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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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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미국 황제 조지 2세 | George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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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2년 7월 20일 |
이탈리아 피에몬테 튜린 | |
대관식 | 1870년 5월 30일 |
버지니아주 포토맥 궁 | |
사망 | 1890년 9월 13일 (향년 78세) |
매사추세츠주 매사추세츠 보스턴 | |
재위 | 미국 황제 |
1867년 12월 25일 ~ 1890년 9월 13일 (22년 8월 2주 5일, 8,298일) | |
작위 | 미국 황제 (1867~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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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미국의 제4대 황제.
전임 황제들은 모두 즉위 당시 미국인의 왕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즉위하였으므로, 미국 황제라는 작위를 가지고 즉위한 군주는 조지 2세가 최초이다.
상세
20년이 조금 넘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의 치세는 66년 체제로 정리될 수 있다. 그가 즉위하기 1년 전 1866년 미국 총선으로 자유당 급진파가 다수 의회에 유입되었고,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정책이 추진되면서 미국의 사회상은 급격히 귀족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로 옮겨졌다. 보통 이런 변화에 기득권층이 반발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조지 2세는 리버럴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적극 가담하였다. 66년 체제의 급격한 변화는 조지 2세와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는 정치학자도 다수이다.
실제로 그의 사후, 자유당 급진파는 점차 시장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방임주의자와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받아들여 재분배와 사회 진보, 공정을 중시하는 혁신파로 분화되었고 보수당 역시 세력을 재건해 그가 승하한지 불과 10~15년만에 66년 체제는 동력을 잃고 붕괴하게 된다. 따라서 66년 체제에서 황실의 지원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조지 2세 체제라고 66년 체제를 부르기도 한다.
정복 군주의 이미지가 있고 업적도 명확한 리처드 2세에 비하면 대중매체에 잘 나오지 않아 업적에 비해 인기가 높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미국 내 민권, 평등 운동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그의 평가 역시 나날이 높아져가고 있다.
생애
황제로 등극하다
리처드 2세의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었을 때 미국 황실과 내각 내에서는 누구를 차기 황제로 올릴 것이냐는 논의가 오갔다. 미국의 황실전범상 오직 남성 직계만이 황제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리처드 2세에게는 딸만 4명 있고 아들은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싱턴 왕조는 뿌리가 깊지 않은 가문이었으므로 방계 출신의 왕자들도 마땅하지 않았다. 황실과 내각은 수년간의 협의 끝에,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인 사보이 왕가의 자녀이면서 리처드 2세와 그리 먼 촌수도 아닌 조지를 이탈리아에서 불러와 황제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지 2세가 강화도령 철종처럼 어느날 갑자기 모셔져와서 황제가 되었다는 식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조지 2세는 생전에도 리처드 2세와 잘 알고 있는 사이였으며 미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생활했기에 영어는 물론 미국의 정치 상황에도 능통했다. 만약 그가 철종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었다면, 66년 체제라는 거대한 시대적인 변화를 버텨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반평생을 이탈리아에서만 보낸 그를 탐탁치 않아하는 귀족들도 충분히 많았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다소 늦은 55세라는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1] 정통성이 없는 임시 황제라고 여기며 깔보던 귀족들도 많았다. 역설적으로 이런 고위 귀족들의 불경한 태도가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귀족주의, 보수주의적인 전통을 과감히 철폐한 조지 2세의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부추겼다고 보는 의견이 현재로는 주류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67년, 리처드 2세가 승하하자 펜실베니아의 농장에서 요양하고 있던 조지 2세는 급히 임페리얼 캐피톨로 불려와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대관식은 제2차 미영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감안해 3년 뒤인 1870년 거행되었다.
66년 체제를 이끌다
조선과의 관계
1883년 보빙사 일행과 만난 미국의 황제가 바로 조지 2세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교과서에서 가장 높은 빈도로 언급되는 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교류가 확대된 것은 1940년대 이후인데, 이 때는 에드워드 1세가 제2차 세계 대전을 빌미로 역사상 마지막으로 황제로서의 권력을 행사했던 직후였기 때문에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황실이 아닌 내각을 중심으로 작동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 외교사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중요한 서양의 군주로도 볼 수 있다.
보빙사 일행이 조지 2세에게 절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보빙사 일행도 서양식 예법에서 절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서양의 예법을 몰랐거니와 조지 2세가 알현하였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절을 하게 된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조건반사적으로 절을 한 것은 아니였다고 한다. 오히려 조선 예법식으로 한 독립국의 수장에게 보이는 최고의 경의를 나타내자는 의미에서 행해진 일이었으며, 후에 통역관인 로웰이 이를 전하자, 당시의 언론들이 이것에 대해 나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횡제 자신도 이에 대해 만족했다고 한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 합중국 임불아(任拂亞: Emperor의 음차)께 아뢰옵니다. 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임불아와 대아미리가 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
그리고 친서를 전해 받자 황제는 보빙사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제국은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타국의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소. 오로지 상호 우호관계와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나누기를 바라오. |
조지 2세의 발언은 조선 정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정작 미국은 리처드 2세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제국주의의 극강을 달리고 있었다. 필리핀이 미국으로 귀속된 것도 조지 2세 때의 일이었다. 그나마 조지 2세의 경우 무작정 원주민과 타국민들을 짓밟고 불평등 조약을 밀어붙여 땅을 강탈해가다시피한 선황에 비하면 비교적 신사적으로 다른 나라들을 포섭했기 때문에 변호받을만한 부분이 있긴 하다.
- ↑ 참고로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미국 황제중 최고령으로 황제에 즉위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