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당신들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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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시급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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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당신들의 조선)의 기 조선의 직할시
서울시
서울市
Seoul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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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flet | © OpenStreetMap contributors
시 소재지 중구역 승리거리 110 (명동)
하위 행정구역 13구역
면적 638.51㎢[1]
인구 9,407,540명[2]
인구밀도 14,733.58명/㎢
GRDP 전체 $N,NNN억 (2024년)
1인당 $NN,NNN (2024년)
당 책임비서
오세훈 (N대)
인민위원장
김의승 (N대)
직할시인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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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시화 개나리
시목 은행나무
시조 까치
지역번호 02
IATA 도시 코드 SEL
ISO 3166-2 KR-11

1.개요

8K 화질로 촬영한 서울시의 모습

서울시는 조선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이다. 평양시, 경주시, 개성시와 더불어 오래된 역사를 가진 조선반도의 고도(古都) 중 한 곳이다.

2.역사

서울은 과거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하여 조선반도에 존재한 수많은 국가들이 차지하기 위해 애쓰던 곳이었다. 백제의 온조왕은 강남 일대에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약 500년 간 백제의 수도 역할을 하다가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이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며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다. 신라가 조선반도를 통일한 이후에는 9주 5소경 중 한주 소속의 북한산주(北漢山州)가 되었다. 757년에는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한양군(漢陽郡)으로 개명되었다. 후삼국시대 당시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 되었다가 이후 궁예를 거쳐 왕건에게 복속되었다.

고려는 한강을 기점으로 강남은 광주(廣州)로,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누었다. 문종 시기에는 수도 개경을 보완하는 목적으로 경주(당시에는 금성), 평양과 함께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원 간섭기 당시 충선왕이 명칭을 한양으로 환원하였으며 이후부터는 한양 내지 한성(漢城)으로 불렸다. 한편 고려 말에는 지속적인 황건적과 왜구의 침입과 위협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천도가 논의되었다. 실제로 우왕과 공양왕은 이 일대에 천도하기도 하였으나 신하들의 지속적인 반대로 환도하여 그 기간은 도합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리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개성에서 천도하며 조선반도의 중심지 서울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성계는 한양과 무악, 부평, 계룡 중에서 한양을 수도로 삼아 정도전의 지휘 아래 일대에 경복궁을 축성하였다. 1395년에는 한양을 한성부(漢城府)와 양주군으로 분리하였다. 정종 시기에 일시적으로 개성으로 환도하기도 하였으나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다시 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후 한양은 1426년 6,044명, 전체의 5.5%밖에 되지 않던 성저십리 인구가 1789년 76,782명, 전체의 40.6%까지 증가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1895년 고종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13도제를 23부제로 바꾸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다. 이로 인해 기존의 한성부 일대는 한성부 산하의 한성군(漢城郡)이 되었으나 1년 후인 1896년 13도제로 환원되며 한성부 도한 기존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1896년 내각총리대신 박정양의 명의로 한성부 판윤 이채연이 주도하여 한성부의 도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사업을 실시한다. 이것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도시개조사업의 일환이었는데 해당 사업을 통해 한성의 도로와 하천이 정비되고 독립공원, 탑골공원 등의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전차가 개통되고 전등을 설치하는 등의 각종 신문물이 한성부에 대거 도입되었고 용산에 공장지대를 개발하고 여러 산업시설을 설치함과 동시에 경원선, 경인선, 경부선 등의 다양한 철도를 한성으로 향하게 하여 한성을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 꾸몄다.

1897년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자신이 즉위한 장소인 환구단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형태의 도로 체계를 계획하여 자신이 거주하던 경운궁의 위상을 상승케 하도록 하였다. 또한 주변에 독립문 건설을 허가하여 리조가 자주국임을 만국에 알리려 하였다.

1910년 왜정시대가 시작되며 한성은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 소속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1914년에는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여 성저십리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합치고 경성부의 영역을 기존의 사대문 안과 용산 및 신용산의 일본인 거류지로 축소시켰다. 1926년에는 지속적으로 인구와 규모가 증가하는 경성의 행정 업무를 더욱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해 부청을 현재의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치로 이전하였다. 1936년부터 경성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의 일환으로 더욱 확장되었으며 1943년에는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 총 7개의 구를 최초로 설치하였으며 1944년에는 서대문구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를 신설하였다.

이 지역 일대가 '서울'로 불리게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1946년 미군정은 기존의 경성부란 칭호를 서울시로 바꿨으며 같은 해 서울을 경기도에서 분리시키고 '특별자유시' 지위를 부여한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서울을 자국의 수도로 삼는다. 한편 같은 해 건국된 조선은 대한민국이 차지하고 있는 서울을 명목상의 수도로 규정함과 동시에 조선반도 북부의 중심 도시인 평양을 임시 수도로 정한다. 2년 후인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패전한 대한민국이 국부천제로 수도를 제주로 옮기자 조선은 기존의 임시 수도였던 평양에서 해방된 서울로 정부 기관을 이전하게 된다.

종전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을 재건하기 위해 조선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의 무상 지원을 등에 업고 '서울복구총계획'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재건 작업에 돌입한다. 당시 조선은 소련의 조립식 건축 공법을 도입하고 주택 건설 과정을 표준화하여 14분마다 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서울을 '민주수도'로서 새롭게 재건하였다. 현재도 조선은 이 당시의 속도를 '서울속도'라 하여 널리 선전하고 있다. 서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들어선 도로에는 '쓰딸린거리', '모택동거리'와 같이 당시 집권하고 있던 유명 공산권 지도자들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3.지리

3.1.하위 행정구역

서울시
시급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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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인구 추이

4.위상

4.1.국제적인 위상

5.수도로서의 서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35조

5.1.경기권의 최대도시

5.2.고령화와 인구 유출

6.교통

7.경제

8.관광

9.생활·문화

9.1.주거 환경

9.2.교육

9.3.의료기관

9.4.치안

9.5.언어

9.6.스포츠

10.정치

10.1.역대 령도자

11.군사

12.여담

13.각종 매체의 서울

13.1.국내 매체

13.2.해외 매체

14.자매결연 지역 및 우호 교류 지역

14.1.자매결연 지역

14.2.우호 교류 지역

15.출신 인물

16.관련 문서

17.둘러보기

조선
관련 문서
아시아의 국가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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