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대한민국 국무총리 | |||||||||||||||||||||||||||||||||||||||||||||||||||||||||||||||||||||||||||||||||||||||||||||||||||||||||||||||||||||||||||||||||||||||||||||||||
---|---|---|---|---|---|---|---|---|---|---|---|---|---|---|---|---|---|---|---|---|---|---|---|---|---|---|---|---|---|---|---|---|---|---|---|---|---|---|---|---|---|---|---|---|---|---|---|---|---|---|---|---|---|---|---|---|---|---|---|---|---|---|---|---|---|---|---|---|---|---|---|---|---|---|---|---|---|---|---|---|---|---|---|---|---|---|---|---|---|---|---|---|---|---|---|---|---|---|---|---|---|---|---|---|---|---|---|---|---|---|---|---|---|---|---|---|---|---|---|---|---|---|---|---|---|---|---|---|---|---|---|---|---|---|---|---|---|---|---|---|---|---|---|---|---|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6대 국무원 총리 장면 張勉 | Chang Myon[1] | |||||||||||||||||||||||||||
출생 | 1899년 8월 28일 | ||||||||||||||||||||||||||
한성부 서서 적선방 사온동계 사온동 (現 서울수도시 종로구 적선동) | |||||||||||||||||||||||||||
국적 | 대한제국 (1899 - 1910) 일제강점기 조선 (1910 - 1945) 미군정 조선 (1945 - 1948) 대한민국 (1948 - 1976) | ||||||||||||||||||||||||||
사망 | 1976년 9월 14일 (향년 77세) | ||||||||||||||||||||||||||
서울수도시 종로구 명륜동1가 36-5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로5길 49) | |||||||||||||||||||||||||||
직업 | 정치인 | ||||||||||||||||||||||||||
임기 | 대한민국 국무총리 | ||||||||||||||||||||||||||
1964년 5월 29일 ~ 1966년 11월 22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연설하는 장면 (2분 22초부터)[5] |
동포 여러분,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의 독립을 지켜내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장면, 1950년 7월 |
대한민국의 제6대 국무총리.
생애
초기 이력
장면은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유년시절을 조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맨해튼 대학교를 졸업했고 한국인 대표로 교황청을 방문했다. 귀국 후에는 평양에서 평신도 대표로서 천주교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천주교 계열 학교들의 교장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장면은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보이지도 않았다.
광복 이후, 장면은 안재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를 주관하였으며, 이후 정계에 입문한다. 신탁통치 여부를 두고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이승만, 김구 등을 위시로 한 반탁 운동에 적극적으로 탐가하였으며, 이후 1946년 결성된 반탁운동단체들의 연합체인 국민의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 중 한 명으로 발탁되어 좌익 성향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대립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 을 지역구에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국회에 입성했다.
외교관 장면
국회에서 외교 성과를 보고하는 장면 부총리 (1952년) |
1948년 12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참석해 각국 대표에게 대한민국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그의 노력에 힘입어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공식 정부로 승인하였다. 이후 이승만으로부터 정부 승인의 공로를 인정받아 초대 주미한국대사로 임명되어[6] 워싱턴에 주미한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 6월 25일, 통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와 UN에 북한의 침공 사실을 급히 알렸으며 기자회견을 열어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그는 미국 정치인들을 따라다니며 한국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고 6월 26일에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만나 참전 약속을 이끌어냈다. 8월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 한국에서의 전쟁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의 선제침공으로 발발헸다는 소련 대표의 주장을 전쟁 중 노획한 소련제 소총을 보여주며 명쾌하게 논박하여 소련 대표를 뻘쭘하게 만들었다.
1951년 2월, 통일전쟁이 남한의 승리로 끝난 직후, 그간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아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귀국하였다. 제2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에서 전국구 5번을 공천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정치인 장면
외무부 장관을 사임한 장면은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민국당의 사무와 재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민국당 지명직 중앙위원도 겸하였으나 곧 사퇴했다. 그는 자서전에 다른 정치인들과의 언쟁과 정치 모략이 패시브인 중앙위원직은 그의 조용한 성격과 맞지 않아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저술했다. 이후 총통의 비서실장격인 정무성 장관에 임명되어 이승만을 보좌했다.
4회 총선에서도 민국당 소속으로 당선된 장면은 6대 국무총리에 내정되었다. 1964년 5월 29일 열린 국회 국무총리 임명안 찬반투표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임명동의안이 가결되자 이튿날 총리에 임명되었다.
장면은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이승만과 함께 국가 주도의 강력한 중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여 제철, 조선 등 중공업에 대항 투자에는 장면의 입김이 크게 반영되었다. 또한 겉으로는 베이징에 국빈방문하여 중공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반면, 소련과의 지하와교를 펼치며 중공을 성대로 한 전쟁 계획에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
국무총리직을 내려놓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이후에는 종교 활동과 자선 활동을 벌였다. 과거와 같리 천주교 평신도 대표로 사무직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불우이웃돕기 등의 활동을 하며 봉사활동으로 말년을 보냈다.
1975년에 혈액암 판정을 받고 투병을 시작했으며 1976년 9월 14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혈액암으로 서거했다. 향년 77세.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무소속 | 1945 - 1948 | 정계 입문 |
1948 - 1976 | 창당 정계 은퇴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