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김영삼 관련 틀 | |||||||||||||||||||||||||||||||||||||||||||||||||||||||||||||||||||||||||||||||||||||||||||||||||||||||||||||||||||||||||||||||||||||||||||||||||||||||||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총통 |
---|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제8대 국무총리 | |
---|---|
대한민국 제2대 총통 김영삼 金泳三 | Kim Young-sam | |
출생 | 1929년 1월 14일 |
대일본제국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 (現 경상남도 거제시 통제동) | |
사망 | 2020년 12월 20일 (향년 91세) |
서울수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
임기 | 중앙정보성 장관 겸 정무성 장관 |
1967년 8월 1일 ~ 1970년 7월 16일 | |
내무부 장관 | |
1970년 7월 17일 ~ 1972년 7월 10일 | |
대한민국 국무총리 | |
1972년 7월 11일 ~ 1973년 5월 11일 | |
대한민국 총통 | |
1973년 5월 12일 ~ 1982년 5월 7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김영삼의 공식 초상화 |
대한민국의 정치인. 2대 총통이자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정계 입문과 지도자 수업
내무부장관 김영삼 (1971년) |
김영삼은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이 되던 해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승만의 눈에 띄게 되었다. 김영삼은 통일전쟁 시기, 웅변실력을 인정받아 일반 보병이 아닌 정훈병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승만의 개인 비서관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권유로 1954년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 당시 김영삼의 가족들은 겨우 만26세에 불과한 김영삼의 나이를 걱정하며 출마에 반대했지만 김영삼은 출마를 강행했고 당당히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
1956년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재선의원이 된 김영삼은 1957년 1차 개헌 당시 탈당과 잔류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이승만의 설득으로 잔류를 선택했다.[3] 이후 김영삼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기로 마음먹은 이승만에 의해 김영삼은 국회의원, 중앙정보성 장관, 정무성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치며 정치, 행정 경험을 쌓았다.
김영삼이 내무부 장관 시절 단행한 행정개혁은 복잡했던 행정구조를 일목요연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올랐다. 또한 서울시, 평양시 등과 공조하여 상하수도 설치, 시가지 도로 정비 등 주요 도시의 선진화에 기여했다. 이들은 김영삼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국무총리
1972년 국무총리에 임명된 김영삼은 당시 만 43세로 최연소 총리였다.[4] 매우 젊은 나이였지만 김영삼은 천부적인 정치적 감각과 정무성, 중정성, 내무부 장관을 거치며 쌓은 행정경험으로 총리 업무를 부드럽게 처리했다. 이승만 임기가 끝날 때까지 총리였으므로 6회 대선 민국당 예비 후보와 6회 대선 후보 시절 모두 총리 직함을 달고있었던 셈이다.
김영삼은 총리 임명 전부터 1973년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밝혀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70%에 달하는 지지율을 기록하던 이승만[5]이 김영삼을 자신의 마지막 총리에 임명한 것은 사실상 김영삼을 황태자로 책봉한 것과 마찬가지였다.[6]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이승만의 후광을 등에 엎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8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민주국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총통 시절
1973년 제6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서 60%라는 높은 득표율로 자유당의 김대중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총통에 당선되었다. 이는 김영삼의 개인적인 인기와 전임 총통 이승만의 후광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비록 김영삼이 총통이 되었지만 여당인 민국당의 주석은 여전히 이승만이 맡고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 초기는 김영삼과 이승만이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김영삼은 이승만의 뜻대로 총통의 3중임을 제한하는 개헌안을 상정시켜 통과시켰고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국가들을 모아 미국의 비호 아래 아시아태평양국가연합을 출범시켰다. 이승만은 김영삼의 뜻대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사전 작업에 사재까지 투입하며 협조했다. 이러한 양두체제는 1975년 이승만이 민국당 주석직을 내려놓으면서 끝났다. 이 이후부터 이승만은 정치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였다. 김영삼의 독무대가 열린 것이었다.
