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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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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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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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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지도자 | 의석 | 비율 | ||||||
이승만 | 174석 | 69.6% | |||||||
여운형 | 27석 | 10.8% | |||||||
조만식 | 20석 | 8% | |||||||
김성수 | 15석 | 6% | |||||||
전진한 | 4석 | 1.6% | |||||||
무소속 | - | 10석 | 4% |
개요
1951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총선. 북한 선거구가 추가되면서 의석 정원이 150석에서 250석으로 100석 늘었다.
선거 전 주요 사건
민주국민당 분당
1949년 ~ 1950년 초, 민주국민당은 셋으로 갈라졌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넓은 스펙트럼의 집단들이 모인 민주국민당에게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1949년, 지주가 주축인 구 한민당계가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탈당, 신 한민당을 창당했다. 1950년 2월에는 전진한을 위시로 한 자유협동주의자들이 이승만 정부의 친기업 정책에 반발해 탈당하여 노농당을 창당했다.
통일전쟁과 통일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 약 8개월만에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남한의 주도로 통일되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이 먼저 침략하였기에 국민들의 반공주의 정서가 심화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사건때부터 좌익에 씌워진 민족반역자 이미지가 좀 더 오래 유지되었다. 또한 통일을 이룩한(?) 이승만의 인기가 크게 올랐고 여당의 지지율도 덩달아 올랐다. 이북에 선거구들이 신설되며 정치적 지형이 크게 변화한 것도 변수로 떠올랐다.
결과
정당 및 대표 | 의석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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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 증감 | ||||||||
이승만 | 174석 69.6% |
111석 27.6% |
여당 | ||||||
여운형 | 27석 10.8% |
12석 0.8% |
야당 | ||||||
조만식 | 20석 8% |
19석 6.3% |
연립여당 | ||||||
김성수 | 15석 6% |
6석 0.0% |
야당 | ||||||
전진한 | 4석 1.6% |
2석 0.3% |
야당 | ||||||
無 | 무소속 | 10석 4% |
49석 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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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국민당: 예상대로 여당인 민주국민당이 단독 개헌선까지 확보해 압승을 거두었다. 전쟁이 막 끝나고 통일이 된 참이라 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와 국가 재건이라는 어젠다가 잘 먹혀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승만은 야당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혹은 야당들을 개무시하고자신의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역시 민주국민당과 비슷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반공과 국가재건 어젠다는 이미 민주국민당이 선점하고 있었고 토지개혁으로 인해 이미 당의 지지기반이 붕괴했던 터라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의석율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 근로인민당: 우파 진영에서 퍼뜨린 '우파=애국, 좌파=매국'이라는 프레임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고 민국당에 크게 밀렸다. 당지도부가 나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함경도에서도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민국당에게 패배했다. 그나마 노동운동이 활발하고 공업이 발달한 주요 항구도시에서 승리해 제1야당의 지위을 유지했다.
- 노농당: 노농당은 반공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동시에 내세우며 우파 노동운동 세력과 중도파를 포섭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석 이상 확보가 목표였던 상황을 고려하면 크게 선전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