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누벨 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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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
Z. W. P. Polskie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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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어 Сполучені багатоетнічні соціалістичні держави Польщі (СБДП)
벨라루스어 Аб'яднаныя шматнацыянальныя сацыялістычныя дзяржавы Польшчы (АШДП)
리투아니아어 Jungtinės daugiatautės socialistinės Lenkijos valstybės (JDLV)
라트비아어 Polijas Apvienotās daudzetniskās sociālistiskās valstis (PADV)
러시아어 Объединенные многоэтнические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е государства Польши (ОМГП)
루마니아어 Statele Unite Multietnice Socialiste ale Poloniei (SUMP)
독일어 Vereinigte sozialistische Vielvölkerstaaten Polens (VSVP)
이디시어 פֿאַראייניקטע מולטי-עטניק סאָציאַליסטישע שטאַטן פון פּוילן (FMFP)
영어 United Multi-ethnic Socialist States of Poland (UMSP)
민간 국장
국기 정부 문장
Kraj wszystkich narodów
모든 민족의 나라
(1927~現)
Proletariusze wszystkich krajów, łączcie się!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48~現)
상징
국가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Mazurek Dąbrowskiego)
연방 찬가 인터내셔널가
(Miedzynarodowka)
국화 팬지꽃
국조 흰꼬리수리
역사
폴란드 제2공화국 성립 1918년
폴란드 제3공화국 성립 1927년
폴란드 제4공화국 성립 1987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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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바르샤바 (Warszawa)
북위 52° 13′ 56″ 동경 21° 00′ 30″
최대 도시
면적 1,043,178km2
내수면 비율 1.8%
접경국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라트비아
러시아
헝가리
루마니아
크림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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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억 1,398만 7,400명 (2022년)
밀도 109.26명/km2
출산율 1.65명 (2022년)
민족 비율 폴란드인 41.36%
우크라이나인 20.70%
벨라루스인 12.28%
리투아니아인 7.11%
몰다비아인 5.54%
독일인 4.52%
유대인 1.78%
리보니아인 1.77%
외국인 4.95%
공용어 없음 (사실상 폴란드어)
지역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독일어, 이디시어, 루마니아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
종교 국교 없음 (세속주의)
비율 가톨릭교 38.10%
정교회 32.95%
개신교 1.85%
유대교 1.60%
기타 종교 0.39%
무종교 25.10%
군대 폴란드 합중국군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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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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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다민족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명목상)
사회주의 공화국, 공화제, 이원집정부제, 일당 우위 정당제, 양원제
민주주의 지수 6.70점[188개국 중 53위] (결함 있는 민주주의)
대통령
(국가원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정부
요인
총리
(정부수반)
율리아 티모셴코
부통령[2] 안제이 두다
하원의장 알렉산데르 두친스키
인민재판소장 파트릭 조비코
입법부 최고 라다 (상원)
세임 (하원)
집권 여당 사회민족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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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국가자본주의혼합 경제[3]
GDP
(PPP)
$4조 6,438억 4,667만 (2022년) | 세계 6위
1인당 $40,740 (2022년)
GDP
(명목)
$3조 491억 6,295만 (2022년) | 세계 7위
1인당 $26,750 (2022년)
신용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즈워티(zł, złoty)
ISO 4217 PLN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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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GMT+01:00 ~ +02:00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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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88년 11월 1일
북한: 1948년 10월 16일
국제연합 가입 1945년 10월 24일
무비자 입국 양국 모두 45일
EU 가입일 2010년 1월 1일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20-1
ccTLD
.pl
국가 코드
616, PL, POL
국가 전화 코드
+48
여행 경보
여행유의 전 지역[SARS-CoV-2]
여행자제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크림 전쟁]
위치
[ 유럽 내 지도 ]
[ 유럽 내 지도 ]
[ 지구본 지도 ]
[ 지구본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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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폴란드어: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문화어: 뽈스까 다민족 사회주의 련방국)은 중부 유럽에 위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상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민족 국가가 뭉친 합중국의 형태를 띄고 있다. 총 6개의 국가와 2개의 자치국가가 뭉친 국가연합이자 합중국으로, 미국의 연방제와도 유사하다. 과거에는 체코, 슬로바키아, 크림 반도 역시 영토로 두고 있었으나, 1987년 사회 자유화 조치를 통해 국민투표로 독립한 상태이다. 유고슬라비아, 소련과도 유사하지만 이들 국가가 붕괴된 반면, 폴란드는 여전히 그 영토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포용적인 민족 정책으로, 오래전부터 "유럽 유대인의 천국"이라 불렸으며, 현재도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중에서 유대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당시에도 앞장서 많은 난민들을 수용하였을 정도로 포용적이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92~30년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하의 사회 개혁 정책인 27 혁명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민족적 사회주의 체제를 이루었다. 동시에 인테르마리움이라 불리는 팽창주의 정책으로, 동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로 자리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굵직한 문제에서도 잘 살아남아, 냉전 때에는 소련에 이은 동구권 제2의 국가로 위치를 굳혔다. 동구권 붕괴의 시대에도 잘 대응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부분적 자유화를 이룩하여, 현재까지 중부유럽의 강자로 군림중인 대표적인 유럽의 지역강국이자 강대국이다.

다민족 사회주의라는 특이한 정치 체제로 유명하다. 이는 "폴리투"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기치로 한 애국주의적인 사회주의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유고슬라비아인" 정책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유고인 정책은 비록 티토의 사후 실패했지만, 폴란드의 폴리투인 정책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후 상당 부분 수정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하여 현재까지 성공적인 다문화 정책의 사례로서 남고 있다. 다만 가톨릭교의 영향을 받은 특유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억압적인 일당우위 정당체제, 권위주의적인 문화 등은 청년 세대들의 반발을 사고 있으며, 사회 갈등으로 촉발될 위험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유럽 내에서 러시아와 더불어 유이하게 인구가 1억명을 넘어가는 강대국이다.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달리 경제적으로도 꽤 잘사는 것이 특징이다. 동구권 국가중에서 가장 경제 사정이 좋았던 나라 답게, 현재도 동구권 국가중에서 가장 일인당 GDP가 높으며, 독일에 이은 제2의 유럽 경제 대국의 지위를 견고히 하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물가가 낮아 실감하는 개인의 경제력은 한국보다도 더 높다. 자료에 따라서는 독일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는 것도 있을 정도이다. 경제 성장률 역시 높아, 중부 유럽을 넘어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강대국으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하다.

상징

국명

폴란드의 공식적인 국명은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폴란드어로는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영어로는 United Multi-ethnic Socialist States of Poland이라고 부른다.

국명에는 나라의 공식적인 이념인 다민족 사회주의가 명기되어있으며, 이는 또한 폴란드가 사회주의 공화국이자 연방 국가임을 나타낸다.

한국에서는 미합중국이라는 번역어의 영향으로 "합중국"으로 부르지만, "연방" 혹은 "국가 연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폴란드의 정치적 특수성을 감안하면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국가 연합"이라고 번역하는게 맞다는 의견도 있다. 북한에서는 뽈스까 다민족 사회주의 련방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국명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에, 폴란드어 약칭인 ZWPP나 영어 약칭인 UMSP로 주로 부른다. 이는 소련의 CCCP / USSR, 미국의 USA와 비슷한 것이다. 민간에서는 그냥 "폴스카" "폴란드"라고 불리우며, 이런 약칭이 사용되는 것은 주로 공식 석상에서이다. 희한한 것은 각 민족들은 각 민족의 국명을 제각기 달리 줄여 부른다는 점이다. 가령 독일인들은 자국의 공식 명칭을 VSVP(파우 에스 파우 페)라고 부른다.

국가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가장 보편적인 국민 국가는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폴란드어: Mazurek Dąbrowskiego)로, 폴란드의 헌법에 명시된 폴란드의 상징적인 국가이다. 국민적으로 가장 잘 불리우는 국가이며, 폴란드인들의 자주적 의지를 나타내는 민족주의적 노래라는 인식이 있다.


인터내셔널가

한편 연방 전체로는 인터내셔널가(폴란드어: Miedzynarodowka)가 국가로서 사용된다.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가 민족주의적인 분위기를 고양시킨다면 이 곡은 연방 전체의 사회주의적 단결을 상징한다. 인터내셔널가는 폴란드를 구성하는 8개 국가의 공식적인 국가이기도 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로도 사회주의적 상징이 줄곧 사용되는 나라답게, 인터내셔널가는 1950년대 국가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잘 불리고 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국가 해제 운동이 있지만 그동안 잘 써온 국가를 왜 굳이 없애냐는 반응이 더 많다.

역사

일반적으로 1918년 독립 이후 27 혁명 이전까지 9년간을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27 혁명 이후 오트바르치에 이전까지 60년간을 폴란드 제3공화국으로, 오트바르치에 이후 현재까지를 폴란드 제4공화국으로 나눈다.

인테르마리움, 제국의 태동

1918년, 러시아 혁명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는 대분할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옆으로는 강대국 독일과 소련이 버티고 있었으며,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주권을 위협했다. 또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로서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는 등 불안한 요소가 다수 포진되어있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이자, 폴란드군 총사령관이었고, 독립 직후 폴란드 총통의 자리에 오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이러한 폴란드의 지정학적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폴란드의 특수한 외교적 체제인 인테르마리움을 성립하고자 하였다. 폴란드말로 누벨 외로프라고도 불리우는 인테르마리움은 "바다와 바다 사이"를 의미하며, 그것은 흑해와 발트해 사이에서 폴란드가 중부 유럽의 지배적인 외교 위치를 가져야한다는 피우수트스키의 외교적 신념이었다.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인테르마리움을 통해 폴란드가 중부 유럽에서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며, 또한 강력한 내수 시장을 지니므로, 무역에 의존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 역시 반영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과의 외교적 협상을 위해, 소련과 독일 양쪽에 대항하는 제2의 폴리투 건국이라는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보호하는 대가로 하나의 군사 동맹체를 형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소련과는 1921년 민스크 조약을 체결,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2/3은 폴란드에게, 나머지는 소련에게 귀속시키는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27 혁명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초상화

192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민족민주당 세력은 폴란드인만의 폴란드 건국을 주창하며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이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단일 민족성은 1920년대 초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허나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애국주의를 지지했을 지언정 폴란드의 단일민족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폴란드가 폴리투라는 단일한 정체성 속에 여러 민족이 뭉치는 체제가 되어야함을 강변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 피우수트스키 총통는 일찍이 1923년 유대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폴란드인의 타민족 차별을 법적으로 제재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1927년 1월 10일,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폴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피우수트스키의 총통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1927년 폴란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피우수트스키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폭력 세력을 몰아내자고 국민들을 선동했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 소요 사태 진압 세력은 민족민주당 당원들을 체포하고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그해의 10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사회주의 사상[6]다민족이 혼재된 폴리투적 애국주의를 합친 다민족 사회주의를 가치로 하여, 폴란드를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맹국이 되었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총통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바로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직위에 올랐다. 이러한 친위 쿠데타의 과정을 통틀어 27 혁명이라고 부른다.

