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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아, 대한의 거리마다 새 아침의 빛이 가득하다. 전차가 질주하고, 전등이 밤을 밝히니, 백성들의 얼굴엔 희망이 넘친다. 배움의 길로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새 시대의 바람이 모든 것을 깨운다. 민국이여, 이 빛나는 길이 너의 영광이 될지어다. 이광수, 「민국 30년」 |
천금의 시대(the Golden Era / 千金時代)는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대전쟁기와 대전쟁 이후에 일어난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과 더불어, 갑신혁명 이래 정부에서 내걸은 표어인 서구화, 근대 시기의 낭만주의 등이 어우러지던 시기로, 당대를 살아가던 한국 대중들 입장에서도 혁명 이래 최고의 호황과 더불어 다양한 예술, 문화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세계대공황이 발생한 1929년까지 약 15년간의 시기를 천금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2.배경
1884년 갑신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개화정부는 급진적인 서구화 및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국가 전반에 걸쳐 30여년간 서구 기술과 제도의 도입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히였다. 또한 제1차와 제2차 극동전쟁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국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해 중국과 러시아를 제압한 결과,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다음가는 준열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기존의 한영동맹에 따라 협상국의 편으로 대전쟁에 참가하였다. 한국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교주만에 대한 공략전에 참가하여 교주만을 점령하는 등 동맹국과 직접적인 충돌을 벌였으나 그 규모는 매우 작았다. 대전쟁의 주전장은 유럽이었고 머나먼 극동에는 그 포화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 덕에 한국은 전장으로부터 헌 발짝 비껴서서 대전쟁의 피해는 입지 않고 대전쟁의 이익만을 취하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3.무역과 산업의 성장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의 경제는 전례없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전쟁으로 촉발된 전쟁특수 덕이면서, 동시에 신흥공업국인 한국의 기초역량이 튼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금의 시대 당시 한국은 경공업, 중공업, 화학공업, 무역업, 유통업, 금융업 등 농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이 골고루 빠르게 성장하였다. 특히 저부가가치 산업인 경공업 위주의 산업경제에서 중화학공업, 금융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 발달하면서 산업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 무역과 교통
천금의 시대의 경제호황은 기본적으로 수출 붐에 의해 촉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 각국은 전쟁을 위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였고 이로 인해 유럽에서의 각종 소비재 생산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더군다가 전쟁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탄약과 의약품 등의 수요량이 급증하였지만, 유럽국가들은 전례없이 엄청난 양의 수요를 감당할 만큼의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과 함께 유럽 시장에 생사, 면포, 포탄, 의약품 등 온갖 종류의 상품을 수출하였다. 이 덕분에 기존에는 매년 약간의 적자를 기록하던 한국의 무역수지는 1914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흑자로 돌아섰다. 또한 유럽의 시장 지배력이 현저히 역해진 틈을 타, 한국의 수출기업들은 남미와 호주 등의 새로운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유럽으로의 전쟁특수무역을 통해 한국이 얻은 것은 비단 무역수지의 흑자 뿐만은 아니었다. 유럽 국가들의 상선이 군에 징발되어 수송선으로 쓰이면서, 한국의 해운사들은 해운 운임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유럽의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자 한국의 상사들은 만주[1]로부터 각종 곡물을 헐값에 수입해 유럽에 되파는 중계무역을 통해 중간에서 큰 이윤을 낼 수 있었다. 또한 수출품을 수송하기 위해 전국의 철도 총연장이 50% 이상 증가했으며 남포항, 군산항, 부산진항 등이 크게 성장했다. 이렇듯 대전기 한국의 대유럽 무역은 한국의 유통업과 해운업 그리고 기반시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한우선, 대동상회, 장통상회, 해평상회 등의 운수, 유통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대기업의 반열에 든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한편 한성-도쿄, 한성-베이징을 잇는 항공편이 처음 등장한 등 항공운송업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기도 했다. 다만 기술적 한계에 의해 화물수송용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상류층의 호화스러운 이동수단 취급을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경공업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그 성장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한국의 경공업 제품들은 성정하는 국내시장과 더불어,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 시장을, 그 이후에는 광란의 20년대를 보내던 미국 시장을 주 고객으로 삼았다. 당시 한국의 경공업 붐을 대표하는 업종은 섬유공업으로, 경성방직 등의 방직산업체들는 국내시장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 국외로 진출하면서 경공업 부흥을 이끌었다. 비교적 적은 자본과 역간의 기술만 있으면 육성이 가능한 분야였기에, 한국의 방직산업은 수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하여 개화기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천금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해외시장으로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당대의 섬유공업 생산량은 전체 공업생산량의 4할을 차지할 정도로 방직산업은 한국 굥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섬유공업의 약진에 힘입어 1915년 한국의 공업생산량은 농업생산량을 추월하였으며, 1918년에는 공업생산량이 농업생산량의 두 배에 달했다. 방직산업으로 축적된 자본과 기술은 다른 삼업의 연쇄적인 성장에도 기여하였다.
한국의 경공업은 비단 섬유, 의류산업 외에도 각종 소비재 분야에서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국내적으로는 새로이 생겨난 중산층이 각종 소비재의 고객이 되었고, 국외적으로는 총력전 체제로 인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소비재 생산량이 하락한 유럽국가들이 한국의 소비재 시장이 되었다. 이 시기의 비누와 치약, 라디오, 화장품 등으로 대표되는 소비재는 한국 국민들의 생활수준 상승과 중산층을 대표하는 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외에도 녹오의 풍부한 목재를 수입해 가구 등으로 가공하는 목제품업, 마찬가지로 녹오의 목재를 수입해 펄프로 가공하고 펄프를 또다시 종이로 가공하는 제지업 등이 천금의 시대에 크게 성장한 대표적인 경공업 업종이다.
