.
- ↑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영어 사용에는 지장이 없는 것을 넘어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중 가장 영어의 기교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에는 매우 서툴러 기초적인 의사 표현밖에 못한다.
- ↑ 즐겨 먹는 요리가 새우 튀김과 갓 잡은 가재로 만든 요리였다고 한다. 알다시피 유대교는 갑각류를 먹는 것을 금지한다.
- ↑ 일설에 의하면 브론스타인은 이 책을 읽고 매우 분개해 3일동안 자지도 씻지도 않고 룩셈부르크를 비난하는 책을 썼다고 했다.
- ↑ 브론스타인은 헤르손 출신이고 마흐노는 자포리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