27 혁명에 성공한 폴란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표방하고, 반소와 반독 감정을 동시에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소련을 견제하고, 북쪽으로는 라트비아를 침공해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팽창을 실현했다. 1930년대 들어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27 혁명과 그 뒤를 이은 폴란드의 국제 침략 노선은 세계 연맹을 위시로 한 국제 사회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강대국들은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며 정복 전쟁의 중단을 요청하였다. 폴란드는 결국 라트비아 내에서 주민투표를 통하여 일부 지역을 독립시킬 수 밖에 없었으며, 단치히 역시 독일에게 반환하는 방식으로 다른 국가들을 달래며 패권을 확장시켰다.

경제 개혁

1920년대 내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중공업을 육성하여 폴란드의 고질적인 무역 의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위해 많은 인구를 토대로 한 내수 시장을 키웠고, 또 한편으로는 중부 유럽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통한 무역에서의 우위도 확립하였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과의 자유무역은 폴란드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다. 가장 큰 관심은 대독일 무역 의존도 감소였다. 특히 단치히폴란드 회랑 문제로 독일과 사사건건 마찰을 겪던 폴란드는 무역 자체의 의존도도 낮췄을 뿐만 아니라 대독 무역 의존도 역시 대체 시장의 개발로 감소시켰다. 결정적인 것은 영토 분쟁을 이유로 일어난 1925년의 독일-폴란드 무역 분쟁이었다. 폴란드는 단치히를 독일에게 반환하는 대신 독일이 기존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폴란드의 물품을 구입시키게 하는 마르크스-피우수트스키 협정[7]을 발효시켰다. 폴란드는 일단은 독일에게 단치히를 넘겨주지만, 다시 전쟁으로 이를 빼앗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뒤로는 독일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현실적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폴란드의 경제 구조 개혁은 1929년 대공황 당시 폴란드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선방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우수트스키는 경제 4개년 개발 계획을 통해 실레시아 지역에 집중되어있던 중공업 지대들을 폴란드 본토로 이전시키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규모 공단을 유치하고, 각 구성국간의 블록 경제를 추구함과 동시에 다방면에서 내수 시장의 성장을 토대로 한 경제 구조 개편을 가속화시켰다. 폴란드는 대공황 시기, GDP가 17% 정도 감소하는데 그쳐 타격을 잘 버텨냈고, 1932년 이후 경기 회복에 접어들었다. 반대로 독일은 경제 혼란에 빠져 결국 파산에 이르게 말았고, 1930년대 이후 폴란드는 독일의 경제 규모를 일시적으로 넘어서게 된다.

이 파트는 거의 반쯤 자면서 쓴거라 개 병맛인데다 고증도 개판이라 나중에 논문을 보면서 천천히 수정할 계획이 있다.

정치 개혁

사회민족당의 로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미국의 합중국 체제를 본받은, 다민족이 애국심으로 뭉친 폴리투 제국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대통령 아래에 부통령을 두었고, 총리 직위는 있었지만 대통령이 총리직을 동시에 역임해서 사실상 총통 제도였다.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상원은 각 구성국에서 10명씩 파견한 국회의원으로, 하원은 인구비례에 따른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제도를 많이 본땄음을 알 수 있다.

피우수트스키 정권은 27혁명 이후 상원인 최고 라다(평의회)와, 하원인 세임을 두었다. 세임(Sejm)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귀족들의 입법부였던 세임에서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피우수트스키 정부가 폴리투를 최대한 계승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술했듯 라다는 각 구성국에서 동등한 정수로 선출했고 세임은 인구비례를 통한 총선거로 선출하였다. 당시에는 폴란드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으나, 최고 라다에서의 균형으로 특정 민족의 불만이 조성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폴란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였으며, 월 20즈워티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폴란드 선거국의 조사에 따르면, 1931년의 총선거에서는 폴란드인의 약 26.4%가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4년 뒤인 1935년의 총선거에서는 이 비율이 40%대 초반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피우수트스키에 따르는 폴란드 국민당(現 사회민족당)이 상하원 전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관제 야당인 폴란드 사회당은 10석 내외의 의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부정선거와 선거구 조작이 횡횡했던 결과였고 또 대통령이 상원 의원의 33%, 하원 의원의 20%를 지명하게 함으로서 폐단은 더욱 심화되었다. 폴란드 공산당, 폴란드 민족민주당 등 야당의 설립은 금지되었고 다당제가 아닌 사실상의 일당제 시대가 개막함으로서 의회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외교 정책

유제프 할레르 폴란드 전 총리의 모습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920년대 후반까지 강력한 반소, 반독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들어 독일의 경제 사정 악화로 인해 극우 정당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폴란드 정치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독일 내에서는 사민당이든 중앙당이든 중도파와 극좌우파를 가릴 것 없이 반파(波) 여론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양면으로의 적대 관계를 위험하게 생각하여 소련과의 친선 맺기에 나섰다. 이는 비록 비(非)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었기는 했지만, 어렴풋이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던 폴란드와 사회주의의 대조국 소련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의 결과이기도 했다.

1929년, 유제프 할레르 폴란드 부통령과 알렉세이 리코프 소련 인민평의회 의장은 르부프에서 만나, 양국간의 친선과 점진적인 동맹 관계 확립을 합의하였다. 폴란드 국민당은 총 70%의 동의를 통하여, 당명을 사회민족당으로 교체하고 코민테른에 가입하였다. 폴란드는 소련과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도, 폴란드가 주장하고 있던 드네르프강 동부의 영역을 주장하지 않고,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북부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국력은 폴란드와 소련이 거의 비슷하였기 때문에, 양쪽은 서로의 동맹 관계에 만족하였으나, 이는 사상적이라기보다는 이익적 동맹에 가까웠다.

어느정도는 당시 폴란드 내에서 준동하던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폴란드는 1930년대 이후, 사회민족당 내에서 공산주의를 허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비인가 공산당은 여전히 탄압하는 방식으로 반정부 마르크스주의의 준동을 차단하였으며 소련은 이를 묵인하였다. 그럼에도 사회민족당 내 마르크스주의 세력은 그 세를 키워 고무우카 정권 이후로는 나름대로 민족당의 주류를 차지한다.

한편 독일과의 관계는 꾸준히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으로 가는 길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죽었다. 그 이전부터 악화되었던 병세 때문에 그의 측근들이 사실상의 업무 대행을 하였으므로 정치적 공백기는 짧았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후, 부통령 유제프 할레르가 잠깐 정권을 잡으나, 피우수트스키와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정권 지지 기반이 약했으며 1937년 2월 이후에는 피우수트스키 정부의 각료였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정권을 잡고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유제프 할레르는 총리직을 차지하며 27 혁명 이후 총통 제도에 가깝게 유지되었던 이원집정부제는 폐지되고 대통령-부통령 우위의 이원집정부 체제가 성립된다.

시코르스키는 피우수트스키보다도 더욱 원칙주의적인 입장이었으므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지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으며 소련과도 불편한 동맹의 관계를 이어갔다. 소련은 민족당 내 마르크스주의자를 키워 장기적으로 폴란드를 자국에 충성적인 동맹으로 돌려놓으려는 계획을 세웠고 시코르스키는 이런 소련의 공작을 탐탁치 않게 보았다. 허나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폴란드의 선택지는 소련과의 군사동맹 강화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강점

한스 프랑크 폴란드 총독의 모습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에 선전 포고하였고, 프랑스와 영국 역시 선전포고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독일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폴란드 영토 깊숙히 쳐들어갔고, 폴란드는 저항하며 버텼으나 1940년 1월 6일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며 3달만에 독일군에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비롯한 상당수의 군장성과 병력이 소련이나 영국으로 탈출해 자유 폴란드군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절반의 성공으로 그쳤다. 한편으로 시코르스키 정부는 유대인 학살을 우려해,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중 약 10%에 달하는 30만명을 러시아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유대인 피신 작전은 유대인에 대해 안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인들의 반발과, 유대인에 대한 특별 대우가 아니냐는 항의 속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나치 독일의 강점 동안, 폴란드 총독부의 총독이었던 한스 프랑크는 악독한 통치로 그 악명을 떨쳤으며, 전후 재판을 통해 처형된다. 또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헤움노, 트레블링카 등 악명높은 유대인 절멸 수용소 대다수가 폴란드 땅에 지어지고 폴란드 자체도 독일에게 영토 1/2을 강제로 빼앗기는 등 폴란드에 있어 가장 어두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을 고려하였으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교부장관의 설득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면전은 회피되었고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유폴란드군에 막대한 무기 지원으로 독일을 견제하였다. 프랑스 함락 이후에는 전후 유럽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아예 폴란드군에 자국군을 섞는 식으로 대리전까지 치루게 했는데, 이것이 독일의 불안을 촉발하였고, 결국 독일은 다소 이른 1941년 2월 독소 전쟁을 개전시켰다. 소련군은 기다렸다는듯 전쟁에 응했지만, 독일의 기동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모스크바 인근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소련-자유폴란드 연합군의 지속된 공세 속에서 독일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 총독부 내의 폴란드인들을 차별 대우하였다. 폴란드인들은 전차나 버스에서 뒷자리에만 타야했고 독일인들이 서있으면 그들에게 양보해야했다. 모든 관공서에서는 독일어만을 사용해야했으며, 폴란드의 국민음악가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처형되었다. 폴란드인들은 극도의 기아와 차별 속에서 수없이 학살당하였고, 약 150만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폴란드 인구 전체의 5%에 달하는 엄청난 수였다. 특히 유대인은 당시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 315만명중, 40%에 육박하는 120만명 가량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나마도 폴란드 정부가 유대인들의 피신을 도운 덕택에 피해가 적었던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일으켰으나,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허나 게토 봉기 시절, 유대인들에 의해 주요 관공서에 폴란드 국기가 걸리는 모습을 보고, 몇년간 들어본적도 없던 폴란드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은 폴란드인들은 강력히 고무되었다.