• 금속·기계공업
대전쟁은 한국 금속공업과 기계공업이 본격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경제적 계기를 제공했다. 공업 발전의 기초가 되어 '공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제철업은 이 시기 각종 중공업의 성장을 지탱하였다. 공기업인 한국철강이 건설한 관영 포항제철소와 비사제철소 뿐만 아니라 삼화의 삼척제철소, 부경의 원산제철소, 대동의 정주제철소 등이 새로 건설되거나 확장되었다. 이는 각종 중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철강 수요량의 증가, 만주 지방의 철광 개발로 가능해진 값싼 철광석 공급, 철강업 부흥을 위해 입법된 정부의 제철지원법 등의 덕이었다. 또한 세계 전쟁으로 인해 서구 열강의 제조업이 전쟁 물자 생산에 집중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반 기계 수요가 급증했다. 한국은 이 틈을 활용해 농업 기계와 공업 설비의 국산화를 추진하며 기계 부품 제작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농업기계류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농업 기계화와 함께 기계공업의 토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조립 기술과 부품 국산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전쟁 후 한국이 독자적인 제조 역량을 확보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공황이 발생하기까지 한국의 기계공업은 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성장세를 보였다. 금속 가공과 공작 기계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중소규모의 기계 공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 선반[2], 밀링머신 등 공작 기계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제조업 분야의 효율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전체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었다. 또한 1920년대 초중반부터는 계측기 등의 정밀기계의 국내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기계공업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선술한 섬유공업과 제지공업의 성장과 함께 관련 기계를 제작하는 전문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공장 설비의 국산화율이 높아졌다. 또한 발전소 설비와 같은 대형 기계의 제작 기술이 도입되면서 대규모 공업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압록강 수력발전소와 같은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는 한국 기계제조업의 기술 수준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한국산 기계제품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본과 중국, 더 나아가 남미 등의 국외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운송수단 제조업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한 분야 중 하나가 기관(機關), 즉 엔진의 개발과 생산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철도 차량 제조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에서 철도가 부설, 연장되고 화물운송의 수요량도 크게 증가하면서, 각종 기차에 대한 수요량이 폭증했다. 이에 정부는 기차 국산화와 증산을 통한 운송산업의 기술적 자립에 큰 투자를 하였다. 1910년대 후반 한국의 국영철도기업인 한국철도공사는 한국 최초의 완전한 국산 증기기관차를 제작하며 철도 산업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핵심부품인 엔진을 포함한 다양한 철도 관련 부품이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철도를 달리는 기차들은 더욱 발전된 기술력으로 무장하고 화물과 승객을 실어날랐다. 더 빠르고, 더 많이 싣는 기차의 생산과 도입은 철도망의 확장을 떠받쳤고, 이는 경제와 산업을 더욱 활성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하여 유럽의 기존 민간선박과 신규 선박생산이 민수에서 군수로 대거 전환되었고, 이로 인한 유럽의 선박 부족과 이를 파고든 한국 해운회사들의 대규모 사업확장으로 말미암아 선박 수요량이 폭증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여러 기업들이 앞다투어 조선업에 뛰어들거나 조선소를 확장했다. 대표적인 조선소로 거제조선소, 흥남조선소, 해주조선소 등이 확장되었고 이외에도 여러 소규모 조선소가 건립되었다. 엄청난 물량의 배를 수주받아 건조한 한국의 조선회사들은 선진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하게 되었고, 조선기술과 조선용량의 발전은 한국의 건함능력을 제고, 전간기 한국이 외국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신형 중순양함을 건조할 정도의 역량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처음에는 외국에서 완성차를 수입하고 유지·보수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독일, 영국 등에서 수입된 승용차는 극소수 상류층의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개인 차량은 극히 드물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명서 한성과 평양 같은 주요 도시에서는 자동차가 점차 현대적이고 부유한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초기에는 수입된 차량의 수리와 정비를 담당하는 소규모 자동차정비소들이 설립되었고, 이 시설들은 자동차 기술을 익히고 국산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 기업들과 협력하여 국산 자동차 생산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일부 금속 및 기계공장이 자동차 부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조립 공정의 일부가 한국 내에서 이루어졌다. 정부 역시 자동차산업이 나라의 경제와 국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기술 교육과 연구를 지원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기술과 인프라, 그리고 시장구매력의 부족 등 여러 한계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당대의 자동차산업은 자동차 정비와 부품 생산 그리고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차량이나 군용 수송트럭 등의 제한적인 생산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금의 시대 동안 이루어진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한국이 장차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이 되는 발판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항공기 제조업도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한국의 항공기는 초기에는 군부에 의해 군사용으로 얀구되고 개발됐으나 곧 민간의 영역으로도 넘어오기 시작했다. 1927년에는 관민이 공동출자하여 한국의 첫 항공가 제조회사인 한국항공기제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당시 한국 최대의 화학공장이었던 흥남질소비료공장 |
경공업와 중공업의 부흥은 동력과 원료를 제공해 이를 뒷받침하는 전력공업과 화학공업의 성장을 불러왔다. 당대의 전력공업은 한국전력공사 등의 국영기업 위주로, 화학공업은 여러 민영기업 위주로 발전하였다.
공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대도시의 성장은 전력 수요량의 전국적인 급증을 불러왔다. 이에 정부는 전력공급책을 강구하였고, 중앙정부부처인 상공성 산하에 전력국과 한국전력공사를 설치해 전력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한국전력공사는 산과 강이 많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수력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압록강, 낙동강, 대동강 등 전국의 강에 보와 수력발전소를 설치하였다[3]. 한편 만주 지역으로부터 석탄을 수입하고 국내 무연탄광을 개발해 화력발전으로도 상당한 양의 전력을 생산하였다. 1917년 건설된 마포화력발전소를 시작으로, 1929년까지 전국에 17개소의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산업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초기에는 발전기계의 핵심부품이 대부분 외국산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산둥수의 핵심부품이 국산개발에 상공하면서 국내산 제품을 쓰게 되어 전력발전에서의 기술자립에도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되었다.
화학공업은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서 각종 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농업에 비료를, 제철업에 코크스를, 소비재산업에 초자(유리)를, 기계공업에 카바이드를, 식료품업에 설탕을, 건설업에 시멘트를, 제약업에 무수주정을 공급한다. 기존에는 대부분의 화학공업제품이 외국, 특히 유럽에서 수입되었지만 유럽이 대전쟁의 전화에 휩싸인 사이에 한국의 자본가들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화학공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가 국내에 풍부하게 매장되어있었기에 시멘트 공업이 빠르게 발전했다. 이는 근대적 건축물의 주요 건설자재인 시멘트의 안정적 공급과 가격 하락을 가져와 도시의 성장과 마천루의 건설을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외에도 비료공장, 제당공장, 유리공장 등 각종 화학공업공장이 전국 빠르게 증설되었다. 화학공업으로 흥한 기업으로는 제약회사인 동화약품, 화장품회사로 시작한 두산, 자기제조업에서 유리공업 등으로 확장한 최장수기업 삼천리 등이 있다.
천일은행 본사 |
각종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유럽의 전쟁특수에 의한 엄청난 무역흑자는 국내의 자본 총량을 폭등시켰다. 이에 따라 그 자금을 관리하는 금융업도 크게 성장했다. 당대 3대 은행이었던 한성은행, 천일은행, 대동은행의 예치금은 1913년 대비 1915년에는 세 배, 1918년에는 다섯 배까지 불어났고 시중은행의 수도 늘어났다. 거기에다 전쟁으로 길잃은 유럽의 민간자본까지 안정적인 한국으로 유입외면서 한국의 자본시장은 활황을 맞이하였다. 은행들은 불어난 예치금으로 각종 산업에 투융자를 제공하였고 이는 산업 발전을 촉진했다. 한편 주식시장 역시 경제호황을 타고 훨훨 날아올랐다. 얼마나 주식시장이 불타올랐는디 "불보다 뜨거운 것은 제철소의 쇳물이요, 쇳물보다 뜨거운 것은 신청년의 사랑이요, 신청년의 사랑보다 뜨거운 것이 한성주식거래소이다"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 여가산업
천금의 시대 동안의 여가산업의 발달은 무엇보다 도시화와 중산층 증가에 기인했다. 전간기 동안 한성, 평양, 동래 같은 대도시들이 근대적 인프라를 갖추며 성장하자,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등장한 중산층은 여가와 오락을 통해 현대적 여가를 즐기고자 했다. 이들은 주로 극장, 다방, 영화관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여가시설을 이용했는데, 이는 당시 도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극장에서는 전통적인 판소리나 창극뿐만 아니라 서구식 연극과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도시 시민들은 이러한 새로운 예술을 통해 여가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여가산업의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영화관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카페와 다방은 당대 여가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서양식 카페는 단순히 커피와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사교와 담론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며, 문학과 음악 등 예술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4] 체육과 스포츠 역시 여가산업의 주요 부분으로 성장했다. 1920년대 이후 축구 등과 같은 서양 스포츠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스포츠 관람과 참여가 여가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음악과 무용 같은 예술적 여가 활동도 대중화되었다. 전통적인 국악과 서양식 클래식 음악이 함께 공연되며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충족시켰다.
