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의 전쟁·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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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올코우스키 전투 Битва за Ціолковський[1] Битва при Циолковский[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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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36년 4월 11일 ~ 1936년 4월 29일 | |||
장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
녹우크라이나 치올코우스키 | ||||
결과 |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의 승리 | |||
영향 | 한소분쟁 일단락 소련의 전면전 준비 | |||
교전국 | ||||
소련 | 대한민국 녹우크라이나 (제1공) | |||
지휘관 | [ 펼치기 · 접기 ] | |||
전력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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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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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6년 녹우크라이나 서북부 치올코우스키에서 벌어진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 대 소련군의 전투. 한-녹오 동맹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해주 지방의 분쟁이 잠시동안 멈췄다.
배경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제정 러시아의 후신인 소비에트 연방이 당연히 연해주의 주인이어야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
만주와 녹오는 대한의 입술이다.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이승만 |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위해 대대로 부동항을 손애 넣고 싶어 해왔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보유하고있던 항구 중 그나마 가장 부동항의 가까운 항구도시는 연해주 프리모리예 지방의 볼로디스히드[13]였는데, 러시아 내전 이후 한국과 일본이 연해주 지방에 완충지대를 두기 위해 극동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건국한 녹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 녹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볼로디스히드를 상실했다. 이에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고 극동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녹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 하였다.
한국의 입장에서 녹우크라이나는 일종의 방파제였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한국 정부는 국민회, 자유당, 사회당, 민주당 내각을 가리지 않고 녹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안창호 내각은 소련으로부터의 증대되는 위험에 맞서 녹우크라이나와 동맹을 맺고 4만 여 명의 병력을 녹우크라이나 영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전개
전선을 돌파하는 한국군 기갑부대 |
1939년 5월 11일, 소규모의 소련군 기병대가 녹우크라이나군 국경 초소를 기습하였으나 초소를 지키던 녹우크라이나 경비대와 그들을 지원온 녹우크라이나 기병정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신문에도 짤막하게만 보도될 정도로 하찮은 수준의 교전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국경에서의 긴장감이 높아졌고, 양측은 점점 더 많은 병력을 국경에 배치했다.
당시 스탈린의 신뢰를 잃어가던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는 이왕 양측간의 충돌이 발생한 김에 소련의 숙원이었던 녹우크라이나 병합을 실현해 스탈린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블루헤르는 휘하의 병력을 준비시켜 녹우크라이나를 팀공하였고 이에 녹우크라이나군과 주오한국군이 응전하면서 양측의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
초기 소련군은 우월한 사거리와 명중률의 야포로 포격전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급강하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 기동부대가 소련군 기갑부대를 격파하면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한국 공군이 아군 기동부대와 보병부대를 포격하던 소련군 포병대를 무력화시키자 기동부대에 이어서 한국군과 녹우크라이나군 보병부대가 소련군을 공격했고 이미 한 차례 기동부대의 돌파로 전열이 붕괴된 소련군은 붕괴하였다.
소련군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부대간 통신까지 단절되자 블류헤르가 극동군에 국경 이북으로의 후퇴를 명령하면서 치올코우스키 전투는 한국 - 녹우크라이나 동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스테슈코는 소련 국경을 넘어 적을 추격해 소련 극동군을 섬멸하려고 했으나 주오한국군 총사령관 홍사익이 만류해 월경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결과와 영향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결국 한오 동맹군을 격파하지 못했고 녹우크라이나 병합 계획도 무위로 돌아갔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블류레흐는 스탈린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고 곧 숙청당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야욕을 버린 것은 아니라서 4년 후 일본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다.
이전부터 공산화의 공포에 한국은 말만 무성하던 소련의 침공이 현실화되자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도 소련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총리였던 안창호가 "끔찍한 붉은 역병이 맹렬히 넘실거리며 우리집 담장을 넘으려 하고 있다", "2차 극동전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소련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국 국군은 치올코우스키에서의 기갑부대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에는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던 다용도 중형전차를 본격적으로 양산하기 시작했다.[14] 또 소련 기갑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 급강하폭격기를 적극 활용한 새 전술교리를 도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