폴란드 해방

게토 봉기의 영향을 받은 자유 폴란드군은 1944년 바르샤바 대봉기를 기획한다. 독일군을 각개 격파하고 있던 소련 역시, 동부 전선으로의 빠른 영토 확장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자유폴란드군을 지원하였다. 1944년 8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독일이 혼란해진 틈을 타 바르샤바 각지에서 자유폴란드 게릴라군이 봉기했고, 뒤이어 폴란드의 각 도시에서도 무장 게릴라들의 산발적 전투가 이어졌다. 비록 독일 국경과 가까운 몇 도심에서 저항은 실패했으나, 폴란드의 자유 봉기는 폴란드 영토 상당수를 해방시켰으며, 1944년 9월 20일 바르샤바 해방구와 소련-자유폴란드군의 점령지를 잇는 전선이 형성되며 봉기는 성공으로 끝난다. 자유폴란드군은 1944년 10월 해체되고, 다시 폴란드 합중국군으로 재편된다.

1944년 12월, 소련-폴란드 연합군은 폴란드의 모든 영토를 해방시킨데 이어, 오스트리아 동부와 독일 동부, 바이에른, 이탈리아 북부 지역등을 해방시키며 선전한다. 전후 영토 조정안에 폴란드 역시 참여하였고, 폴란드는 동프로이센슐레지엔 지역 전체와 포메른 지역 일부를 할양받으며 영토를 늘렸고, 체코슬로바키아도 자국의 연방국가로 포함시켰다. 또한 독일은 독일 연방 공화국독일 민주 공화국으로 분단되었고 오스트리아에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공산권의 "철의 장막"이 수립된다.

폴란드는 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과 함께 "5대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얻는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상처 뿐인 승리였다. 전쟁 동안 폴란드인의 거의 10%가 사망했고 유대인들은 40%가 학살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득이 있었지만 실이 더 컸다. 폴란드는 전쟁 내내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점할 수 없었으며, 자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위성국들은 철저히 소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폴란드 역시 반소 민족주의자들의 힘이 대폭 감소했고 1945년 이후 사회민족당 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힘이 강력해진다.

전후 공산 체제

폴란드에서는 1945년 소련에 의한 해방 이후, 비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민족-사회주의 정치인들의 힘이 극도로 약화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의 개전을 기점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당권을 독점하였다. 비록 대통령은 온건파였던 스테판 스타진스키가 추대되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방침을 195~80년대 내내 이어갔다. 1952년에는 사회민족당의 당 강령에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가 명시되었으며, 1955년에는 국가의 이념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폴란드의 변화는 폴란드가 확실하게 친소 노선을 타는 것으로 각인되게 하였다. 그러나 여타 위성국과 달리 폴란드는 자발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노선에 따른 것에 가까웠고, 이런 특이점은 폴란드가 1960년대 이후로는 탈소 자주 외교를 전개하고 1980년대에 민주화를 이루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경제 재건

문화과학궁전(PKIN)

역설적으로 소련에 기댄 2차 세계 대전의 수행은 온건한 반소파였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는 1943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 폴란드 정계에서는 소련에 온건히 반대하던 시코르스키를 죽이고 마르크스주의자를 대신 앉히려는 소련의 계략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았다. 또 2차 대전 도중의 마음고생, 과로 등으로 인해 시코르스키는 폭삭 늙어버렸고 1945년 이후로는 잔병 치레를 앓느라 제대로 서있는것도 힘든 신세가 되었다. 결국 1946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53세의 젊은 정치인 스테판 스타진스키가 총리로 취임하고 실권을 잡았다.

스타진스키는 바르샤바의 시장이었다. 그는 바르샤바의 시장이었던 시절, 도시 정화 사업과 각종 토목 공사로 바르샤바를 "동유럽의 파리"로 만들었다는 호평을 듣고 있었다. 비록 히틀러의 잔악한 통치로 전후 아름다웠던 바르샤바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이는 스타진스키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굳게 먹게하는데 큰 동력이 되었다. 스타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내각에 포진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총리이자 "국토재건부" 장관을 동시에 역임하며 만신창이가 된 폴란드를 재건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바르샤바의 파괴는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1948년까지 수도 기능을 할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는 임시로 루블린에 정부 기관을 설치하였고, 또 바르샤바에 위치했던 각종 시설들을 지방 도시로 분산시키며 연방 국가로서의 지방 분권에 열중했다. 바르샤바의 재건은 소련의 선물이자, 전쟁 개전 당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한 사과와도 같았다. 소련에서 파견된 수많은 토목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증언, 오래된 설계도, 심지어는 그림책과 민요까지 참조하며 전쟁으로 파괴된 구시가지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였다. 벽돌도 일부러 진흙을 뭍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48년, 바르샤바는 말끔하게 재건되었고, 구시가지는 전쟁 전과 다름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시가지는 완벽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콘크리트 도시로 건설되었다. 신시가지 중심부에는 "스탈린의 선물" 문화과학궁전이 들어섰고, 문화과학궁전은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49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사후, 스테판 스타진스키는 소련의 지지에 힘입어 제6대 대통령으로서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1950년에는 6.25 전쟁에 폴란드군이 소련, 중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지원 물자를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외교적 위치의 재설정

냉전기 폴란드의 지정학적 위치 (적갈색)

전전(戰前) 폴란드는 소련과 거의 동등하거나 그 이상에 있는 위치로 인식되었다. 폴란드의 인구는 소련의 인구와 필적했고 공업의 수준은 소련을 능가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폴란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전쟁 내내 소련에만 기대는 국방 정책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위치는 심각하게 격하되었다. 194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폴란드는 소련의 도움 없이는 경제적으로 복구되기 힘든 신세가 되었다. 이는 폴란드 정치권 내에서 반소 민족주의자들의 힘이 약화되고, 대신 소련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폴란드는 소련과의 동맹국가에서 일개 위성국가로 격하되어버린 것이다.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러한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또 폴란드와 소련이 군사 동맹을 맺었으면서, 정작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소극적으로 나섰다며 소련에 배신감을 느낀 폴란드인들도 많았다.

1950년대 경제 복구 이후에는, 소련에 이은 확고한 사회주의 국가 2인자의 역할을 맡음으로서, 폴란드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독립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다. 1956년 중소결렬 이후 폴란드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폴란드는 "소련과의 특수한 위치"를 핑계로 어느정도의 탈소 정책을 추구하는 동시에 전반적인 친소 정책을 취하여 소련과의 동맹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았다.[8] 이때 폴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스타진스키 대통령의 말대로 "유고슬라비아보다는 가깝지만, 동독보다는 먼" 어떠한 것이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폴란드군은 소련군과 함께 진압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통해 폴란드는 전적으로 소련에 따른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 성향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정부에서 시작한 국가인만큼, 자주적인 정책들이 다수 입안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아예 소련에서 탈피하려는 시도가 1950년대 내내 이어졌다.

경제 개혁과 탈소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동포"인 헝가리인들의 혁명을 무참히 짓밟은 것에 대하여 스타진스키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관계는 형제애적인 관계로도 묘사된다. 그만큼 서로 친하고, 교류도 활발하다. 생판 남인데다 전통적으로 반러 감정이 있는 폴란드에서, 그런 형제 같은 헝가리를 적국인 러시아의 편을 들어 짓밟았다는 것에 대해 반발감을 가진 폴란드인들이 많았다. 또한 1950년대 후반 폴란드에서 발생한 건축 업계의 불황 현상에 잘못 대처한데에 이어, 정권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스타진스키 정권은 지지 기반을 잃었다. 스타진스키는 1961년 2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취임했다.

나는 마조프셰 공국의 도시 바르샤바 출신이다. 내 자신이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니 만족하며,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해준다면 더 기쁘겠다.
스테판 스타진스키 대통령의 퇴임 연설문 中
1967년 민스크 당대회에서 연설하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대통령

고무우카는 비록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였으며 소련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인사였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폴란드의 자주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강제 집단화가 중단되었고, 소련으로 반정부 인사를 송환하는 것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 등이 중지되었다. 또 그는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의 정상 회담을 통해, 슐레지엔 지역과 동프로이센 지역, 포메른 지역의 영유권을 재확인하였으며, 서독과의 외교 정상화에 나섰다. 이는 할슈타인 원칙의 붕괴라는 상징적인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개혁은 1960년대 후반 이후로 지지부진했는데, 우선 늘어난 인구가 문제였다. 스타진스키 정권 때 5,000만명 정도였던 폴란드의 인구는 고무우카의 임기 말년에는 7,500만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늘어난 인구는 GDP의 성장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실업률의 폭증과 1인당 GDP의 폭락을 의미했다. 고무우카는 여러 개혁 조치들을 취하려 하였으나 당내 좌파들의 "수정주의"라는 비판 속에서 제대로된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다. 1968년, 고무우카 정권은 물가를 무려 30%나 인상하는 조치를 기습 발표했으며, 이는 인민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한다. 비교적 해외 사정에 밝았던 체코 지역과 발트해 연안에서 혁명이 터졌고, 알렉산데르 둡체크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수반으로 하는 반정부 세력이 힘을 얻었다. 반정부 시위가 프라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를 프라하의 봄이라 부르며, 혁명의 결과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폴란드의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둡체크는 부분적 민주화 조치와 경제 자유화 조치를 선언하였으나, 집권한지 4년만인 1972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이를 두고 소련이 둡체크의 탈소 정책을 우려하여 그를 암살하였다는 음모론이 돌았으나, 현대의 조사에 의하면 단순한 비행기의 오작동으로 인한 추락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둡체크의 사망은 폴란드의 민주화를 바라던 많은 인민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1972 바르샤바 올림픽의 로고

1972년 둡체크의 급사 이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막대한 외채를 빌려 폴란드의 경제를 번영케 하였으며, 1972 바르샤바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당시 폴란드의 경제 성장률은 연 평균 10%를 넘었으며, 영국병에 빠진 영국의 1인당 GDP를 1977년~1980년에 일시적으로 추월한적도 있었다. 전체 GDP는 소련에 이은 공산권 2위였고 세계적으로는 미국, 소련, 일본, 서독에 이은 5위였다. 폴란드는 그야말로 경제 대국이었던 것이었다. 부분적인 경제 개방 조치를 실시한 고무우카와 기에레크 정권 하에서 폴란드인들의 삶의 질은 유고슬라비아와 더불어 동구권 내에서 가장 높았다.

그 외에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폴란드의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서방 국가를 순방하여, 프랑스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 영국해럴드 윌슨 총리와 정상 회담을 가졌고,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지미 카터 대통령과 함께 1979년 미파 정상회담을 가지고 카터-기에레크 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폴란드의 친서방 노선은 소련과의 불화를 가져왔지만 기에레크는 소련 및 동구권과의 외교 친선 관계 역시 모색하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외교적 고립을 피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란 혁명으로 인한 제2차 석유 파동이 폴란드를 덮치고, 기에레크가 빌린 외채의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자 폴란드의 경제는 우하향의 곡선을 그렸다. 1980년, 경제 파동에 대한 불만이 심화되자 기에레크는 반 강제로 대통령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이후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1980년대 내내 지속된 불황으로 인하여 폴란드 내에서는 반정부 여론이 고조되었다. 1978년과 1985년, 총 두번 있던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바르샤바 방문 및 미사 역시 폴란드의 반정권 여론에 불을 지폈다.