1920년대의 동래 송도해수욕장 |
바람 쐴 겸 와우도에 다녀왔네. 생각하건대, 그 해수욕장은 참으로 신기한 풍경이더군. 인파란 인파는 모두 이곳에 몰려들었는지, 남녀노소가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었다네. 하얀 모래 위로는 파라솔들이 들쑥날쑥 펼쳐져 있고, 웃음소리와 바닷물 소리가 뒤섞이며 그야말로 소란한 축제 같았지. (후략) 김동인, 친우에게 보낸 편지 중 |
경제발전과 함께 성장한 여가산업의 또다른 예시로는 여행산업이 있다. 철도, 전차, 해운과 같은 교통망이 확충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여행이 더 이상 소수 상류층의 특권이 아닌 중산층 대중의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성에서 출발해 의주, 동래, 목포, 원산 등 주요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 확장되었으며, 이러한 교통망은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관광지를 대중에게 접근 가능하게 했다. 동래온천, 온양온천 등의 온천관광지와 와우도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 경포해수욕장 등의 해변 해수욕장 그리고 관동팔경 등의 전통적 명소 등이 관광지로 개발되었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업과 요식업, 유흥업도 덩달아 발전하였다. 특히 산업화가 크게 진행되지 못했던 강원지역은 풍부한 관광자원 덕에 관광산업이 발달하여 타지역과의 격차를 좁힐 기회가 되었다.
4.의회정치의 안착
선거제 개혁으로 참정권 확대
5.사회의 변화
민권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연의 권리로, 누구도 이를 침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은 권리를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권리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다. 고로 민권의 창달은 단지 법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스스로의 존엄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된다. 안중근, 1928년 평양민국대학교 강의 중 |
서구적 가치관은 한국에서 19세기 말 갑신혁명과 민국창건, 개화정부의 급진적 개화정책 등을 거치며 점차 유입되기 시작했지만, 천금의 시대 동안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교류 확대와 경제와 전반의 변화와 맞물려 발생했으며, 전텅적인 유교적 가치관과는 차이가 있는 새로운 사회적 인식을 형성했다. 이러한 가치관의 확산은 민주주의, 개인주의, 평등사상, 여성의 권리, 과학적 사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와 의회정치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참정권 확대화 대중의 정치참여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천금의 시대동안 한국이 의회정치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신여성'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계층을 만들어냈고, 자유로운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여성 권리 증진과 여성 참정권 운동이 전개됐다.[5]
과학적 사고방식과 실증주의의 확산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였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해 사회적, 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려 했으나, 서구적 과학기술과 이론이 유입되면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핟문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산업화와 경제 정책에서도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서구적 가치관의 확산의 반대급부로, 기존의 유교적 질서는 힘이 크게 꺾였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공공연히 유교를 폄하하였고, 이승만 등 일부 기독교도 출신 정치인들은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 윤리를 토대로 한 서구적 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도시에서 서구 사상의 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도시 지역에서는 기존의 유교적 질서가 붕괴하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골 지역에서는 옛 유교적 질서가 상당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도시의 자유주의적 신질서와 농촌의 잔통적 구질서 사이의 충돌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 중산층의 증가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 사회는 전통적인 농민-양반 계층 구조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적 계층, 즉 중산층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중산층의 형성은 주로 산업화와 경제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한국 경제가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기술자, 공장관리자,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 등과 같은 새로운 직업군이 나타났다. 특히 기계공업, 조선업, 철도산업 등 공업의 성장과 함께 기술직과 전문직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노동자 계층과는 구별되는 중산층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했다. 또한 금융업과 무역업의 발달로 인해 은행원, 회계사, 무역상과 같은 상업 분야의 전문직도 크게 증가했다.
교육의 확산 역시 중산층 형성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며 중등 및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이전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직업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술학교나 전문학교에서 기계공학, 농업, 상업 등을 배운 졸업생들은 공공기관, 기업체, 학교 등에서 근무하며 전문성을 가진 새로운 계층으로 성장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여성 교육도 활성화되어 여교사, 간호사, 은행원 등 여성 중산층 직업군이 등장했다.
도시화는 중산층의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간기 동안 한성, 평양, 동래와 같은 도시들이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중산층이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생활 방식이 나타났는데, 중산층 가정은 근대적 주택에서 생활하며 전기, 수도, 가구 등 당대의 기준으로는 혁신적인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했다. 이들은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현대적인 문화와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카페나 극장 같은 장소에서 여가를 즐기는 등 새로운 소비 문화를 주도했다.
전국적으로 기술학교와 전문학교가 설립된 것은 산업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국은 철도, 조선, 전력, 기계공업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에 필요한 전문 기술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업학교를 확충했다. 예를 들어, 평양과 한성에는 여러 대규모 기술학교가 설립되어 기계공학, 전기공학, 화학공학 등을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은 전국의 공장과 발전소, 공공기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농업학교 역시 농업의 현대화와 농촌의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선진적 농업기술을 교육했다. 이러한 교육기관은 당시 한국이 자립적 산업국가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문교육 외에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교육 역시 강화되었다.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소학교와 중학교의 수가 급증했고, 이는 전체 문해율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청소년기 의무교육은 민족성을 확립하고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또한 교육의 정점이라고 할 수 았는 고등교육기관의 설립도 두드러진다. 1897년 한성민국대학교가 개교한 이후로 전국에 6개의 민국대학교가 추가로 개교하였고, 이는 한국 고등교육의 기초를 이루었다. 대학교에서 배출된 고학력의 졸업자들은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인텔리 계층이 되었고, 장래에 한국을 이끄는 사회지도층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국비유학생 선발을 텅해 매년 100명 이상의 학생이 서구 대학에서 유학하였고, 이들은 발전된 서구 학문을 한국에 들여오게 된다.
남녀 모두 교육기회 확대의 혜택을 입었지만, 일부 교육 내용은 성별에 따라 달랐다. 남학생은 주로 수학, 과학, 공업기술과 같은 근대적이고 실용적인 과목을 중심으로 배우며 산업화의 기술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재로 양성되었다. 반면 여성교육은 초기에는 주로 가사나 가정과 같은 전통적 여성 역할을 강화하는 과목이 중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은 간호, 교직, 회계 같은 직업적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며 근대적 직업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금년 본국 인구는 삼천만에 이르러, 이는 25년 전보다 배가 된 수치입니다. 현 추세를 유지할 경우, 금후 40년 내로 인구는 억 단위에 달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인구의 급증은 노동력 확보와 같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여지가 있으나, 말튜스의 논지[6]에 의거하면 극심한 식량 부족과 같은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미리 대책을 강구함이 요할 줄 보고드립니다. 기획처 월례보고서, 1918년 12월 |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했다. 1910년에 2200만명이었던 한국 인구는 연쳥균 약 3.3%의 성장률을 보이며 20년이 지난 1930년에는 그 두 배에 가까운 4200만 명에 육박해 있었다.[7][8] 수도 한성의 인구는 1910년 40만 명에서 1930년에는 107만 명까지 치솟았다. 이는 근대적 의료기술과 공중보건 체계의 도입, 농업생산성 향상, 도시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의료기술과 공중보건의 발전은 인구증가의 핵심 원인이었다. 서구적 의학과 위생개념이 도입되면서 전염병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졌고, 유아 사망률은 크게 감소했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근대적 병원을 설립하고 의학 교육을 통해 의료 인력을 양성했다. 이와 함께 백신 접종과 상하수도 건설, 위생 캠페인 등이 대중화되며 콜레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의 확산이 억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전통적으로 높은 유아 사망률과 감염병으로 인해 낮았던 인구 증가율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경제성장을 통한 생활수준의 향상과 각종 캠페인을 통한 식습관의 개선 등 역시 인구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인구의 전반적인 증가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건강과 영양상태 역시 개선됐다. 신기술을 도입한 식량 증산과 국제무역을 통한 식량 수입의 증가로 식량의 수급이 안정화되었고, 곡식 위주의 전통적 식단이 각종 반찬들을 포함한 균형잡힌 식단으로 변화하면서 단백질과 비타민, 지방 등의 섭취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 덕분에 구루병과 야맹증 등 영양결핍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들의 발병률이 크게 감소했다. 또한 정부 주도의 소학교 급식제도가 도입되고[9] 이것이 전국의 소학교에서 시행되었다. 각 학교에 영양사가 파견되어 정부의 지침에 따른 맛은 보장하지 못해도 영양학적으로 균형잡힌 급식을 학생들에게 제공했고, 성장기 어린이에게 필요한 칼슘과 단백질 등의 영양소 공급이 원할해지면서 청소년들의 영양과 발육상태가 큰 폭으로 개선되었다.
