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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25·27대 총리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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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2년 2월 12일 |
캐롤라이나주 켄터키 호젠빌 | |
사망 | 1881년 6월 30일 (향년 79세) |
캘리포니아 준주 오레건 포틀랜드 | |
재임 기간 | 제25대 총리 |
1860년 1월 25일 ~ 1865년 8월 20일 | |
제27대 총리 | |
1866년 1월 31일 ~ 1870년 2월 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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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틀:인용문7 미국의 정치인. 제25·27대 총리를 역임하였다.
평생을 인종 평등과 노동자 인권 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제2차 미영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정치인이다. 역대 모든 총리중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피에르 트뤼도와 더불어 가장 고평가받으며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도 미국의 국부라 할 수 있는 조지 1세와 1위를 다툰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높은데, 우익 진영에서는 제2차 미영전쟁 당시의 영웅적인 전시 총리로서의 역할을, 좌익 진영에서는 종종 미국 사회주의의 시초로 여겨지는 그의 노동 운동을 주목하며 각기 다른 분야에서 두루 그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생애
낙선으로 점철된 초기 정치 인생
총리로 당선되다
제2차 미영전쟁의 전시 총리
두번째 총리 임기
1865년 여름 들어, 미국은 캐나다의 일부 섬들을 제외하고 영국군을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쫓아냈으며 평화 조약만을 남겨둔 사실상의 승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전시 총리로서의 임기가 끝났음을 주장하는 보수당의 일부 강경파 의원들은 거국내각의 해체와 조기 총선을 요구하였다. 1864년 미국 총선은 너무나도 링컨이 속한 자유당에 유리한 총선이었다는 점에서 페어 플레이를 요청한 것이다. 링컨은 결국 평화 조약을 한달 앞둔 8월 20일, 총리직을 사퇴하고 부총리인 앤드루 존슨을 총리로 올린 뒤 자신은 부총리 자리로 불러났다. 1865년 12월 20일, 앤드루 존슨은 황제 리처드 2세의 동의를 얻고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1866년 미국 총선이 실시되게 된다.
정권 탈환을 예견한 보수당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판세는 "전쟁 영웅"인 링컨에게 극도로 유리하게 기울었으며 1월 말의 총선에서 링컨이 이끄는 자유당은 350석 중 29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어냈다. 이는 현재까지도 단일 정당이 거둔 승리중에서는 가장 큰 승리중 하나로 남아있다.
링컨은 2월에 총리로 재지명되면서 총리직에 복귀하였다. 2차 임기 도중에는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실시되지 못했던 1기 총리 시절의 공약을 추진하는데 대부분의 임기를 보냈다. 그는 파괴된 북부 지역의 대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국가재건부를 설립하였으며 이 부처는 이후 주택건설부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된다. 또한 북부를 대신할 서부의 도시들의 건설에 투자하였으며 브록빌 조약으로 미국의 수중에 떨어진 캐나다 식민지의 미국화도 빠른 속도로 추진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노동자와 흑인들의 보통 선거권을 인정하여 1870년 미국 총선부터 세금 5달러 이상을 내야 투표에 참여할 수 있던 기준을 1.5달러로 낮췄고 흑인들의 참정권과 피선거권도 인정했다. 당연히 보수층에서는 반발이 거셌으나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게 된 많은 노동자와 흑인들은 링컨 총리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말년의 노동운동
1870년 미국 총선을 앞두고 링컨은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나이가 70줄에 가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그만 쉬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리처드 2세의 붕어를 이유로 들어, 새 시대에는 새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총리직을 그만두었다.
1873년, 러더퍼드 헤이스 총리가 노동권리청을 설립하자 링컨은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었다. 링컨은 고령의 이류를 들어 처음에는 고사하였으나 이후 받아들였고, 남은 인생 대부분을 무시받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에 썼다. 그러면서 대규모 재벌의 독과점을 우려하고, 당시 유럽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에 관심을 가져 프랑스에서 발간된 사회주의 이론서를 개인적으로 번역하는 등 미국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죽기 2년 전인 1879년에는 "나의 정치 성향은 점차 민주적인 사회주의로 향하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령인 링컨이 정치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1879년에는 폐렴의 발병으로 노동권리청장 역시 그만두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집에서 머물렀으며, 미국 서부 지역으로 요양을 갔던 1881년 숨을 거두게 된다.
평가
사회주의자였는가?
그가 말년에 들어 노동자 권리 문제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면서, 파리 코뮌 등 당대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미국에 사회주의를 소개하였다는 점은 모든 학자들에게 있어서 크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링컨은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 실제로 사회주의에 깊이 귀의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인정한 사회주의의 투쟁 방식은 오직 민주주의일 뿐이었으며 이 역시 자유주의와 온건한 노동 인권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초기의 강경한 공산주의자들은 링컨이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독창적인 이념을 개발하지 못하였다면서 그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또다른 정치학자들은 이러한 링컨의 정치적인 방향을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이나 사회민주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서 링컨은 사회민주주의적 민주사회주의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가 정통 사회주의자였음을 반박하는 사람은 많으나 말년의 링컨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 자체는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