민주주의로의 체제 이양, 오트바르치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로 인해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소련에서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자, 기존의 공산권 국가와 이질적 체제를 갖추고 있던 폴란드는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외교 노선과 정치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은 이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를 시나트라 독트린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시나트라 독트린의 수립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붕괴로도 이어진다.

1987년 10월 25일, 27 혁명의 60주년을 맞이하여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대통령은 레흐 바웬사를 위시로 한 폴란드 자유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분적 자유화 조치를 취하였다. 통제 경제는 혼합경제로 재편되었고 다당제도 허용되어 폴란드 인민당 등 여러 야당들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민족 사회주의라는 체제는 포기하지 않은 채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었고, 기존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은 유지한 채 자본주의-부분적 제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체제로 성공적으로 체제를 이양하여 1989년 이후의 동구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국명에 "사회주의"가 들어가는 유일무이한 중부 유럽의 맹주로 자리잡았다.

1989년, 그단스크에서 연설하는 폴란드 자유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

1989년 7월 1일,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로운 대통령 선거 하에서 폴란드 자유노조, 폴란드 인민당, 폴란드 민주동맹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레흐 바웬사 후보가 50%를 득표해 47%를 얻은 사회민족당 소속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체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성사되었다. 이 소식은 다른 동구권 국가로도 퍼져나가 동유럽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허나 바웬사 대통령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 자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이미 체제와 타협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민주화로의 체제를 이양하기로 한 상태였다. 바웬사는 사회주의 체제를 준수하면서 부분적으로 사회, 경제, 정치의 자유화를 약속하며 폴란드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각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고 바웬사는 각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며 주민투표를 제안했다. 1992년 1월 1일, 주민투표를 통하여 각 구성국들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하였다. 러시아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이 찬성 53.3%[9], 보헤미아 모라바 사회주의 공화국이 찬성 83.2%,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60.6%로 합중국에서 탈퇴하였으며, 그 외 구성국들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에 잔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레흐 바웬사 대통령은 사회 개혁 조치로 서방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경제 문제[10]와 민족 분리 독립 문제에서 잘못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았고 1994년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민족당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에 55% 대 45%로 크게 패배했다. 이후 현재까지 정권교체 없이 사회민족당의 일당우위 정당제가 이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평화적 개혁 조치를 오트바르치에(Otwarcie)라고 하며, 이는 폴란드어로 "개혁" 혹은 "개방"을 뜻한다.

민주화 이후 현대

사회민족당의 재집권으로 사회 개혁이 전부 취소될 것이라는 우려섞인 반응도 나왔지만, 의외로 민족당 정부는 레흐 바웬사의 개혁 정책을 계승하였다.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온건한 진보적 개혁이 이루어졌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던 극렬 공산주의자들은 점차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7년 민족당과 자유노조의 지도자들은 사이좋게 노벨평화상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급격한 체제 교체는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다. 폴란드 자유노조는 당초 사회민주적 개혁을 약속했지만, 서방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해 공기업을 대거 민영화하고 복지를 축소했다. 2%대의 실업률은 10%대로 치솟았고 인플레이션률은 1000%를 기록하는 등 기에레크 시절보다도 폴란드의 경제는 난장판이 되었다. 보스니아 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으로 체코 지역에서는 무장 독립의 위기까지 고조되었다. 결국 바웬사 정부는 체코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허가하지만 폴란드 최대의 공업지대가 위치해있던 체코의 독립은 폴란드의 경제적 혼란만을 가속화시켰다.

2000년대 이후, 끔찍한 경제난은 민족당 정부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을 통하여 점차 안정되었으며, 적절한 민영화 조치와 유연한 경제 정책을 통하여 폴란드 경제는 탄력을 얻어 다시 성장하였다. 2007년, 폴란드는 유럽연합에 가입 신청서를 냈으며, 격렬한 토론 끝에 2010년 폴란드는 EU의 회원국이 되었다.

폴란드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국가이다.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정권,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부정부패 등 해결해야할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정부와 시민, 의회의 노력, 국민의 애국심을 통하여 폴란드의 사회 문제는 빠른 속도로 해결되고 있다.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지역 강대국으로서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세계적인 강대국이라는 빛나는 미래를 향해 끊임 없이 나아가고 있다.

지리

폴란드는 남부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접하고 있는 점을 제외한다면 국토 전체가 유럽 대평원에 놓여있기에 평탄한 편에 속하여, 국토 개발이 용이하다. 다만 독일이나 헝가리 등과 달리 국가 전체를 관통하는 큰 강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제법 큰 강으로는 오데르 강비스와 강, 바르타 강, 드네스트르 강이 있지만, 물류를 수송할 정도로 긴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계로 폴란드 물류의 95% 이상이 육로로 운송되며, 그중에서도 폴란드 제3공화국 시절 국책 사업으로 철도를 밀어준 탓에 거의 70% 이상 물류가 철도로 운송된다.

그러나 드네프르 강은 예외이다. 드네프르 강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큰 강인데, 이 강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폴란드의 국경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이 강 유역에 접한 도시인 자포리자드네프르는 러시아 국경선과 맞닿아있는 도시로서도 유명하다. 드네프르 강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을 관통해, 러시아스몰렌스크까지 이어진다.

기후적으로는 중부 유럽의 국가가 대부분 그러하듯, 온화하고 따뜻한 대륙성 온대 기후가 일년 내내 지속된다.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위도가 북쪽에 있어 겨울에는 상당히 춥다. 지역에 상관 없이, 폴란드는 전국적으로 여름보다 겨울이 더 습하다.

유럽 최후의 원시림이자, 유네스코 자연 유산이기도 한 벨로베즈스카야 숲이 유명하다. 벨로베즈스카야 숲은 그 자체로서 유명하다기보다는, 소련 해체 과정에서 체결된 벨로베즈스카야 조약으로서 더 유명한 편이다.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보헤미아 모라바 사회주의 공화국이 폴란드의 영토였을 때에는, 두 공화국이 산맥으로 막혀있어 지역간의 단절이 심한 편이었다. 이는 두 공화국의 연방 탈퇴로 이어졌다.

구성국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공화국의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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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jest suwerenną federacją wolnych republik. Kryteriami powstania republiki są narody tworzące Polskę. Prawa każdego narodu i republiki są nienaruszalne.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은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주권 연방이다. 공화국의 설치 기준은 폴란드를 구성하는 민족으로 한다. 각 민족과 공화국의 권리는 불가침이다.

폴란드 사회주의 헌법 제2조

폴란드는 유고슬라비아소련의 체제와 비슷하게 여러 국가들이 연합한 국가 연합 형태의 연방제 체제를 표방하고 있다. 폴란드의 헌법에 따라 각 국가의 주권은 신성 불가침하며, 외교권을 제외하면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의 권한을 가진다. 이는 미국보다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연방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내 조국? 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최후의 시민이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코브노요. 리투아니아 땅 한복판이 고향이니 적어도 우리들의 대선배, 미츠키에비치보단 '리투아니아인'이라 주장할 권리가 있지. 우리 집안은 16세기부터 폴란드어를 모어로 썼소. 현대 핀란드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스웨덴어를 썼고, 아일랜드에 살던 사람들이 영어를 썼듯이 말이오.
198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체스와프 미워시

"민족은 여럿이어도 국민성은 하나"라는 모토 하에 유대인, 독일인, 리보니아인, 벨라루스인 등 여러가지 민족들이 폴란드를 구성하면서도 그들이 모두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을 헌법에서 명확히 하고, 교육 행사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것은 "폴리투 정체성"이라고 하며 유고슬라비아의 유고인, 소련의 소련인 정체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철저한 교육과 단결을 통하여, 1960년의 조사에서 전국민의 1.6%가 "폴리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2020년에는 이 비율이 88.5%까지 증가했다.

따라서 자신이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큰 차원에서는 폴리투의 정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마치 미국의 백인, 흑인, 히스패닉이 각 인종의 정체성을 가지지만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미국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말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유명한 말인 "주권을 가진 민족의 기준은 그 민족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자치공화국 혹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을 주요 민족으로 규정하여 이들에게 특혜를 배풀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아시아인, 터키인, 아랍인 등 여러 인종들이 폴란드에 새로 유입되면서, 이들에게는 특별히 외래계 폴란드인 사무국이라는 특수한 기관을 성립하여 연방 정부의 직속 부처로 두고 이들을 관리하게 하고 있다.

과거에는 보헤미아 모라바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이 폴란드에 속해있었으나, 1992년 국민투표를 통해 평화적으로 독립하였다. 폴란드 정부는 이들이 다시 폴란드에 가입하는 것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 이후, 크림 반도 내 일부 폴란드인 및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 하에 폴란드 재가입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11]

구성국 목록

폴란드의 구성국을 나타낸 지도
번호 국기 구성국 이름 수도 면적 (km²) 공용어 인구 (명)
1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
Polska Rzeczpospolita Socjalistyczna
크라쿠프
Kraków
438,634 폴란드어 50,547,643
2
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Lietuvos Socialistinė Respublika
카우나스
Kaunas
65,200 리투아니아 5,183,373
3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
Беларуская Сацыялістычная Рэспубліка
민스크
Мінск
147,595 벨라루스어
러시아어
13,295,887
4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Українська Соціалістична Республіка
키예프
Київ
233,096 우크라이나어 26,913,062
5
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Republica Socialistă Moldova
키시너우
Chișinău
63,846 루마니아어 9,150,433
6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Livonijas Sociālistiskā Republika
다우가프필스
Daugavpils
38,589 라트비아어 2,292,361
7
독일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
Autonomer Staat des Deutschpolnischen Volkes
브레슬라우
Breslau
41,120 독일어 4,103,636
8
유대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
אויטאנאמישע שטאט פון יידישן פוילישן פאלק
크니히스베르크
קניגסבערג
15,125 이디시어 2,501,005
총합 바르샤바
(Warszawa)
1,043,178 - 11,398,7400

정치

폴란드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점수 58점 2021년, 세계 39위
언론자유지수 66.42점 2022년, 세계 64위
민주주의지수 6.70점 2021년, 세계 53위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jest wieloetniczną republiką socjalistyczną, która kieruje się wartościami marksizmu-leninizmu. Cała władza pochodzi od mas ludowych, a państwo ma status organu wykonawczego do sprawowania władzy delegowanej przez lud.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치를 따르는 다민족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인민 대중으로부터 나오며, 국가는 인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집행 기구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폴란드 사회주의 헌법 제1조

폴란드는 근 30년간 가장 눈에 띄게 민주주의가 성장한 국가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나, 현재 공산주의는 그저 말로만 추구하는 가치이며 실질적으로는 의회민주정이 실시되고 있다. 폴란드는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독재 국가에서 민주주의적인 의회제 국가로 변모하고 있으며, 야권 세력 역시 태동하고 있고 정부 청렴도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 여전히 공산 독재 시절의 유산인 권위주의 병폐는 사회 곳곳에 남아있으나 이러한 점들은 빠르게 해결되어가고 있다.