한국의 도시 증가는 산업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공업화의 촉매제가 되었고, 전간기 동안 철강, 기계공업, 조선업 등의 주요 산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다. 한성, 평양, 동래, 인천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는 공업과 상업의 허브로 성장했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교통망과 통신망이 확충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산업도시와 무역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광업과 중공업 중심의 흥남, 울산, 송림, 포항과 같은 도시들과 무역으로 흥한 목포, 남포, 군산,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대전 등이 그 예이다. 이외에도 나주, 대구, 의주, 함흥 등의 전통적 지역중심지들도 공업도시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의 과잉 인구를 흡수하며 노동력을 제공받았고, 이는 도시로의 인구 이동을 가속화했다.
도시의 확장과 성장은 시 정부와 부 정부가 주도한 인프라 정비사업의 증가를 불러왔다. 전통적으로 궁궐과 관청 주변에 형성된 도시들은 공업화와 교통의 발전에 따라 그 중심이 철도역 인근 등으로 이동하거나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한성은 철도와 전차망이 확충되며 중심지가 옛 한양도성 내에서 용산 등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근대적 주택과 초보적 형태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공시설과 상업시설이 확충되며 도시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6.문화의 부흥
돈이 있는 곳에 문화가 있다. |
천금의 시대는 1884년 갑신혁명부터 이어진 정부의 서구화 정책이 절정에 달한 한편, 대중문화 및 예술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당대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안정성과 자유도가 높았던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은 이러한 풍조에 불을 지른 격이 되었는데, 한편으론 과도기적 시대의 특징상 일부 측면에선 한국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문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후대에서 "천금풍"으로 불리는 예술풍조가 자리잡는데에도 영향을 줬다.
• 영상매체
영화, 애니
1920년대는 한국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화 제작사로는 한성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동아영화사 등이 설립되어 국산 영화 제작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들 제작사는 초기에는 일본, 독일, 미국에서 도입한 기술과 장비를 사용했지만, 점차 한국 자체의 제작 기술을 발전시키며 독립적인 영화 산업을 구축했다. 특히 1922년에 개봉한 나운규의 <아리랑>은 대흥행에 성공하며 영화산업의 폭발적 성장의 신호탄이 됐다.[10] 영화 상영 공간인 영화관도 이 시기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896년 인천에 설립된 최초의 영화관인 협률사를 시작으로 1914년에는 전국의 극장이 7개관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천금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수가 폭증, 1929년에는 전국에 총 22개 관의 영화관이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개꿈>[11]과 같은 초보적인 수준의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 시작했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 인쇄매체
라디오, 신문, 만화
제지기술의 발달과 상술한 제지업의 부흥으로 종이값이 하락하면서 신문과 서적 등의 인쇄매체가 널리 보급되었다. 신문사는 1910년 17개사에서 1920년 66개 사로 10년 사이에 4배 가까이 증가하였으며 신문 인쇄부수는 같은 기간동안 세 배 증가하였다. 신문의 확산은 정보 전달의 전국화와 소시민의 정치참여 증가에 기여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황색언론의 출현으로 가짜뉴스와 자극적 기사의 범람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엔 현재까지도 한국 최대의 출판사인 익문사 등 여러 대형출판사가 출현했우며 각종 서적 출판량도 수 배 증가하였다. 각종 전문서적과 기술서적의 발행 증가는 지식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며 외국의 문학과 철학, 사상서에 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시기다.[12]
• 음악
• 식문화
도시 지역에서는 기존의 전통 한식뿐만 아니라 서구적 요리법과 식재료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여러 대도시에는 서양식당이 들어서면서, 상류층과 중산층은 다양한 서구식 요리를 접할 수 있었다. 스테이크, 파스타, 샌드위치와 같은 서양 요리와 커피 등의 서양 음료, 와인, 위스키, 맥주 등 서양 주류가 일부 도시민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이런 서구식 식사는 세련되고 근대적인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당시 여러 백화점에 입점함 수많은 고급 레스토랑은 "멋진 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였다. 양식 뿐만 어니라 전통 한식 역시 고급화되어 상류층의 눈길을 끌었다. 고급 평양냉면 판매로 프리미엄화에 성공하여 전국에 지점을 낸 옥류관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편 아이스크림이나 케익과 같은 서구식 디저트 역시 한국에 유입되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의 교주만 공략전 당시 한국군의 포로가 되었던 독일 요리사들이 한국인 요리사들에게 몇 가지 디저트 요리법을 알려주면서 덕국병(바움쿠헨) 등 서양 디저트의 유입이 더욱 빨라졌다.[13] 다만 이러한 디저트들은 높은 가격으로 인해 즐길 수 있는 계층이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식단의 변화가 부유층만의 일은 아니었다. 만주산 밀가루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대중화되었고, 이를 사용해 만드는 다양한 밀가루음식은 도시의 상점과 식당에서 인기있는 메뉴로 자리잡았다. 상대적으로 싼 가격의 이러한 음식들은 도시노동자들도 약간의 돈을 보태면 사먹을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었다. 또한 길거리의 포장마차[14]에서는 호떡, 찐빵, 풀빵 등과 같은 간편 음식이 싼 값에 판매되어 가난한 노동자와 배고픈 학생들에게 간식이나 간단한 한끼로 인기를 끌었다. 한편 학교에서는 급식제도가 도입되면서 학생들은 영양학적으로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힌 식사를 무상이나 초저가로 제공받았다.[15] 군대의 경우, 장교와 교병들이 먹는 병영식 역시 영양학적으로 개선되어 일반 병사들에게도 이틀에 한 번 꼴로 고기반찬이나 고기국이 제공되었으며, 일본에서 들여온 카레라이스 등이 해군 병영식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물론 전투식량은 그때도 맛없었다.
