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쟁 朝鮮戰爭 | Korean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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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의 전개도 (미 해군) | |
기간 | |
1950년 6월 25일 ~ 1950년 10월 8일 (사실상) 1950년 6월 25일 ~ 현재 (명목상) | |
장소 | |
조선반도 본토 및 연안과 부속도서 일부 | |
원인 | |
냉전, 조선반도 통일을 위한 조선로동당의 기습 남침 | |
교전국 | |
대한민국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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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원국 | |
스웨덴 | [ 펼치기 · 접기 ]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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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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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0명 |
피해 | |
민간인 포함 약 500,000여명 | |
결과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영향 | |
대한민국의 조선반도 주권 상실, 국부천제 단행 조선반도 분단의 고착화, 협간관계의 성립 |
개요
조선전쟁의 전개 |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0월 8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명칭
이 전쟁은 전 세계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영미권에선 해당 전쟁을 Korean War라고 부르며 동양권에선 해당 전쟁을 조선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승자라고 볼 수 있는 조선에선 해당 전쟁을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치룬 전쟁이라 하여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이라는 명칭을 공식 명칭으로 삼고 부른다. 이를 방증하듯 해당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53년 6월 25일 건립된 기념관의 이름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이며 해당 전쟁에서 활약하거나 전사한 장성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묘의 이름도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이다.
한편 전쟁의 패자라고 볼 수 있는 제주에선 해당 전쟁을 전쟁의 발발일에서 따와 6·25 전쟁(六二五戰爭)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거나 한국에서 발발한 전쟁이라 하여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이승만·이기붕 정권 시절에는 6·25 사변(六二五事變), 경인공란(庚寅共亂)[1]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었다. 경인공란토벌시기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이 경인공란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그 시기의 흔적이다.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조선은 약 35년 간의 왜정시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광복에 힘입어 여운형을 비롯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조선반도내에 수립된 최초의 공화국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북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소련군과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미군에 의해 산산조각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산산조각난 조선인공 위에 양 국가는 각각 소련군정과 미군정을 수립한다.
본래 1948년 5월 10일 조선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총선거가 실시되어 통일된 조선 정부를 수립할 예정이었으나 소련군정에서 이를 거부, 독자적인 선거를 진행하여 결국 1948년 8월 15일 조선반도 남반부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조선반도 북반부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며 결국 조선반도엔 2개의 국가가 들어서는 비극이 밀어닥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반도에 세워진 양쪽 국가는 서로를 각각 '소련의 괴뢰', '미국의 괴뢰'라고 낮잡아 부르며 이들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장기적으론 언젠가 평화적으로나 무력으로나 통일을 위해 밀고 들어가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이 중에서 상대방을 향한 통일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국가는 대한민국이었는데 이는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신성모가 국회 질의에서 한 발언인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에서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겉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의 수반이었던 김일성에겐 남침을 통한 조선반도 통일이 상당히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본인의 반쪽짜리 정통성에서 비롯된 불안이었다. 소련의 수반이었던 스탈린은 레닌의 지지를 통해 서기장까지 올라선 인물로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소련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이끌어 올린 장본인이었으며 중국의 수반이었던 마오쩌둥은 20년간의 빨치산 활동과 국공내전을 거쳐 장제스와 중화민국을 저 아래 대만으로 몰아내어 중원을 통일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반쪽짜리 조국을 통치하는 반쪽짜리 수령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에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전쟁 허가 및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엔 이 둘은 전쟁에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소련은 이제 막 2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 지은 상태로 4년 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 재건이 최우선이었으며 마오쩌둥은 당시까지만 해도 국공내전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냉전 구도가 점점 굳혀짐과 동시에 소련에선 핵실험 대성공이라는 호외가, 중국에선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함과 동시에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이 승기를 잡으며 내부 정세가 점차 안정화되자 이들은 조선반도에 대한 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 둘은 전쟁의 승인과 지원을 김일성에게 약속했다.
여기에 여러 국제적인 정세도 김일성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과 외치에만 힘을 쏟던 민주당 정권을 향한 비토 여론의 증가, 민주당의 16년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 진보당과 주권민주당의 창당으로 인한 여권의 분열을 발판 삼아 대선에서 승리한 토마스 E. 듀이는 기존 공화당의 고립주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가는 경향을 보였으며 1950년 6월 초에는 전력 정비를 끝마친 중국이 대만을 향한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하며 전 세계의 모든 시선은 중국과 대만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에 김일성은 당시 대한민국 전역에 발령되어 있던 비상대비태세가 해제됨과 동시에 당시 바닥난 군량미를 보충하기 위해 군인 대부분을 휴가 보낸 직후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에 남침을 진행할 것을 당일 새벽 3시에 소집한 긴급내각회의에서 확정짓게 되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은 '폭풍 224'라는 이름의 대대적인 남침을 시행한다.
전개
작전명 '폭풍'
서울 시내에 진입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
낙동강까지 밀린 대한민국
UN군의 지속적인 연패
인민군의 낙동강 도하
결과
조국통일선언과 국부천제
Pusan Under Red Control 빨갱이 지배 하의 부산 1950년, 부산을 점령한 조선인민군 |
조선과 대한민국의 산발적 전투
대한민국의 패배 원인
수적, 질적 열세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
미국의 대만 지원으로 인한 전력 분산
조선의 토지 개혁
남로당 빨치산의 산발적 봉기
주변국에 끼친 영향
자유 진영
대한민국
미국
대만
진영
조선
중국
소련
기타
각종 매체에서
영화
소설
게임
방송
어록
朝鮮問題は決して朝鮮のみ限られた問題ではない。朝鮮問題は東洋のバルカン問題である。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朝鮮は世界の平和と混乱を左右するキーである。全世界の問題であり、全人類の問題だ。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후세 다쓰지 |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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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내외 전쟁·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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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대내외 전쟁·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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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인(庚寅)년에 일어난 공산당(共)의 난(亂)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