미국프랑스의 체제를 반반 섞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평이다. 미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러닝메이트로 선거에 출마한다는 점,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는 점, 대통령이 4년에 한번씩 선출되며 재선까지 가능하다는 점, 부통령이 상원 의장을 맡는다는 점, 대통령이 임기 도중 대법관을 임명하며 대법관은 종신직이라는 점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대통령을 견제하는 존재로서 내각과 총리가 존재한다는 점,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 내각이 하원에서 인준을 받는다는 점, 동거정부가 성립되면 실권이 총리에게 넘어간다는 점, 다수당 당수가 보통 총리를 맡는다는 점, 상대적으로 상원에 비해 하원의 권한이 막대하는 점 등이 있다.

민주 체제 자체는 27 혁명 직후 제정된 헌법에도 명시되어있었으나 사회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권위주의 정부 성립으로 인하여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1935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망 전에는 대통령이 총리직까지 차지하는 총통제도에 가까웠다. 1935년 피우수트스키의 사망 이후, 대통령-부통령과 총리는 다른 인물이 맡도록 되었지만 그럼에도 대통령 직선제는 커녕 국회의원 직선제 역시 사실상 지켜지지 않는 독재 체제가 유지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사회민족당 외의 정당도 허가되는 다당제 사회였으나, 폴란드 인민당, 폴란드 해방신학동맹 등 사회주의를 따르는 관제 야당만이 허가되었으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당 독재나 다름이 없었다.

소련의 영향을 깊게 받은 다른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폴란드는 독자적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룬 나라였고 1950년대 이후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헌법에 명시했으나 그 이전까지는 비 마르크스 계열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나라 답게 의외로 유연한 면모도 있었다. 고무우카, 기에레크 등 개혁파 대통령이 연이어 집권하며 폴란드 사회는 점차 민주화로 나아갔다.

폴란드의 특이한 사회주의 정치 구조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학계에서 여러 쟁점을 만들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폴란드를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보기 힘든" 국가라고 표현했고, 루이 알튀세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를 위시로 한 서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사회주의가 아닌 민족-애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국가 연방체"라고 표현하였다. 반면 요제프 티토, 마오쩌둥처럼 폴란드를 고평가한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불충분했었고 기에레크 시절 외채 문제로 인한 경제 파동이 터지자 결국 시민들은 민족당 정부에 반발하는 민주화 시위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 중심에는 폴란드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가 있었다. 이런 민중의 기대에 부응해 1987년, 27 혁명 60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사회 자유화 조치를 통해 정치가 서서히 민주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 처음으로 민선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1989년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지도자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듬해에는 첫 자유 총선거가 치루어졌다. 1994년 야권은 다시 민족당에게 정권을 내어주어야했지만, 사실상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회민족당이 민주화 조치를 계속 이어나감에 따라 폴란드는 몽골 등과 함께 사회주의 국가중에서는 몇 안되게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폴란드의 여야 인사들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다만 여전히 문제점은 산적해있다. 선거제도나 언론 환경 등이 사회민족당 정부에 유리하게 짜여져있어, 강한 국력과 별개로 민주주의 지수가 상당히 낮다. 유럽 연합 내에서는 거의 뒤에서 2~3위를 달리는 수준. 그럼에도 민족당 내에서 온건파가 몇번씩 당권을 잡고, 야권이 총리직을 여러번 차지하며 민주주의 자체는 2000년대 이후 눈에 띄게 개선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네오나치의 세력이 꽤 있는 편이다. 자유당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반데라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2014년 크림 반도 위기 이후 우크라이나 내 네오나치들의 준동이 더욱 심해졌다.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자유지구의 역사 때문에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아나키스트들도 존재한다.

대통령


폴란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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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대통령은 폴란드의 국가 원수이다.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는 폴란드에서는 동거정부가 수립되지 않는 한 총리에 비해 대통령이 우위를 가지며 대통령은 총리를 임명할 권한을 가진다. 동거정부 수립 시, 대통령은 외치를 맡으며 실권은 총리에게 넘어간다. 폴란드 연방 대통령은 구성국 전체의 국가 원수로서 군통수권과 의회 해산권을 비롯한 각종 특별한 권한들을 가진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몇번이고 대통령 연임이 가능했지만, 87년도의 개헌을 통해 미국처럼 재선 제한으로 바뀌었다. 사실 민주화 이전에도 3선에 성공한 인물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스테판 스타진스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이렇게 세명 뿐이다. 민주화 이후에는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알렉산데르 루카셴코, 야로스와프 카친스키가 재선에 성공했으며 나머지 대통령들은 모두 단임이다.

대통령 선거는 4년에 한번, 7월에 직접 투표인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선출된다. 1987년 이전까지는 간선제 선거인단 제도였으며 1987년 이후로는 직선제를 실시하고 있다. 직선제 실시 이후로는 1989년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레흐 카친스키가 딱 한번 정권 교체를 이룬 적을 제외하고 모두 사회민족당 후보가 승리해왔다.

역대 대통령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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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름 소속 정당 임기 재임 일수 선거
시작일 종료일
초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폴란드 국민당 1927년 11월 1일 1935년 5월 12일 7년 194일 1927년
제2대

유제프 할레르
Józef Haller
사회민족당 1935년 5월 13일 1937년 2월 27일 1년 291일
제3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Władysław Sikorski
사회민족당 1937년 2월 27일 1941년 2월 26일 12년 1937년
제4대 1941년 2월 27일 1945년 2월 26일 [12]
제5대 1945년 2월 27일 1949년 2월 26일 [13]
제6대

스테판 스타진스키
Stefan Starzyński
사회민족당 1949년 2월 27일 1953년 2월 26일 12년 1949년
제7대 1953년 2월 27일 1957년 2월 26일 1953년
제8대 1957년 2월 27일 1961년 2월 26일 1957년
제9대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
사회민족당 1961년 2월 27일 1965년 2월 26일 7년 227일 1961년
제10대 1965년 2월 26일 1968년 10월 10일 1965년
제11대

알렉산데르 둡체크
Aleksander Dubćek
사회민족당 1968년 10월 11일 1972년 1월 6일[14] 3년 87일 1968년
제12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Edward Gierek
사회민족당 1972년 1월 6일[15] 1972년 10월 10일 278일
제13대 1972년 10월 11일 1976년 10월 10일 4년 1972년
제14대 1976년 10월 11일 1980년 10월 10일 4년 1976년
제15대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Stanisław Kania
사회민족당 1980년 10월 11일 1984년 10월 10일 4년 1980년
제16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Wojciech Jaruzelski
사회민족당 1984년 10월 11일 1989년 8월 31일[16] 4년 325일 1984년
제17대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
무소속 1989년 9월 1일 1993년 8월 31일 4년 1989년[17]
제18대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Aleksander Kwaśniewski
사회민족당 1993년 9월 1일 1997년 8월 31일 4년 1993년
제19대 1997년 9월 1일 2001년 8월 31일 4년 1997년
제20대

알렉산데르 루카셴코
Aleksander Lukaszenko
사회민족당 2001년 9월 1일 2005년 8월 31일 4년 2001년
제21대 2005년 9월 1일 2009년 8월 31일 4년 2005년
제22대

레흐 카친스키
Lech Kaczyński
사회민족당 2009년 9월 1일 2010년 4월 10일[18] 221일 2009년
제23대

브워지미에시 치모셰비치
Włodzimierz Cimoszewicz
사회민족당 2009년 4월 10일[19] 2013년 8월 31일 3년 144일
제24대

빅토르 유셴코
Wiktor Juszczenko
사회민족당 2013년 9월 1일 2017년 8월 31일 4년 2013년
제25대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Jarosław Kaczyński
사회민족당 2017년 9월 1일 2021년 8월 31일 4년 2017년
제26대 2021년 9월 1일 2025년 8월 31일
(예정)
4년
(예정)
2021년

부통령

폴란드 부통령은 상원 의장직을 겸하며, 유사시 대통령을 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미국 부통령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지만, 정부의 제2인자로서 그 존재감과 무게감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과 부통령은 4년에 한번씩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한다. 만약 부통령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퇴한다면, 차기 부통령은 대통령이 임명하여 상원에서 인준을 받는다.

내각

폴란드 총리는 폴란드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며, 폴란드 내각은 폴란드의 총리가 조각한 장관들로 구성된다. 총리는 대통령이 임의로 정한 인사일 수 있으나 보통은 집권당의 당수가 맡으며, 이는 폴란드가 일정부분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받아들인 이원집정부제 국가임을 보여준다. 폴란드에서는 평시에는 총리에게 실권이 없지만, 동거정부가 수립되면 내치를 모두 총리가 맡아 실권이 총리에게 넘어간다.

내각은 총리 밑에 15개의 행정각부가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행정각부는 재무부,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문화진흥부, 교육부, 경제산업부, 에너지부, 과학기술부, 교통건설부, 노동부, 복지보훈부, 가정여성청소년부, 환경부, 농업자원부로 나누어져있다. 폴란드 제3공화국 시절에는 "관료 공산주의"라는 별명이 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체제 답게 그보다 더 많은 세부 부처가 존재했으나[20] 관료주의 타파를 위하여 1992년 17개로 재편되었고, 2000년 다시 복지부와 보훈부가 복지보훈부로 통합되고 교통부와 건설부가 교통건설부로 통합됨에 따라 현재의 15부 체제를 이루었다.

내각 인원은 모두 현직 국회의원이어야하며, 총리는 하원의 인준을 받아야 임명될 수 있다. 반면 장관은 총리가 임명하며 인준이 필요 없다. 대신 위법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되면 개별 장관에 대한 불신임이 가능하고 그보다는 아예 내각불신임을 통해 총리를 해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내각불신임은 전체 의원[21]의 1/2가 찬성하면 통과되면, 대통령은 의무적으로 의회를 해산시켜야한다.