한편 당대 농촌의 식문화는 도시와 뚜렷이 구분되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한식 기반의 식단이 유지되었다. 쌀, 보리, 조와 같은 곡류를 주식으로 하고 김치, 된장, 고추장 등 발효 음식을 곁들인 단순한 식단이 일반적이었다. 계절에 따라 나물과 산나물을 활용한 반찬이 식탁을 채웠으며, 육류 소비는 비교적 드물었다. 하지만 농촌진흥정책 등의 효과로 농민의 삶이 이전보다는 다소 개선되면서 농촌 주민들의 식단도 과거에 비해 더 나아졌다. 또 제한적으로나마 도시로 이주한 가족에 의해 농촌에 서양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한강변[16]에서 우리 대학 여자배구부가 연습경기를 열었는데 인근 학교 남학생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더군. 왜일까? 백남운 당시 한성민국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 |
근대적 스포츠의 도입은 학교 교육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축구는 서구식 교육과정을 채택한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체육과목의 종목 중 하나로 선정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17] 이외에도 피구, 배구 등의 간단한 구기종목들이 정규 교육과정에 편입되었다.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일부 사립학교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농구, 야구, 펜싱 등의 종목이,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배드민턴, 테니스, 비치발리볼 등의 종목이 확산되었으나 대중화되는 수준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1921년부터는 매년 전국 각지의 민국대학교의 축구대표팀 간의 축구 토너먼트(전국대학교축구대항전)가 개최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으며, 이와 함께 대학교별 학생응원단도 생겨났다.[18]
정부 역시 체육의 발전을 위해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공립 종합운동장이 건설되었고 매년 중앙정부의 대한체육회 주도 하에 전국체전이 개최되었다. 뿐만아니라 정부는 1917년 대한세계체전위원회[19]를 설립하고 한국 체육인들의 국제무대로의 데뷔를 후원했다. 한국의 올림픽국가대표팀은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이후 모든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국제대회 경험은 스포츠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여러 기업들은 광고효과를 노리고 여러 스포츠구단을 인수하거나 후원하였고, 이를 통해 유입된 자본 덕에 전문 운동선수와 프로 스포츠단, 스포츠 산업이 태동하였다.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인의 의복은 크게 변화했다.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불리게 만든, 흰 색으로 염색한 한복은 점차 사라지고, 서양식 의복과 장복[20]이라 불리는 개량된 한복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남성복에서는 한복과 서구식 정장의 조화가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났다. 도시의 중산층 남성들은 주로 정장과 모자를 착용하며 근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추구했으며, 관공서와 회사에서는 양복이 필수 복장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개량한복이나 셔츠와 함께 빵모자(플랫캡)를 쓰는 문화도 생겼다. 또한 상황에 따라 한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거나 둘을 혼합해 착용하기도 하였다. 남성용 개량한복의 경우, 과도하게 넓었던 소매가 좁아지는 등이 변화가 생겼다. 한편 여전히 잔통적 문화가 상당히 남아있던 농촌에서는 한복을 변형해 실용성을 높인 작업복 스타일이 등장하며 의복의 기능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독특한 패션 감각을 지녔더군, 특히 젊은 여자들이 말일세. (중략) 상당히 도발적인 패션이지 않은가? 이곳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네. 윌리엄 V. 프레트[21],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
여성 의복은 전통 한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개량이 이루어져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했다. 치마 길이는 크게 짧아지고 간소화된 저고리는 몸에 더 밀착되며 실루엣이 강조되는 디자인이 유행했다. 이는 여성의 활동성을 높이는 실용적 변화로도 설명되었으나, 동시에 현대적 미와 여성적 매력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여성상이 아닌 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한편, 서구적 패션 요소도 여성복에 점차 영향을 미쳤다.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블라우스나 치마, 모자와 같은 아이템이 인기를 끌었다. 저고리와 치마에 레이스나 새틴과 같은 서양식 장식이 더해지거나, 양말과 하이힐 같은 서구적 아이템을 한복과 함께 혼용하는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한편 1910년대 초에 자리잡은 교복제도도 천금의 시대를 거치며 발전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한복 양식이었던 교복은 지역 혹은 학교마다 상이하게 사용되다가 1919년 중앙정부의 주도로 전국 단일 교복이 제정되었다. 이 때 해군의 로비로 수병의 제복인 세일러복이 교복으로 채택되었다.[22] 이후 1921년에 남학생 교복이 스목+장복바지 조합의 불학복(佛學裝)[23]으로 변경되었다.[24] 학모의 경우 남학생 학모는 제정과 폐지를 반복하다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여학생 학모는 제정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대학교는 각 학교가 자겨의 교복을 자율적으로 제정할 수 있었기에 각 대학교는 각자의 특성을 살린 교복을 제정했는데, 보통 교모+블레이저+망토(...) 조합을 따랐다.
문학이란 게 참 묘하지 않습니까?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낭만이니 현실이니, 온갖 사조의 이름이 머릿속을 가로지르더군요. 어떤 이들은 사랑을 찬미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을 절규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 모두가 인간의 안간힘으로 보입니다. 삶을 붙잡으려는 낙관주의의 손길이나, 그 삶의 부조리를 까발리려는 신경향파의 손길이나 결국은 하나의 몸짓이지 않겠습니까. 그 틈에서 나는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는 그렇게 쓰고자 하는지 홀로 묻고 있습니다. 사영[25], 당신의 붓끝이 그리는 선처럼 나도 내 글로 세상의 선을 그릴 수 있을까요?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상이 구본웅에게 쓴 편지 중 일부. 당대 문학의 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당대 한국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사조는 낭만주의와 낙관주의적 경향을 따르는 이른바 국민문학이었다. 이러한 문학적 경향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근대적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이 사조를 따른 주요 문인으로는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이상화, 김억 등이 있다. 특히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자 국가발전에 대한 열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정》을 완성하여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이끌었으며, 김동인은 100년 후의 유토피아적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아름다운 나라》를 집필해 한국의 첫 SF소설을 만들어냈다. 당대 낙관주의 문학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은근히 민족주의적, 애국주의적 뉘앙스가 작품에 내포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낙관주의가, 빛나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민국은 지나(중국)[26]나 아프리카 등과 달리 문명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는 사회진화론적 우월감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작품들도 대거 등장했다.
경제적 호황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 작품들은 경제적 번영 속에서 풍요로움과 자유를 탐구했으며 인간의 욕망과 관계를 과감히 다루는 경향도 나타났다. 도시 중산층의 형성과 소비문화의 확산은 인간의 사랑과 자유연애, 원초적 욕망 등을 다루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다룬 대표적인 문예동인지로는 자유주의, 낭만주의 성향의 잡지 《폐허》가 있으며, 염상섭, 변영태[27], 김일엽 등이 해당 잡지에 시와 소설 등을 연재하였다. 다만 이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퇴폐적이고 저급하며 사회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당시 비주류 문학이었던 신경향파 문학은 낙관주의, 퇴폐주의 문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도시 빈곤층의 고통과 개화 및 산업화의 부작용을 묘사하며,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비판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작품은 도시 빈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산업화 이면의 어두운 현실을 조명했다. 신경향파 문인 중 최서해, 한설야 등 일부는 사회주의 문인으로 변신해, 프로문학[28] 단체인 카프를 조직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문학은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각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계급적 갈등과 약자의 연대를 강조했지만, 이는 1920년대 문학계에서 비주류, 소규모의 흐름으로 남았다.[29]
• 천금풍
천금풍은 천금의 시대 당대의 문화나 그를 다루는 이후 시대의 대중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금풍을 따르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낭만주의, 퇴폐주의적인 경향을 띄며 동시에 전통문화와 서구문화, 전통사상과 개화사상, 구질서와 신질서가 뒤섞인, 조금은 혼란하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쳔금풍의 하위 장르로는 로맨스물, 전쟁물, 첩보물, 대체역사물 등이 있어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주제로 다뤄진다.
7.외부로의 진출
• 서구 열강과의 관계
• 북방으로의 진출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은 계속해서 북방, 즉 만주로 진출하였다. 물론 당시 한국정부는 한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자 이른바 한국의 '꿀단지'라고 불리던 중국과의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무력이나 여타 수단을 동원해서 물리적 국경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북방 진출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민주는 한국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만주에는 엄청난 양의 철과 석탄, 목재 등의 천연자원이 있었고, 대부분은 채굴되거나 채벌되지 않은 상태였다. 식량생산량 역시 매우 많았는데, 1920켠대 전세계 콩 생산량의 60%가 만주에서 산출되었을 정도였다. 1920년대 한국은 인구의 폭증으로 인해 식량의 수요를 국내 농업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만주로부터 곡식을 수입할 정도로 식량 부분에 있어서 만주는 한국에게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한국정부는 만주를,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있던 중국과 새로이 건국된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토록 중요한 만주에 한국인들이 진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민주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한일 공동으로 설립한 만주산업개발주식회사(만산)였다. 제 2차 극동전쟁으로 러시아를 격파한 한국과 일본은 만주 지역에 대한 철도부설권과 산업개발권을 공동으로 취득하였고, 이를 집행하기 위해 양국이 5대 5로 출자하여 만주산업개발주식회사, 약칭 만산이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다만 만산은 한일 양국이 동일한 비율로 출자했으나 만주와 물리적으로 맞닿아있는 한국이 만주 개발사업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30] 만산 다음으로는 한국의 민간기업들이 만주로 진출했다. 특히 여러 상회들이 만주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는데, 이들 상회는 만주의 봉천, 길림, 합이빈 등에 지사를 두고는 콩과 잡곡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산 공산품을 수입해 만주 시장에 판매하였다.
