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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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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모여라, 한민당의 깃발 아래! 당 강령 중 |
한국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쓴 정당들. 밑의 두 정당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1945년 한국민주당
한국의 보수정당 | ||||
한국국민당 | → | 한국민주당 | → | 민주국민당 |
고려민족당 |
개요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보수정당.
주요 인물로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김병로 등이 있었다.
역사
1945년, 국내파 우익 독립운동 세력과 친일 지주, 자본가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된 보수주의, 반공주의 정당이다. 좌우합작으로 탄생한 건국준비위원회를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민당이 주도하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우익 세력이 여러 정당을 합해 탄생했다.
미군정에 매우 우호적이었고 한민당 인사들은 미군정 고문, 대한민국임시입법위원회 위원 등으로 대거 임용되었다. 한민당은 지속적으로 건준이 공산주의 단체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입법위 위원장이자 미군정 수석고문이었던 이승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중에는 당내에서 찬탁 의견과 반탁의견이 혼재했고 결과적으로는 미군정과의 마찰을 우려해 조건부 찬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때문에 반탁을 외치던 한독당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미소공위는 처음에는 지지하여 대표를 파견했으나 곧 미소공위가 의미가 없다고 판단, 단정 지지로 돌아섰다.
성향
보수정당이었으나 송진우 같은 온건파부터 김성수같은 강경파까지 스펙트럼이 꽤 넓었다. 호남 지주 출신이 많다 보니 농본주의 성향도 있었다. 미군정에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역대 선거 결과
명칭 | 지도자 | 의석수 | 비고 |
---|---|---|---|
임시입법위 선거 | 송진우 | 13 / 6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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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2당 |
1949년 한국민주당
한국의 보수정당 - 자유당계 정당 | ||||
민주국민당 (구 한민당계 탈당파) |
→ | 한국민주당 | → | 자유당 |
개요
1949년에 일부 한민당계가 재창당한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보수주의 성향의 자유당계 정당.
역사
1949년 이승만이 근로인민당 출신 농림부장관 조봉암을 내세워 토지개혁을 추진하자 민국당 내의 일부 한민당계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반발했고 결국 김성수, 장덕수 등이 탈당하여[1] 한민당을 재창당했다. 탈당한 국회의원은 11명이었다.
한민당은 중도좌파 근인당과 연립한 민국당에 불만을 품은 1951년 제2회 총선에서는 15석을 얻어 의석수를 4석 늘렸고 1953년 제2회 대선에서는 수석총무 김성수가 출마하였으나 10%를 득표하여 이승만, 여운형에 이은 3위로 낙선했다. 1954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찬성하였다. 제3회 총선에서는 18석을 얻어 원내 3당으로 도약하였다.
이승만 정부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자 통합야당을 외치는 조만식의 중재를 통해 조선민주당은 물론 그동안 으르렁대왔던 근로인민당, 등과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1957년, 자유당를 창당하며 해산되었다.
성향
1945년 한민당에 비해서 우클릭했다. 반공주의 성향이 짙어졌고 좌익 계열 정당과의 반목이 확대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
국회의원 선거
연도 | 지도자 | 의석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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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장덕수 | 15 / 25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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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4당 |
1956 | 김성수 | 16 / 25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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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3당 |
총통 선거
연도 | 후보 | 득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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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 김성수 | 11 / 1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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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 (3위) |
총통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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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당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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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진우 등은 민국당에 잔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