사회민족당이 독점하고 있는 대통령직과 달리 내각은 야권이 차지한 적이 꽤 많은데, 가장 최근에는 2008년에 시민연합 출신의 내각이 수립되었고 그 외에도 2002년, 1990년 등 총 3번에 걸쳐 우파 야권이 내각을 차지하여 약 7년간 실권을 휘두른 적이 있다.

역대 총리 목록

국회

폴란드 국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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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단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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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라다 세임
각 정당별
그람시 재단 로고 반전.svg 그람시 재단 로고 반전.svg
최고 라다 세임
제3차 율리아 티모셴코 내각
2022.10.15~現
여당
연방 마르크스주의자 인민연합  36석 321석 
사회민족당
 33석 286석 
폴란드 인민당
 2석 28석 
야당
중도자유연합  25석 184석 
시민연합
 21석 132석 
민주좌파연합
 4석 43석 
녹색당
 0석 9석 
우리가 폴란드다  7석 71석 
인민의 일꾼
 7석 63석 
현대당
 0석 4석 
유대인의 집
 0석 4석 
비교섭단체  3석 24석 
십자군 동맹
 1석 12석 
혁명적 노동자당
 0석 6석 
자유당
 0석 3석 
무소속  1석 3석 
정원  70석 600석 

폴란드의 국회는 상원인 최고 라다(Najwyższa Rada)와 하원인 세임(Sejm)으로 나뉘어져있다.

최고 라다는 한국어로 옮기면 "최고 평의회", 즉 "최고 소비에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폴란드 제3공화국 체제의 유산이다. 사회주의 독재 정권 시절, 최고 라다는 150명의 평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라다는 그다지 쓸모가 없게 되었고, 독일의 상원이 그러하듯 지역의 대표성을 나타내는 기구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최고 라다는 민중의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는다. 각 공화국 별로 지역 의원, 시장 등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각 공화국 내에서 10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자치 공화국의 경우, 5명을 선출한다. 폴란드는 공화국이 6개, 자치 공화국이 2개이므로, 의원 정수는 70명이다. 선거는 5년에 한번씩 치러지는데 동시에 뽑는게 아니라, 각 공화국 별로 돌아가면서 선출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입법 권한은 세임이 맡게 되었다. 세임은 각 지역구의 국회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으로 구성된 600 의석이 정수이며, 예산 결정권, 총리 선출권, 내각 불신임권, 대통령 탄핵소추권 등 거의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상원을 거치지 않고 입법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상원을 거쳐야하는 법은 오직 연방 자체에 관련된 법 뿐이다. 또한 세임에서는 총리를 선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라다에 비해 세임이 더 우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국회의장은 세임에서는 의원의 투표로 선출하며 보통 최고령 의원이나 최다선 의원이 세임 의장을 맡으나, 최고 라다에서는 미국처럼 부통령이 의장을 맡는다. 이는 의회와 내각이 공화국 내치를 책임진다면 최고 라다는 국가 연방체 그 자체를 대표하는 기구로서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다.

정당 구도

민주화 이후로도 공산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989년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무소속인 레흐 바웬사가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단 한번도 야권이 대권을 잡지 못한 사회민족당의 일당우위 정당제 국가이다.

그러나 총선거에서는 자유주의 성향 야권이 여러번 집권하여, 1990년~1994년, 2002년~2004년, 2008년~2011년에 총리를 배출하였다. 폴란드는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 국가라 총리와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른 동거정부가 수립되면 실권을 총리가 가져간다. 허나 야권이 시민연합, 민주좌파연합, 십자군 동맹, 현대당, 폴란드 녹색당 등 워낙 다양한 정당으로 분리되어있고 모두 사회민족당에 비하면 당세가 형편없이 작아 야권 동맹 사이에서의 분란으로 인하여 연속 집권에는 계속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민족당은 경제는 진보, 사회민주주의 성향이지만, 사회적으로 민족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반면 야권인 시민연합은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경제 자유주의의 색체를 띄지만 사회적으로는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리버럴의 위치에 있다. 물론 민족에 대한 관점은 양당이 모두 "민족의 용광로"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워딩을 제하면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점이다. 시민연합 외의 야권 정당 중에서는, 사회민주주의와 진보 리버럴의 입장을 표방하는 서구식 케인지언 정당 민주좌파연합, 가톨릭 근본주의 정당인 십자군 동맹, 녹색 자유주의 성향의 폴란드 녹색당,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폴란드 혁명적 노동자당, 유대계 민족주의 정당 유대인의 집, 우크라이나 우월주의 정당인 자유당, 현대자유주의 성향의 현대당이 존재한다. 여권 정당 중에서는 농본사회주의 정당인 폴란드 인민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정당이 지리멸렬하다.

정당 목록

로고 정당명 이념 스펙트럼 하원 의석 창당
연방 마르크스주의자 인민연합
사회민족당 유럽공산주의
다민족 사회주의
좌익 286석 1892년
폴란드 인민당 농본사회주의
사회보수주의
중도 ~ 중도좌파 28석 1895년
독일계 선거 위원회 독일계 폴란드인 권익 중도 7석 1970년
중도자유연합
시민연합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중도 ~ 중도우파 132석 1996년
민주좌파연합 자유사회주의
제3의 길
중도 ~ 중도좌파 43석 2000년
녹색당 환경주의
녹색자유주의
중도 9석 1999년
우리가 폴란드다
인민의 일꾼 대중주의
자유주의
중도 63석 2021년
현대당 사회자유주의
중도주의
중도 4석 2015년
유대인의 집 유대계 폴란드인 권익 중도우파 4석 1989년

경제

그단스크 W. 시코르스키 기념 국립 제철소, 1963년
민스크 시내, 1985년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2019년
인구 1억 1,398만 7,400명 2022년, 세계 14위
명목 GDP 3조 491억 6,295만 달러 2022년, 세계 7위
PPP GDP 4조 6,438억 4,667만 달러 2022년, 세계 6위
1인당 명목 GDP 26,750 달러 2022년, 세계 40위
1인당 PPP GDP 40,740 달러 2022년, 세계 31위

PPP 규모 4조 6,400억 달러, 명목 GDP 규모 3조 400억 달러에 달해 명실상부한 중부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이자, 세계적 강대국이다. 유럽 내에서 PPP 순위는 독일에 이은 2위이고 명목 GDP 규모는 영국에 이은 3위이다. 세계 기준으로 볼 때는 각각 6위, 7위에 속한다. 1인당 소득은 PPP가 4만 달러, 명목으로 2만 달러 정도의 규모라 다른 유럽의 국가에 비해서는 밀린다. 1억명이 넘는 막대한 인구 수를 고려할 때, 타 유럽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1인당 소득이 올라가면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 서는 것도 가능하다.

폴란드 제3공화국 당시 육성된 중공업 사업이 경제의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다. 폴란드는 유럽 최대의 중공업 대국으로, 유럽 내에서 생산되는 강철의 55%가 폴란드에서 생산된다. 중공업의 강세와 경공업의 부실함은 폴란드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1987년 경제 개방과 2010년 EU 가입을 통해 경공업 발달과 동시에 서비스업도 적극 육성하여, 2018년에 들어서는 폴란드 총 산업중 서비스업이 60%를 차지하는 선진국형 산업 구조를 띄었다. 제조업중에서는 자동차, 전기전자, 항공, 기계 등 중공업이 공산독재 시기부터 현재까지 중점 육성 산업으로 발전되고 있으며, 화학,항공, 기계, 농업 분야의 R&D에도 상대적으로 강점을 보인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이어받고자 정책적으로 전기자동차 개발, 무인항공기 개발 등 다양한 시도들을 국가 주도로 계획하고 있다.

2010년 EU 가입 이후 시장 개방과 외국인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제조업, 건설업, 숙박요식업 및 금융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다. 이는 투자환경 호전과 경기침체에서도 꾸준한 성장을 구가하는 탄탄한 경제 기반이 되는 1억 1,000만 명에 달하는 EU 최대의 거대 내수시장, 낮은 법인세율, 수출 증가 등의 요인이 외국인 투자가들을 폴란드로 이끌며 유럽의 생산 기지로서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2010년대 이후, EU 기금을 적극 활용해 인프라, 신재생에너지 및 환경산업 등을 개발하는 데에도 주력해왔다. 특히, EU 가입으로 수출 여건이 개선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활성화되면서 기계, 설비 등 자본재 산업의 생산증가율이 현저하게 성장하였다. 이 밖의 건설업, 숙박요식업 및 금융업 등도 EU 가입이후 급성장한 대표적인 산업이다.

세계 최대의 농업 대국중 하나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덕택이다. 유럽 내 밀 생산량의 87%를 우크라이나 하나가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기준으로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전세계 밀 생산량의 30%를,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은 전세계 감자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국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1차 산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고, 민주화 이후로 폴란드 정부가 이러한 높은 농업 생산량을 바탕으로 산업 다각화를 꾀하려 하기도 하였다.

관광업도 의외로 꽤 비중이 있다. 사회주의 시대의 모습[22]을 아직도 어렴풋이 갖추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소련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2020년 GDP기준 폴란드의 산업 구조를 살펴보면, 공업이 21.3%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무역 및 상업 14.5%, 농업 9.6%, 건설업 5.8%, 운송 및 보관업 5.3%, 전문과학기술업 7.4%, 공공행정업, 교육 등 서비스가 12.2%, 부동산업 4.3%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화폐

폴란드의 공식적인 화폐인 즈워티(złoty)는 유로, 파운드 스털링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화폐이다. 2022년 기준으로 1즈워티는 대략 300원 정도의 가치를 한다. 1즈워티는 0.2유로, 1유로는 5즈워티 정도의 가치이다. 수수료는 현금 살때와 팔때 동일하게 8%이다.

영어식으로 읽어 "즐로티"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이 표현이 더 잘 알려져있지만 공식적이고 올바른 표기는 즈워티이다. 즈워티는 을 뜻하는 명사 "złoto"에서 따온 것이다. 즈워티는 복수형에서 złote 혹은 złotych로 표기하지만 복잡성으로 인해 해외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는 표현이 사용된다.

즈워티화는 폴란드 마르크를 대체하기 위해 1919년 독립 후 통용된 화폐로, 1923년부터 유통되었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의 체제 전환이 이뤄진 1927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폴란드의 경제력이 동구권 국가중 압도적으로 뛰어났던 바, 일반적으로 동구권에서 폴란드 즈워티는 소련 루블과 더불어 사실상의 기축 통화로서 사용되었으며, 1940년대 한번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헝가리 펭괴를 포기해야했던 헝가리에서는 헝가리 포린트가 시장에 풀릴때까지 즈워티를 포린트와 함께 공동 통화로서 사용했다.