• 중일과의 줄다리기
한국은 즁국의 지방군벌인 봉천군벌[31]과 시종일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과 봉천군벌의 협력이 양측 모두에게 이로운 상부상조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만주의 봉천군벌로부터 각종 식량과 천연자원을 싼값에 수입해 한국의 성장하는 공업을 뒷받침할 수 있었고, 각종 무기를 판매해 대전쟁 이후에 침체될 위기에 빠진 군수산업이 버틸 수 있게 도왔으며, 봉천군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만주에서의 한국의 이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봉천군벌은 한국에 식량과 자원을 수출함으로써 군비와 경제개발자금을 충당할 수 있었으며 한국으로부터 각종 무기를 구매해 군대를 무장시킬 수 있었다.
만주 지역의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32] 한국과 봉천군벌은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밀월을 이어나갔고, 1925년에는 양강지역에서 항한운동을 하다 봉천군벌의 영역으로 도망친 한족 민족주의자들을 봉천군벌이 체포해 한국에 포상금을 받고 인계한다는 내용의 우백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이 언제나 봉천군벌은 지원하는 건 아니었으니, 장쭤린이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에 취임하고 중국 대륙 전역을 장악할 것만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한국이 무기 판매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는 봉천군벌이 중국을 통일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33] 하지만 이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북벌로 봉천군벌을 격파하여 봉천군벌이 양부천봉을 단행하자 한국은 봉천군벌을 다시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일본과 함께 국민혁명군을 저지하려 시도했다. 이후 장쭤린이 사망하자 한국은 장쉐량의 봉천군벌 승계를 지지하며 봉천군벌과의 우호관걔를 이어나갔다.
한편 한국의 전반적인 대중국정책을 분열과 완충지대 확보였다. 이로 인해 위안스카이의 홍한제제가 붕괴한 후 중국에서 대군벌시대가 개막하자 한국은 호재를 불렀다. 하지만 이후 광둥의 중국국민당이 국민혁명군으로 두 차례의 북벌을 선포해 북진하며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거나 복속시키자 한국은 국민혁명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산동과 지난에 직접 병력을 파견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외교적 수단만을 사용했지만, 어찌되었건 한국은 국민혁명군의 북상을 방해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통일이 외관상으로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중국 대부분의 지역이 깃발만 국민당의 그것으로 바꿔 단 군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한국정부는 입장을 바꿔 중국국민당의 국민정부을 중국 정부로 승인하는 한편 여러 군벌들과 접촉하며 국민정부 내부의 취약점을 탐색하였다. 국민정부 역시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첩보전 등을 통해 한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려고 하얐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의 주요 무역파트너였고, 무엇보다 군사력 면에서 한국이 더 우위에 있었기에,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는 못했다.
8.황금의 그림자
천금의 시대가 한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황금기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황금의 찬란한 빛이 닿지 못하는 어두운 그림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도시와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업과 농촌은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노동자는 분명히 힘든 일자리였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다. 이로 인해 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고 농촌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하락했다. 이런 이촌향도 현상은 식량문제와 도시빈민문제를 야기했으며, 식량문제는 급격한 통화량 증가와 더불어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본 총판은 현재 식량 가격의 지속적 상승과 이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 경제 전반의 불안정을 심각히 우려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을 중추원에 상정하고자 합니다. 식량 가격의 등귀는 비단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비 상승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는 임금 인상 압력을 초래하여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경공업에 막대한 부담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전반에 물가상승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농촌 생산성의 정체로 인한 양곡 부족 현상이 지속된다면, 도시노동자의 역도시화 현상마저 초래될 위험이 있는바, 이는 공업화를 국가발전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정부 정책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문제라 할 것입니다. 이에 농림성은 정부가 양곡을 직접 수매하여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양곡가를 조절하고, 동시에 농촌에 대한 생산성 증대를 위한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관개시설 확충, 현대적 농기계 보급, 농업기술 교육 강화 등을 통해 농촌 생산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오니, 추가경정예산안의 신속한 편성과 승인으로 민생안정과 민국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농림성총판 ○○○, 중추원 보고 |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농촌의 청년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정부가 야심차게 밀어붙이던 식량 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더군다나 국가 전체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식량 생산량에 비해 그 식량을 필요로 하는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전반적인 식량 가격은 상승세를 그렸다. 이는 전체 소득에서 식료품 소비비의 비중이 높은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식량부족과 식량가격의 상승은 정부 당국과 경제계에게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식량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들의 생활비가 상승해 임금 증가 압력이 생기고, 이는 값싼 노동룍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타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또한 식량가격의 상승과 이에 따른 임금의 상승은 사회 전반에 걸친 인플레이션을 촉발해 정부의 경제관리에도 큰 어려움을 줄 것이었다. 게다가 심한 경우 농민 소득과 도시노동자의 소득역전이 발생해 도시노동자가 농촌으로 돌아가는 역도시화 현상까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공업국가화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에게 있어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한편 정치인들에게 있어서도 식량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민중의 생활비 압박은 자신들의 표에 직결되는 사안이었기에 정치인들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에 자본을 투입하여 '산미증식계획'이라는 이름의 영농개혁에 착수했다. 농회, 산업조합, 산림회, 금융조합 등을 통합하여 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만들고 그 산하에 농협은행을 설립해 농민들에게 저금리로 대출을 제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국내 기계공업계와 화학공업계로부터 각종 영농기계와 화학비료를 도입하여 농업의 효율성을 제고, 식량증산을 이룩하는 것이 정부 정책의 골자였다. 또한 양곡관리법을 제정, 국가가 적정가격으로 양곡을 수매해 저가로 도시 시민들에게 공급하였다.[34] 정부 정책의 결과로 전반적인 식량 생산은 증가하였다. 호남과 해서, 관서 지방 등 비옥한 토지를 가진 지역에서는 농업이 노동집약적 영농에서 자본집약적 영농으로 전환되고 근대적 부농이 탄생하였다. 또한 도시 지역에서는 양곡가격이 하락하면서 전반적인 식량가격도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제한된 경작지 면적에 비해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기에, 식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이 곡창지대인 만주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봉천군벌과 협력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본 의원은 중추원 빈민가조사위원회의 임무로 한성 남대문 바깥 빈민촌을 조사하였으며, 그 참상은 참으로 기록하기조차 부끄러운 바입니다. 주민들은 판잣집에 몰려 거주하며, 비가 오면 지붕은 새고, 배수시설이 없어 진흙탕 속에서 생활합니다. 위생상태는 더욱 심각하여 상하수도 시설이 전무하며, 하천은 오물로 뒤덮여 있고, 전염병이 만연하여 아이들은 여전히 비위생과 병마 속에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치안이 극도로 열악하여 절도, 폭력 사건이 빈발하고 있으니, 이는 단지 빈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와 중추원의 문제라 할 것입니다. 본 의원은 즉시 주거환경 개선과 공중위생시설 확충을 위한 정부 차원의 긴급대책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중추원의원 겸 빈민가조사위원회 의정 손정도, 1927년 9월 16일 중추원 보고 |
도시 빈민의 주거 문제는 당시 도시화의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였다. 한성, 평양, 동래와 같은 대도시에는 급격히 증가한 인구를 수용할 적절한 양과 질의 주택이 부족했으며, 이에 따라 빈민들은 판잣집이 즐비한 달동네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임시 주거지는 제대로 된 건축 자재 없이 조립된 경우가 많아 안전성이 크게 떨어졌고, 화재와 붕괴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또한, 공간이 협소하고 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다세대 가족이 밀집해 생활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주거 문제는 도시 빈민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주거 환경의 열악함은 도시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대부분의 빈민지역은 상하수도 시설이 부족하거나 전혀 없는 상태였으며, 쓰레기와 오물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는 하천 오염과 전염병 확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판자촌에서는 특히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질병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위생설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도시 빈민들은 이러한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열악한 주거환경은 치안문제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빈민가에서는 절도, 폭력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공권력의 개입도 제한적이었다. 경찰력이 빈약한 상황에서 이러한 지역에 종종 법의 사각지대가 생겨 우범지대가 되었다. 우범지대의 출현은 도시 전체의 치안에 악영향을 주었다.
