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내각 (개화)


역대 대한민국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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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내각
徐載弼内閣 | Seo Jae'pil Cabinet
1913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윤치호 내각 제1차 이승만 내각
국무집정 이상재 / 제7대 (~1916)
신응희 / 제8대 (1916~)
국무총리 서재필 / 제7대
주요 선거 제1회 총선 (1914)
제2회 총선 (1917)
기간 1차 : 1913년 월 일 ~ 1914년 월 일
2차 : 1914년 월 일 ~ 1917년 월 일
3차 : 1917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여당
서재필 국무총리

1.개요

서재필 국무총리 취임식[1]

1913년 NN월에 출밤하여 1919년 NN월에 해소된, 약 N년 N개월간 존속한, 서재필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개화당의 마지막 내각이었다.

서재필 내각은 훈정 체제의 마지막 내각이자 헌정 체제의 첫 내각이었다. 또한 개화기의 마지막 내각이자 천금의 시대의 첫 내각이었다.

2.상세

2.1.제1차 내각

제1차 서재필 내각
第一次徐載弼内閣
First Seo Jae'pil Cabinet
1913년 월 일 ~ 1914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제2차 서재필 내각
국무집정 이상재 / 제7대
국무총리 서재필 / 제7대
선거 -[2]
여당 개화정부

이전 국무총리인 윤치호는 국민이 아직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다른 개화지사들과 갈등을 빚었고, 이미 수 년 내로 새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심한 개화당 지도부는 윤치호에게 사임을 압박해 결국 윤치호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총리직에서 하야하였다. 이에 따라 대표적 개화지사이자 당시 국무원총서였던 서재필이 새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일각에서는 서재필이 윤치호의 친한 친우인 점을 들어 윤치호가 서재필에세 친분을 무기로 총선 연기를 종용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서재필은 자신은 사사로운 정에 얽메이지 않는다고 하며 논란을 일축, 제7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서재필 1차 내각은 30년 가까이 이어진 훈정을 끝내고, 헌정에 기반한 의회정치를 도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서재필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제헌 작업에 착수하얐고, 임시중추원을 통해 헌법을 제정하여 기존의 임시헌법을 대체하였다. 새 헌법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중추원이 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실권자이자 정부수반인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전형적인 의원내각제의 핵심요소를 가졌다. 다만 보수적 농촌의 투표력을 우려한 내각은 선거법 제정으로 참정권을 개화정책을 지지하는 일부 계층에게만 한정하여 수구파가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을 낮췄다. 서재필은 헌법 제정 직후 경성신문, 국민신보, 경향신문 등의 기자들이 모인 기자회견에서 취임 이듬해인 1914년에 중추원의원을 선출하는 첫 총선을 실시한다고 못박았으며, 이를 통해 과두정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인 개화정부를 의회민주정으로 운영되는 의회정부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각은 임시중추원과의 작업을 거쳐, 약속대로 이듬해인 1914년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기념비적인 제1회 대한민국 중추원 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총선거가 실시됨에 따라 제1차 서재필 내각은 해소되었다.

2.2.제2차 내각

제2차 서재필 내각
第二次徐載弼内閣
Second Seo Jae'pil Cabinet
1914년 월 일 ~ 1917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제1차 서재필 내각 제3차 서재필 내각
국무집정 이상재 / 제7대 · 개화당 (~1916)
신응희 / 제8대 · 개화당 (1916~)
국무총리 서재필 / 제7대 · 개화당
선거 제1회 총선 (1914)
여당

제1회 총선에서 개화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훌쩍 넘는 의석을 차지함에 따라, 서재필을 필두로 한 개화당 수뇌부는 개화당 단독으로 내각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30여년 간 이어져오던 개화당과 보수당의 협력은 해소되었고, 개화정부의 훈정체제는 의회정부의 헌정체제로 대체되었다. 국무총리에는 개화당 영임인 서재필이 연임하였고, 국무부총리 겸 외무성총판에 이승만(개화당)이, 탁자성총판에는 남궁억(개화당)이, 내무성총판에는 유길준(무소속)이, 법무성총판에는 권중현(무소속)이, 군무성총판에는 이규완(개화당)이, 문교성총판에는 오세창(개화당)이, 농무성총판에는 민상호(개화당)가, 체신성총판에는 조중협(개화당)이, 상공성총판에는 권중현(개화당)이 임명되었다.

제2차 서재필 내각이 출범한지 얼마 안 돼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곡인 '7월 위기'가 시작되었다. 유럽 각국에 파견된 공사들은 유럽에서의 전쟁 위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보고했고, 이에 총리 서재필과 부총리 겸 외총 이승만도 동의하였지만 누구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대전쟁이 발생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후 각 열강들이 상호간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내각은 협상국에 합류해 동맹국 측에 선전포고하기로 결정한다. 일각에서는 협상국인 러시아를 침공해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확보하기 위해 동맹국 측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영국과 동맹관계였고, 협상국이 제해권에서 우위에 있어 전쟁 지속에 유리하며, 한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할 경우 협상국인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한국은 협상국의 편으로 대전쟁에 참여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황금기인 천금의 시대가 시작된 시기였다. 비록 한국이 대전쟁에 참여하고 칭다오 전투 등에서 협상국과 공동작전을 펼쳤지만 전장의 주무대는 머나먼 유럽이었다. 유럽국가들은 이전에 본 적 없던 규모의 총력전을 치르면서 모든 분야의 물자가 부족해졌고, 이는 유럽의 물자 수요를 폭증시켰다. 이에 한국은 미국, 일본 등과 같이 전장의 포화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채로 유럽국가들에 각종 물자를 수출하며 돈을 쓸어담을 수 있었다. 수출의 증가는 고용을 증가시켰으며 유입된 자본은 산업 발전에 투자되어 각종 공업과 금융업 등이 크게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화정부가 조성해온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경제호황에 힘입어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다.

경제호황에 고무된 서재필 내각은 당장 중추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르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에 따라 1916년에 초대 중추원이 해산되고 제2회 총선이 치러졌다.

2.3.제3차 내각

제3차 서재필 내각
第三次徐載弼内閣
Third Seo Jae'pil Cabinet
1917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제2차 서재필 내각 제1차 이승만 내각
국무집정
국무총리 서재필 (제7대 / 개화당)
선거 제2회 총선 (1917)
여당

3.관련 문서

  • 천금의 시대: 한국의 국가적 황금기로, 한국이 유래가 없던 경제호황과 문화적 부흥을 맞이한 시대다. 서재필 2기 내각이 시작된 1914년부터를 천금의 시대로 본다.
  •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의 최고법으로, 민국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제도를 규정한다. 서재필 내각 시기에 제정되어 임시헌법을 대체하였다.

4.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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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각주

  1.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서재필 총리. 그 오른쪽에 고개를 살짝 돌린 사람이 이승민 부총리
  2. 훈정 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