유로화 도입 논의는 거의 없다. 유로화 사태의 정국에 가입한지라 국내적으로 유로화에 대한 반감이 심했으며 폴란드는 경제 규모가 나름대로 되는 이유이기 때문에 유로화에 매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원

이아시 시내에서 바라본 이아시 유전의 모습, 2018년

유럽에서 셋 뿐[23]인 산유국이다. 또한 유럽에서 4번째로 많은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폴란드에서 많은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시추되는 지역은 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일하다. 이 지역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 루마니아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침략에 대한 사죄로 받아낸 영토였다. 그러다가 1962년, 방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 사실이 알려지며 정부에서 집중적인 투자에 들어갔고, 1969년 이아시 유전[24]이 개발되며 폴란드는 루마니아와 스칸디나비아에 이은 유럽 제3의 산유국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단숨에 노다지의 땅으로 불리우며 경제와 인구가 폭발하는 현상을 맞이했다.

1973년과 1979년 2차례 있었던 오일쇼크 당시에는, 루마니아와 함께 사실상 동유럽 유가 안정의 핵심을 맡았으며, 석유를 무기로 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의 외교 협상까지 성공했다. 1987년 오트바르치에 이후로는 통제되었던 석유 및 천연가스 수출이 대대적으로 민간 기업의 투자를 받음에 따라, 1990년대 초반에는 루마니아와 스칸디나비아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가스-석유 수출국이 되기도 하였다.

석유 매장량이 많지는 않았던만큼, 폴란드에서는 연방 차원으로 석유와 천연가스의 무분별한 시추를 막고 있다. 따라서 시추 자체가 정부의 통제를 어느정도 받는 현재는 순위가 다소 떨어져[25], 이집트와 비슷한 수준인 하루당 49만 배럴(세계 28위)의 석유와, 카자흐스탄과 비슷한 수준인 연간 115억 입방미터(세계 19위)의 천연가스를 수출중이다. 유럽 내에서는 각각 스칸디나비아에 이은 2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와 네덜란드, 독일에 이른 4위이다.

폴란드 석유 사업의 핵심은 석유 시추도 있지만 동시에 정유 사업이기도 하다. 특히 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정유 사업은 여전히 핵심 경제 산업으로 작용하고 있다. 차우셰스쿠의 폭정으로 인해 루마니아의 정유 사업이 사실상 몰락함에 따라, 루마니아의 석유가 몰다비아 지역의 정유 시설로 대부분 옮겨진 것을 넘어, 현재는 몰다비아 지역 정부가 우선적으로 루마니아의 시추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서 시추되는 소량의 석유도 거의 모두 폴란드로 옮겨져 정유되고, 몰다비아 지역 정부는 이를 통해 매년 엄청난 수익을 벌고 있다.[26][27]

에너지






폴란드의 에너지원 비율      화력 (56%)     원자력 (33%)     재생 에너지 (7%)     기타 (4%)

중부 유럽 최대의 산유국인만큼 화력 에너지의 비중이 높다. 그렇다고 원자력 발전의 비중이 낮은 것은 아닌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지역 정부에서 지난 80년간 지역 사업으로 원자력 에너지를 밀어줘서 우크라이나 지역 에너지의 90% 이상이 원자력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들은 대부분 화력이 우세하고 원자력이 보조하는 정도이다. 반면 화력 에너지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은 단연 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폴란드 내에서는 자르노비에츠 원자력 발전소, 오스트로비에츠키 원자력 발전소, 이그날리노 원자력 발전소(이하 폴란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흐멜니츠키 원자력 발전소, 오데사 원자력 발전소,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 리우네 원자력 발전소, 남우크라이나 원자력 발전소(이하 우크라이나), 파빌로스타 원자력 발전소[28](이하 리보니아) 등 10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다. 또한 폴란드는 유럽 최대의 원자력 기술 수출국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직은 준 선진국이다보니,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재생 에너지가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지 않다. 여타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일본(7%), 호주(8%)와 비슷하고, 영국(14%), 독일(20%)에 비해 낮으며, 한국(2%)보다는 높다. 큰 강이 많지 않고 평원 지역이 대부분이라 풍력, 수력 발전을 하는데 애로 사항이 있어 대부분의 재생 에너지는 태양열로 생산된다.

한국에서도 폴란드의 에너지에 대해 많은 뉴스가 나오는데, 리투아니아 지역에 지어질 발전소에 한국이 화력 에너지 기술 수출을 하기로 계약을 맺으며 착착 진행되며 대형 사업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2022년 가을 미국 회사가 표절을 이유로 소송을 걸어 계약을 파기시킨 다음, 다른 미국 회사가 대신 계약을 맺으며 사업이 공중으로 떠버려 많은 국민들이 분개한 바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소송 절차가 3월부터 진행 중이었는데 도대체 윤석열 정부는 팔짱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냐는 식의 책임론[29]도 거세게 제기되었다.

과학기술

1976년 인터코스모스의 일환으로 우주를 비행한 폴란드의 첫 우주인 미로스와프 헤르마셰프스키(오른쪽)

사회

종교

폴란드의 국가별 종교 구성 지도
폴란드의 종교 구성
가톨릭교
  
38.10%
정교회
  
32.95%
개신교
  
1.85%
유대교
  
1.60%
기타 종교
  
0.39%
무종교
  
25.10%

폴란드은 다민족 국가이자 다종교 국가이다. 사회주의 국가인만큼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종교는 없지만, 국민의 70% 이상이 기독교를 믿는, 사실상의 기독교 국가이다. 사회주의 정부 시절에도 종교에 대한 탄압은 거세지 않았으며 현재 프랑스 수준의 라이시테를 추구했다. 폴란드 제4공화국 시대에 들어서는 라이시테보다도 더 온건한 세속주의로 선회하였다. 첫 동구권 출신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 출신인 것도 이 점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총 4개의 주요 종교가 존재하며, 각 구성국별로 우세한 종교가 다 다르다. 8개의 구성국 중, 특정 종교의 신도가 인구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국가는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개신교, 38.6%)이 유일하다. 다른말로 나머지 국가는 전부 특정 종교 신도가 인구의 과반을 넘을 정도로 종교적인 정체성이 명확하다는 소리.

1945년 이후 폴란드의 종교 구성

4대 종교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에서 우세한 가톨릭교이다. 그 다음은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 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우세한 정교회이다. 두 종교는 각각 전국적으로 4,342만 5,554명(38.10%), 3,756만 759명(32.95%)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유대교개신교 역시 4대 종교에 포함되나, 교세는 두 종교에 비해 미약하다. 유대교유대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에서, 개신교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만 우세하며 두 종교는 각각 182만 6,654명(1.60%)와 210만 9,231명(1.85%)의 신도 수만을 보유한다. 따라서 정교회나 가톨릭에 비해서 그 비중은 낮고 지역 종교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외에 44만 9,398명(0.39%)은 이슬람교 등 기타 종교를 믿는데 수치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이슬람교로 신고하지 않는 불법 체류자가 많기 때문에, 인구의 1.5% 정도가 실질적인 이슬람 신도로 파악된다.

정교회가 동부에서, 가톨릭이 서부에서 강세를 띄기 때문에 가톨릭과 정교회의 종교 갈등은 지역 갈등으로도 비화된다. 이 때문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집권기 때부터 폴란드는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강력한 라이시테(세속주의) 정책을 취해왔다. 라이시테 정책에 따라,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선교 활동, 종교적 상징의 게시 등이 금지되며 강력한 정교 분리의 원칙을 택하고 있다. 1940년대 이후 공산 정권에서 국가 무신론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현재도 무종교인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전체 인구의 25.1%(2,861만 5,805명)가 무종교인이다.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2035년에 접어들면 폴란드 최대의 종교는 "무신론"이 될 전망이다.

언어

Językiem urzędowym Polski jest język, którym posługują się Polacy. Każde państwo członkowskie Polski ma prawo wskazać swój język urzędowy.
폴란드의 공식적인 언어는 폴란드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정한다. 폴란드의 각 구성국들은 그들의 공용어를 지정할 권리를 가진다.

폴란드 사회주의 헌법 제35조

폴란드에는 공용어가 없다. 헌법에서도 "폴란드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폴란드의 공용어이다"라고 애매모호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대신, 폴란드의 구성국들은 법으로서 자신들의 공용어를 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연방 차원에서의 공용어로 여겨진다.

그러나 공용어가 없었음에도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소련처럼, 폴란드도 법적 공용어가 없을 뿐이지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폴란드어가 일상적인 공용어로 여겨지고 있다. 국민들의 약 87%가 폴란드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정치인들도 그들의 언어를 폴란드어로 삼는다. 헌법과 국가, 국가 표어, 국호 등은 모두 폴란드어가 우선시되어 표기되고 있다. 따라서 폴란드의 사실상의 공용어는 폴란드어이다.

각 지역별 공용어는 폴란드어(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어(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어/러시아어(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어(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어(몰다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어(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어(독일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 이디시어(유대계 폴란드인 자치공화국)으로 총 9개이다.

인명 표기

폴란드는 법에 따라 인명을 각 국가의 언어로 표기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연방 단위로 활동하는 인사들, 즉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정치인들은 대체로 폴란드어 식으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곤 하는데, 이는 폴란드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구성국 뿐만이 아닌 모든 구성국을 대표한다는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란드의 유명 정치인들은 대게 폴란드어와 모국어로 된 2개의 이름이 있다. 이름은 폴란드식으로 고치고, 성은 그대로 두되 폴란드어의 발음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인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Володимир Зеленський/Volodymyr Zelenskyy)는 연방 단위에서 브워지미에시 젤렌스키(Włodzimierz Zelenskij)로 활동하며, 벨라루스인인 알략산드르 루카셴카(Алякса́ндр Лукашэ́нка/Alexander Lukashenko)는 알렉산데르 루카셴코(Aleksander Lukaszenko)로 활동하는 식이다.

반면 축구 선수 등 문화인들의 경우 폴란드어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자신의 모국어 이름을 사용한다.

다민족 사회주의

다민족 사회주의(폴란드어: Socjalizm wieloetniczny, 영어: Multi-ethnic socialism) 혹은 마르크스-피우수트스키주의(폴란드어: Marksizm-Piłsudskizm, 영어: Marxism-Pilsudskism 막시즘-필서드스키즘[*])는 폴란드의 공식적인 이념이자 국가의 이데올로기이다. 폴란드의 공식적인 국명(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에도 다민족 사회주의가 명시되어있을만큼, 다민족 사회주의는 단순한 이념 그 자체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민족 사회주의는 피우수트스키의 국정 철학을 일컫는 말이며, 그의 생전에 다민족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규명된 바는 없으나, 그를 후계하는 정치가들이 이를 다듬고 정리하며 국가의 국시로서 삼았다. 또한 피우수트스키는 사회주의자일지언정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보기는 힘든 인물이었으나, 194~50년대 레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노선과 피우수트스키의 노선을 배합하며 현재와 같은 마르크스-피우수트스키주의가 창시된 것이다.