정부도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단기대책과 장기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였다. 정부의 단기대책으로는 위생시설 설치와 경찰력 추가 배치가 있다. 정부는 각 지방정부를 지원해 빈민촌에 간이 변소와 샤워장을 설치하고 급수차를 파견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빈민가에 기존보다 더 많은 경찰인원을 배치해 빈민가의 치안 문제를 누그려트리려 하였다. 이 덕에 문제의 심각성은 역화되었지만 일시적인 해법이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빈민촌을 철거하고 공동주택을 건설해 빈민촌 거주민들을 수용하는 장기대책을 채택했다. 공동주택에는 최소한의 상하수도가 갖춰져 있었기에 위생문제가 적었고, 공동주탹의 특징 덕에 범죄율오 하락했다. 다만 정부의 공동주택 공급량은 언제나 수요량에 미치지 못했고, 빈민촌 철거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정부의 도시빈민촌 대책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물가문제
9.사회운동의 대두
천금의 시대 동안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에 힘입어, 각계각층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보수성향 일간지 경향신문은 1922년 3월 16일호 사설에서 이러한 운동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4대 운동'이라고 이름붙였는데, 각각 노동운동, 농민운동, 참정운동, 여성운동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은 일찍이 경험치 못한 경제적 부흥을 맞이하였으니, 이를 가히 황금기라 칭할 만하다. 허나, 이 모든 영화는 묵묵히 땀 흘리는 근로대중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였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물질적 풍요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노동보》[35] 의 1925년 7월호 평론 |
이 시기는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처음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었고,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직면하면서 집단적인 행동과 조직화를 통해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은 공업화가 진행되던 대도시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주로 발생했다. 한성, 대구, 함흥, 동래와 같은 대도시의 공장과 조선소, 철도와 같은 대규모 산업현장에서 근로자들은 저임금과 가혹한 작업환걍에 시달렸다. 이러한 환경은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의 불씨를 키웠으며, 초기에는 각 사업장 단위로 임금 인상과 근로 시간 단축 같은 구체적 요구를 중심으로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1920년대 원산 지역의 노동조합 연합체였던 원산노동연합회[36]가 근로재해 보상을 요구하며 일으킨 1923년 원산 파업은 '전형적인 1920년대 방식'의 노동쟁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은 점차 조직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의 결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파업뿐 아니라, 집회와 토론회, 근로자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노동계의 단결력을 강화했다. 노동운동은 주로 한인사회당 소속 정치인들과 좌익 계열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근로자들의 법적 권리와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37] 1925년에는 전국적인 노동운동 조직인 전국노동총동맹(전노맹)이 결성되었다. 전노맹은 전국의 주요 산업 부문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으나 조직이 느슨하여 내부 분열이 심했고 결국 얼마 못 가 여러 단체로 쪼개진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열강인 소련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 경향을 띄기도 했다. 이 시기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단순히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 노동계급의 해방을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출신 일부 한인사회당 의원들을 필두로 혁명적 사회주의 계열의 급진파 노동지도자들이 등장헸다. 이러한 일부 급진적 노동운동은 기존의 시장지본주의 경제구조 뿐만 아니라 수정주의적 노동운동까지도 비판하며 근로자들의 계급투쟁과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급진파 노동운동세력에 대한 대중의 비토와 정부의 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급진파 노동운동은 1920년대 내내 비주류에 머물렀다. 따라서 당대 노동운동의 주도권은 노동운동과 민주적 절차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던 온건파가 잡았다. 이러한 구도는 훗날 경제대공황과 사회혼란으로 인해 붕괴하게 된다.
동아일보에 보도된 신안 농민쟁의 |
한국의 농민운동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지키며 농촌 지역의 권익을 보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은 개화정부의 토지개혁으로 비교적 평등한 토지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농민들은 농업 생산성의 불균형, 농촌 지역의 빈곤,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등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촌 지역에서는 농업의 기계화와 상품화가 진행되었지만, 이에 따른 이익은 모든 농민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업경영이 이루어졌지만, 많은 중소농들은 농업기술의 부족과 자연재해,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도시로의 인구 유출로 인해 농촌 노동력이 감소하며 농업의 생산기반이 약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농촌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자극했다.
1920년대 중반에 결성된 전국농민회총동맹(전농)은 농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전농은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그들의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고, 농업 현대화를 촉진하며, 농촌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조직은 지역 농민회와 연계하여 농업기술 교육, 농산물 유통 개선, 협동조합 설립 등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전농은 또한 정부와 협력하거나 때로는 비판하며 농업 관련 정책에 농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당시 전농은 노동조합들과는 달리 중앙정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좌익 성향을 가진 노조들과는 달리, 당시의 전농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다. 왼쪽으로는 사유재산 철폐와 협동농장 도입을 부르짖는 혁명가부터 오른쪽으로는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 농업사회 복원을 지지하는 반혁명가까지 분포해있어서, 전농 조직원들의 공통점은 농본주의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38] 이로 인해 농민들은 노조와 달리 정치조직화에 실패했고, 장기적으로는 농민운동의 침체를 초래한다.[39]
천금의 시대 동안 참정권은 서서히 확대되었다. 1884년 갑신혁명으로 개화당이 개화의 깃발을 내걸고 집권한 이래로, 개화당이 주도하고 보수당이 견제하는 구조의 과도정부였던 개화정부가 선거 없이 계속해서 나라를 통치했다. 이는 개화당이 장기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봉건국가에서 곧바로 의회정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개화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입된 개화사상을 대중에게 확산시켜 봉건신민을 근대국민으로 탈바꿈시킨 뒤 선거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1896년부터 임시중추원을 개원해 형식적으로는 의회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개화지식인들과 개혁파 관료들의 과두정이었다.[40] 임시중추원은 선거권 확대에 관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갔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대중의 의견을 취합했다. 이후 초보적인 수준의 의회정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개화정부와 임시중추원은 헌법을 제정해 약법을 대체하고, 훗날 천금의 사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첫번째 해인 1914년에 제1회 총선거를 실시하여 초대 중추원을 구성했다. 그 결과 개화당이 중추원 단독 과반을 차지해 서재필이 첫 민선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했다는 기념비적인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한국의 참정권은 완전한 보편참정권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1913년 제 1차 선거법 개혁으로 초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 대한 투표권을 얻은 이는 성인의 4%에 불과했다. 이는 1913년 선거법이 국세로 매년 직접세 5원 이상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에 한해서 선거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한편 피선거권은 직접세 10원 이상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부여됐다. 이로 인해 당시 8할 이상의 국민은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일부 민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참정권 확대운동이 확산되었다. 영국 유학생 출신인 안중근[41]이 펴낸 민권과 참정권의 확대를 주장하는 《삼천만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저서는 한국사회에 일대 파장을 일으켰으며, 1904년 설립된 민권운동단체인 일진회와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주도 하에 '참정권 확대 백만인 청원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임시중추원 내에서도 손정도 등의 민중파 의원들이 참정권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이후 1918년에는 원래부터 참정권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민중파와, 그들과 손을 잡고 대한국민회를 창당한 이승만이 선거권자의 납세조항 대폭 완화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개정안을 발의했고, 이것이 통과되면서 차기 총선부터 성인 남성의 6할에게 선거권이 부여됐다.