이후 3년간 김영삼은 인기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10%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이 7%대까지 떨어진 것이다. 60%를 넘던 김영삼의 지지율도 50% 남짓까지 하락했다. 그런 상황에서 실시된 7회 대선에서 김영삼은 신승을 거둔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삼은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첫 번째 카드는 이승만이 총통 퇴임 후 영입한 심상우, 김재익, 서석준, 일명 심김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두 번째 카드는 전임자인 이승만을 우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김영삼은 자신이 이승만의 정책과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것이었다. 김영삼의 전략은 효과를 보아 2기 정부의 국정 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내에서 심김서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고 2기 정부 말이 되면서 김영삼계와 심김서계가 파워 게임을 벌였다. 이 파워 게임은 8회 대선 후보 경선에서 심김서의 서석준이 선출되면서 심김서의 승리로 끝났다. 1982년, 총통 임기가 만료되면서 김영삼은 퇴임한다.
총통 퇴임 후
1982년 56세의 나이로 정계를 은퇴한 김영삼은 민주국민당믜 상임고문과 서석준 정부가 준 각종 명예직을 맡았으며 여기저기 정부 행사나 민국당 행사에 수시로 참석했다. 옛 김영삼계는 서석준계에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서석준 정부가 끝나고 김대중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활동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대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위한 '사랑의 집짓기', 겨울철 연탄 배달 봉사, 하천 쓰레기 치우기 등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김영삼은 '봉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총통 재임 기간보다 퇴임 후에 훨씬 더 후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2016년경 뇌졸중 진단을 받아 모든 대외활동을 중단했으며 2020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폐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가
긍정적 평가
- 행정개혁
- 금융실명제 실시
- 아태 통합
부정적 평가
- 폼생폼사
- 후광정치
- 폐쇄적 국정운영
어록
지금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난의 시대를 우리의 뒷 세대가 아닌 우리 세대가 대신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53년, 대정부 질의 중 국무총리 김구에게 |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랭이굴에 들어가야 합니다. 1957년, 1차 개헌 이후 민국당 탈당 번복 이유를 묻는 기자의 대답에.[7] |
헵상은 겔렐대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1969년, 정무성장관 겸 중앙정보성장관 재임 중, 일본과의 청구권 회담이 결렬된 후 회담장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에게[8] |
명예 대신 부를 선택하려거든 공직을 떠나라. 1971년, 내무부장관 재임 중 |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80년, 총통 재임 중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
여담
-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그가 총통이던 시절 청와대에서는 칼국수가 식사 메뉴에서 빠지는 날이 없었다. 맨날 점심을 칼국수만으로 때우다보니 영양 부족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이로 인해 요리사들이 칼국수 국물을 진하게 우린 사골육수로 바꾸고 반찬을 더 만들어 메뉴에 추가했다고 한다.
- 퇴임 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덕에 총통 퇴임 후 사망 까지의 봉사시간 누계가 약 5천 시간에 달했다.
- 동아시아 전쟁으로 얻은 만주 지역의 통치 용이를 위해 우남주의를 창시했다. 이승만의 정책이 우남주의에 상당 부분 반영되기는 했지만 이승만은 우남주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선거 이력
선거 종류 | 연도 | 소속정당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국회의원 선거 | 1956 | 41.4% 경남5 |
당선 |
초선 | |
국회의원 선거 | 1961 | 52.9% 경남5 |
당선 |
재선 | |
국회의원 선거 | 1966 | 55.1% 경남5 |
당선 |
3선 | |
국회의원 선거 | 1971 | 전국구 2번 | 당선 |
4선 | |
총통 선거 | 1973 | 60.9% | 당선 |
초선 | |
총통 선거 | 1978 | 50.7% | 당선 |
재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54 - 2020 | 정계 입문 사망 |
각주
- ↑ 1954년 재보궐 선거로 당선
- ↑ 이를 통해 김영삼이 얻은 최연소 국회의원 타이틀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상태이다.
- ↑ 탈당파는 호헌정우회를 창당, 결과적으로는 자유당으로 이적했다.
- ↑ 이 기록은 이운석이 30세의 나이로 2기 유승민 정부의 첫 총리에 임명되면서 깨졌다.
- ↑ 동아시아 전쟁의 승리로 가장 높을 때는 89%의 지지율을 기록했었다. 김영삼을 총리에 임명한 때에는 승전의 기쁨이 조금 가신 상황이라 지지율이 이전보다 다소 떨어졌었던 상황.
- ↑ 그 이전부터도 김영삼은 반쯤 황태자와 마찬가지였기는 했다.
- ↑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감행하자 김영삼은 김대중, 조소앙, 원세훈 등과 함께 탈당하려 했으나 이승만의 설득으로 결정을 번복했다.
- ↑ 당시 김영삼은 일본과의 청구권 회담에서 한국측 협상단 수석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