이 이념은 민족주의세속주의를 바탕으로 둔 자주적 사회주의 노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에 있어 민족적인 요소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민족사회주의와 달리 특정 민족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으며 각 민족의 조화와 화합,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하여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본다. 더불어 각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민족의 위에 있는 개념인 "다민족 사회주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주입시키려 한 것이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민주의와도 연관되어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이매뉴얼 월러스틴은 폴란드의 다민족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쇼비니즘을 뛰어넘기 위해 만들어진 또다른 쇼비니즘으로, 국가가 어떻게 민족이라는 개념을 창시하고 이를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주입시키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 외의 부분은 다민족 사회주의 문서를 참조.

문화

문학

동구권 최대의 문학 강국중 하나로, 여러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노벨상이 만들어진 이후, 현재까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1924년, <농민>), 체스와프 미워시(1980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96년, <끝과 시작>),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올가 토카르추크(2018년, <방랑자들>) 등 5명[30]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음악

음악가중에서 대중들이 가장 잘 알법한 인물은, 전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인 프레데리크 쇼팽일 것이다. 마주레크와 폴로네즈를 비롯해 여러 폴란드의 민속 음악들을 클래식으로 재구현하였고, 수익금의 상당수를 폴란드 독립운동에 사용하였을 정도로 애국심이 깊은 음악가였다. 전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만큼 쇼팽은 폴란드의 음악을 넘어 문화 그 자체를 대표하는 인사로서 자주 여겨진다.

영화

영화로도 발달해있는 나라이다. 1958년의 고전작 <재와 다이아몬드>와 1981년작 <철의 인간>을 감독한 안제이 바이다, <살인에 대한 짧은 필름>[31]으로 유명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달빛 아래서>의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컴 앤 씨>[32]엘렘 클리모프[33] 등이 유명하다. 대중적으로 제일 잘 알려져있는 것은 <물속의 칼> <차이나 타운>과 <피아니스트>를 감독하고 상도 여러개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아동성추행과 도피 이력으로서 가장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가 폴란드 제3공화국 시절 내내 이루어졌고, 소련에 비해 훨씬 문화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을 보장하기도 하였으므로 폴란드의 영화는 학문적으로도 상당히 발전한 편이다.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던 폴란드 영화 박물관을 1967년 예전의 5배 규모로 새로 지은 것은, 폴란드 정부의 영화에 대한 열의를 보여준다. 폴란드는 3공화국 정부나 지금이나 국가 차원에서 영화 제작을 일종의 예술로 생각하고 밀어주고 있으며, 신인 감독들이 재정적으로 소외되지 않도록 예술 영화를 만드는 돈을 국가의 예산으로 일부 지원하고 있다.

외교

Jak wiecie, każda decyzja na Starym Kontynencie promieniuje z Europy Środkowej, a odkrycia w Europie Środkowej wpływają na Stary Kontynent.
A losy Starego Świata rozstrzygną się także w Europie Środkowej. W tych Stanach Zjednoczonych Polski.
대통령께서도 아시겠지만, 구대륙의 모든 결정은 중부 유럽에서 뻗어 나가고, 중부 유럽의 발견은 곧 구대륙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구대륙의 운명 역시 중부 유럽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이 폴란드 합중국에서 말입니다.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1979년 미파 정상회담에서 지미 카터에게.

폴란드 제3공화국 시절의 외교는, 폴란드 귀족 출신의 외교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와 벨라루스 출신의 안제이 그로미코가 쌍두마차로 이끌었다. 브레진스키가 탈소, 친서방의 매파 외교를 주도했다면, 그로미코는 친소, 중립의 비둘기파 외교를 주도했다. 그로미코가 1955년부터 1980년까지 총 25년에 걸쳐 폴란드의 연방 외교부장관 직책을 맡았고, 브레진스키는 1980년부터 1989년까지 9년간 외교부 장관을 맡았다.[34] 1976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그로미코가 외교부장관으로, 브레진스키가 대통령 외교안보비서관으로 활약하였다. 두 실력있는 외교관의 외교는 폴란드 제3공화국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중부 유럽의 맹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반적으로 냉전에 있어, 소련과 미국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브레진스키와 그로미코의 외교적인 방향성은 헨리 키신저브렌트 스코크로프트에 못지 않게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외교학 또는 국제관계학의 서적에서 폴란드의 냉전 시절 외교는 중국이나 유고슬라비아, 서독 등의 국가들을 앞서고 미국과 소련 다음가는 분량을 차지한다.

대서방 외교

1979년 지미 카터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회담 중 찍힌 사진

유고슬라비아 정도는 아니더라도 폴란드는 나름대로 "열린" 외교를 표방하던 동구권 국가였다. 1979년에는 데탕트의 일환으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과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폴란드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진 후 양국간 친선 협정을 맺었고[35], 아예 냉전이 붕괴되기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의 정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폴란드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동구권의 붕괴와 폴란드의 민주화 이후로 폴란드는 자연스럽게 서방 국가와 외교적 관계를 복구시켜나갈 수 있었고 민주화 조치 1년만인 1988년에는 대한민국과 공식적으로 수교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구권중에 서구권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오히려 1987년 오트바르치에 이후로는 동구권적인 외교를 계속 이어나가면서 서방 세계와 마찰을 겪기도 하였다. NATO 가입 문제, EU 조약 문제 등 큰 일부터 난민 문제 조정 같은 사소한 일까지 서방과 종종 충돌하는 유럽의 문제아가 폴란드이다.

그럼에도 1987년 개혁개방 후 서방과의 외교 관계는 차차 풀려나가고 있으며, 2010년에는 EU에도 가입하였다. 2014년 크림 반도 위기 이후로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 문제가 현실화되면서 이전보다 훨씬 서방과 협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외에 서방과의 외교에서 나름대로의 이점이 되는 것은 영국과 미국 등의 국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폴란드계 이민자들의 존재이다.

대러외교

국민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가진 감정은 안좋다. 역사적인 이유가 가장 크고 그 다음의 이유는 현실화되고 있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다. 2014년 크림 반도 위기 이후 폴란드 내 혐러 정서는 극에 달하였으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반러에 기반한 네오나치 운동의 준동이 심화되고 있다.

여담

각주


  1. 188개국 중 53위
  2. 연방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한다.
  3. 1987년 이전에는 사회주의통제 경제에 가까웠다.
  4.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경보.
  5. 2014년 크림 반도 위기로 인한 경보.
  6.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 출신의 인물로, 非마르크스주의 계열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7. 여기서 말하는 마르크스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닌 당시 독일의 수상이었던 빌헬름 마르크스를 의미한다.
  8. 이때 폴란드-소련 관계는 현재의 중국-러시아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9. 세부적으로는 독립국가로 독립이 42.6%, 폴란드 잔류 39.9%, 러시아 연방 가입이 17.5%였고, 2차 투표에서 독립 찬성 53.3%, 독립 반대 46.7%로 독립 국가 건국이 결정되었다.
  10. 야심차게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실업률 10%과 인플레이션율 1000%를 기록해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고 말았다.
  11. 물론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인들이 거의 대부분 러시아로의 합병을 지지하는 만큼,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문제이다.
  1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한 무투표 연임
  1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한 무투표 연임
  14. 재임 중 작고
  15. 전임자 알렉산데르 둡체크 작고로 인한 임기 승계
  16. 1989년 폴란드 대통령 선거의 특수로 인한 325일 초과 집권
  17. 폴란드의 첫번째 자유 선거
  18.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로 인한 작고
  19. 전임자 레흐 카친스키 작고로 인한 임기 승계
  20. 가령 에너지부는 원자력 에너지부, 석탄 에너지부, 석유산업부가 통합되어 생겨났다.
  21. 재적 의원 기준이 아니다. 무조건 정원의 과반을 넘어야한다.
  22. 바르샤바 오켕치에에 위치한 공항 이름이 바르샤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국제공항이고 입국장에는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의 초상화가 크게 걸려있어 사진 명소이다.
  23. 나머지 두 나라는 스칸디나비아루마니아.
  24. 개발 당시에는 우방국 루마니아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65년 사망한 루마니아의 전 지도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이름을 따 이아시 G. 게오르기우데지 유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1989년 루마니아 공산주의 정권 붕괴 이후 루마니아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름을 현재와 같은 단순 지명이 붙은 이름으로 교체했다.
  25. 전성기였던 1990년대에는, 하루 140만 배럴을 생산해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갔다.
  26. 몰다비아 지역의 1인당 GDP는 폴란드 내 구성국중 최고 수준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11개 구성국중 10위였지만, 불과 60년만에 8개 구성국중 1위로 올라섰다.
  27. 루마니아 입장에서 몰다비아를 폴란드에게 할양한건 거의 러시아의 알래스카와 같은 처지였던지라, 루마니아 극우파의 단골 레퍼토리가 몰다비아 반환이다. 그러나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의 폴란드 침공으로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사망하였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 몰다비아가 폴란드에게 주어진 것이었기에 루마니아 정부 뿐만 아니라 국민 차원에서도 몰다비아 반환을 포기하는 입장이 많다.
  28. 리보니아 지역 정부와 라트비아 정부가 공동으로 건설한 발전소이다.
  29. 윤 대통령은 "폴란드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조정하려 하였다"라고 주장했으나 정작 카친스키 대통령과는 단 20초 정도 만 회동하였다는 점이 드러나며 주장에 신뢰도를 잃었다.
  30. 건국 이전까지 포함한다면, <쿠오바디스>로 노벨문학상을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대홍수>)까지 포함되어 6명이다.
  31. 까이에 뒤 씨네마 선정 1988년 영화 1위
  32. Letter Box Top 250 2위
  33. 볼고그라드 출신이지만 조금 더 자유로운 영화 활동을 위해 1970년대 이래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34. 임기는 그로미코에 비해 짧지만, 브레진스키는 사회민족당의 열성 당원으로, 1989년 외교부장관 퇴임 이후에도 2017년 사망할때까지 무려 28년간 민족당 외교의 실세로 활동했다.
  35. 그런데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이 있는 카터 대통령 답게, 기에레크 폴란드 대통령은 외채 문제로 촉발된 경제 위기에 잘못 대처하여 이듬해인 1980년 불명예스럽게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