이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바라 마지않던 일이지 않는가. 오늘날의 법안을 당리당략을 따져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과 하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 서재필 국무총리, 1918년 제 2차 선거법개혁안 표결을 앞두고 개화당 임시의원총회에서[42] |
이후에도 참정권 확대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28년에는 제3차 선거법개혁이 이루어져, 2차 개혁 당시 남성에게 부여된 것과 동일한 참정권이 여성에게 부여되었다. 결과적으로 천금의 시대가 끝나갈 즈음에는 20세 이상 남녀의 대부분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
• 여성운동
한국의 여성운동은 천금의 시대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태동했다. 물론 이전에도 찬양회나 여우회 등 초보적인 여성운동단체가 생겨났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해산됐었다. 하지만 천금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운동은 언론의 주목을 받을만큼 성장했고, 한국 사회에서 여러 욕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사회홯동을 하게 된 신여성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여성권리의 법제화를 요구하였고, 정치권은 이에 화답하였다. 천금의 시대 중 다양한 분야에서 시작된 양성평등의 제도화는 천금의 시대가 끝난 후인 1936년에 여성의 참정권이 남성과 같은 조건으로 보장되면서 법적 기본권 보장의 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완전한 평등이 달성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활발해져 여성기자, 여성작가, 여성의사 등 기존에는 남성만의 직업이라고 여겨졌돈 직업에 여성들이 조금씩 진출하기 시작했다. 다만 남녀학생의 교육과목 차이 등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일부 신여성들은 조직적 여성운동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여성동우회라는 이름의 여성단체를 만들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 성향으로, 반대파로부터 부르주아 여성운동이라고 불렸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여성교육 증진과 여성참정권 확대를 통해 여권을 향상시키려는 계몽주의적 성격을 보였다. 반면 대한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에 기반한 여성운동을 주창하는 급진파 성향의 여성운동단체였다. 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한인사회당과 협력해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투쟁을 통한 여성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우회의 이러한 반체제적 성향은 정부가 동우회를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게 하는 이유가 됐고, 규모가 작아 대표성이 떨어진다고 비판받던 애국부인회보다도 규모가 약소했던 동우회는 정부의 탄압에 세가 위축되다가 한인사회당 분당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10.황금기의 종말
11.현대의 인식
천금풍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여담
13.관련 문서
14.각주
- ↑ 당시 만주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가 아닌 독자적 세력인 봉천군벌이 지배하고 있었고,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은 우백협정을 맺을 정도로 한국에 우호적이었다.
- ↑ shelf가 아닌 lathe로, 일종의 공작기계다.
- ↑ 이는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 ↑ 특정 다방에 어떤 문인이 자주 나타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를 만나려는 출판사 관계자와 기자, 그리고 독자들이 그 다방에 죽치고 앉아있기도 하였다.
- ↑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은 <의회정치의 안착> 항목에서, 여성권 운동에 대한 내용은 <사회운동의 대두> 항목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 ↑ 맬서스 트랩을 의미한다. 말튜스는 맬서스 트랩 이론을 만든 토마스 맬서스를 의미한다.
- ↑ 이는 새로 병합된 양강 지역의 화인들은 제외한 수치다.
- ↑ 갑신혁명이 발생한 1884년의 인구는 약 1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 ↑ [학교급식법, 1915년 제정]
유럽에서의 대전쟁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는 것을 본 한국 정부는 유사시 균인으로의 징집가능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청년층 남성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신체검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의 청년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체격을 가진 것을 확인한 정부는 청소년들의 영양상태와 발육을 개선하기 위해 소학교에서 급식제도를 도입했다. 빈곤층 학생들에게는 무상으로, 그 외의 학생들에게는 저가 유상으로 제공됐다. - ↑ 오늘날 가장 유명한 아리랑 버전이 <아리랑> 제작 중에 작곡되어 영화의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됐다.
- ↑ 개를 의인화한 애니메이션으로, 사회풍자적 성격을 가졌다. 공개 당시에는 대중의 무관심 속에 묻혔지만 수십년 후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발굴되면서 각광받았다.
- ↑ 이 시기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자본론 등의 사회주의 서적과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가 들어오면서 한국의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운동이 태동하였다. 후술된 사회주의 성향의 문인회인 카프도 이러한 시류 속에서 결성되었다.
- ↑ 해당 독일 요리사들은 바움쿠헨 뿐만 아니라 소세지와 맥주 등도 전해주었다고 한다.
- ↑ 캔버스 천을 씌운 큰 수레를 노점상인이 끌고다니면서 영업을 해 붙은 이름이다.
- ↑ <사회의 변화> 항목의 <인구의 성장> 소항목에서 더 자세히 다룸.
- ↑ 당시에는 한강에 모래사장이 있었다. 한강 백사장이 사라진 것은 1950년대 한강 정비사업 중의 일이다.
- ↑ 축구는 필요한 비품이 골대 두 개와 축구공이 전부이기에 적은 비용으로 수업할 수 있어 교육당국의 선호를 특히 많이 받았다.
- ↑ 학생응원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치어리더 문화로 발전했다.
- ↑ 당대에는 올림픽을 전국체전에 대비해 세계체전이라 불렀다. 대한올림픽위원회로의 개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의 일이다.
- ↑ 개항장 한복이라 하여 장복이라 불렸다.
- ↑ 미 해군 장교로, 일본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편지를 쓴 당시에는 한국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 ↑ 당시 해군은 육군에 밀려 찬밥신세 취급을 당하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국민의 관심을 받아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하려 했다.
- ↑ 스목 등의 영식이 한국과 교류가 많던 프랑스의 학생복의 구성이라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 ↑ 원래는 여학생 교복이 변경될 예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실제로 바뀐 것은 남학생용 교복이었다고 한다.
- ↑ 사영은 구본웅의 자(字)다.
- ↑ 당시 민간에서는 중국을 보통 지나(支那)라고 불렀다.
- ↑ 훗날 외무성총판을 역임하는 외교관 변영태가 맞다.
- ↑ 프롤레타리아 문학
- ↑ 프로문학이 국민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류 문학사조로 떠오른 것은 대공황이 발생한 1929년 이후의 일이었다.
- ↑ 개발사업의 이익은 한일 양국에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나, 사업의 주도권을 한국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본 군부와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불만요소가 되었다.
- ↑ 중국 만주(동북)지방의 군벌로, 현재 만주 북양정부의 모체이기도 하다.
- ↑ 중국인들은 한국이 가진 양강지역을 일종의 실지(失地)로 여겼다.
- ↑ 중국을 분열시키고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은 개화정부 말기에서부터 이어져온 한국의 유구한 외교전략이다.
- ↑ 이로 인해 정부의 재정부담이 증가하였으나, 당시 국가 전반적인 경제 활황으로 세수가 증가했기에 정부는 이를 부담할 여력이 충분했다.
- ↑ 전국노동총동맹의 기관지
- ↑ 당시에는 전국단위의 산별노조가 없었고 그 대신 지역별로 노조 연합체가 있었다. 전국적 산별노조가 이를 대체한 것은 대공황 이후인 1930년대 초반이다.
- ↑ 이와 맞바꾸어 노동조합은 한인사회당 등 좌익 세력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 ↑ 전농이 현재와 같은 강경좌파 색채를 띄게 됰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 ↑ 이후에 전농은 농민의 절대적 수가 감소하고 내부의 여러 정파가 차례로 이탈하면서 서서히 힘을 잃게 된다.
- ↑ 개화정부도 임시중추원이 제대로 된 의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임시' 중추원이라고 명명했다. 임시중추원은 현재의 중추원과 다른 조직으로 인식되며, 임시중추원 의원 선거 역시 현대 중추원 의원 선거와 별개의 것으로 분륟된다.
- ↑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관료로, 내무성참판과 임시중추원 의원을 지냈다.
- ↑ 참정권 부여 대상을 확대하는 해당 법안이 가결될 경우 차기 총선에서 개화당이 국민회에 패배할 것이 유력했던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서재필의 몇몇 참모와 동료 정치인들은 당론으로 선거법 개혁안을 부결시키자 건의했지만 서재필은 위와 같이 말하며 이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