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 카렐리아 라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 연방
공화국 구성 국가
[ 펼치기 · 접기 ]

라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구성국
핀 카렐리아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
Sozialistische Räterepublik Finnen-Karelinen
Suomen-Karelin sosialistinen neuvostotasavalta
정부기 민간기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Kaikkien maiden proletaarit, liittykää yhteen!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상징
국가 인터내셔널가
우리의 땅
국조
큰고니
국화
은방울꽃
역사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 성립 1918년 1월 29일
핀란드 라트 연방 가입 1922년 12월 30일
카렐리아 인민위원회 설치 1946년 1월 2일
핀란드-카렐리아 연합 성립 1947년 7월 15일
카렐리아 라트 연방 가입 1950년 9월 15일
지리
[ 펼치기 · 접기 ]
수도
헬싱키 (최대도시)
면적
510,545km2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인구
총 인구
5,883,472명 (2024년)
밀도
11.5명/km2
민족 구성
핀인 (83.0%)
독일인 및 스웨덴인 (10.1%)
러시아인 (4.4%)
기타 (2.5%)
정부 지정어
핀란드어, 독일어
지역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종교
국교
없음 (세속주의)
분포
무종교 (78.1%)
기독교 (19.1%)
기타 (2.1%)
HDI
0.909 (2023년, Very high)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라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역 평의회 의장
(국가 원수)
사울리 니니스퇴
(Sauli Niinistö)
지역 당 서기장
(행정 수반)
안티 린네
(Antti Rinne)
입법부
핀 카렐리아 라트
여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경제
[ 펼치기 · 접기 ]
경제 체제
사회주의계획 경제
GDP
(명목)
전체
$2,594만 4,938억
1인당
$44,098
화폐
라트 연방 탈러 (RTL, $)
단위
[ 펼치기 · 접기 ]
법정 연호
서력 기원
시간대
GMT+03:00
도량형
SI 단위
ccTLD
.fk
국가 코드
246, FK, FNK
전화 코드
+358
위치

지도를 불러오는 중...

개요

라트 연방의 구성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함께 라트 연방의 4대 창립 멤버 중 하나이다.

역사

핀란드는 오랫동안 핀란드 공국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핀란드도 덩달아 독립을 시도했고, 10월의 공산주의 혁명의 여파가 핀란드에도 미쳐 핀란드에 사회주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1918년 핀란드 총선거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사민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나, 만네르하임 등의 보수파는 이에 불복했다. 이에 따라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약 4년간의 핀란드 내전을 치루게 되었다. 핀란드 내전은 초기에는 러시아 군사 고문단의 지원을 얻은 백군파가 우세했으나, 주요 공업 지대를 점령한 사민당의 적군이 점차 우세를 잡아가며 적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1922년 12월 30일, 핀란드는 핀란드 라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라트 연방에 가입했다.

핀란드는 독일과 매우 지리적으로 떨어져있어서, 배를 타고도 며칠이나 가야 당도할 수 있었다. 때문에 핀란드가 라트 연방의 가입국가였다고 하더라도 오랜 기간 독자적인 국가처럼 기능했으며 헝가리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독일 본국으로부터 이질감이 큰 편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래서 이 시기 라트 연방의 체제가 단일 국가라기보다도 국가연합에 가까웠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으며, 수도 헬싱키가 함락되며 1940년-1944년까지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다. 러시아는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국 핀란드 공화국을 세우고 수많은 노동조합원, 공산당원, 유대인, 사미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핀란드인들은 러시아의 강점에 저항해나갔으며, 1944년 독일군이 핀란드 연안에 상륙한 북방의 사자 작전을 통해 1944년 7월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1]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핀란드는 러시아 본토의 카렐리아인 거주지까지 병합하여 종전의 2배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라트 연방 내에서 가장 빈궁한 지역 중 하나였지만, 연방 차원에서의 산업 투자를 통해 점차 부국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신속 가정용 전기, 부품 혁신 및 배터리 기술(Nopea Oikosähkö Komponentti Innovaatio Akkuteknologia; 이른바 NOKIA)이라는 국영회사를 설립해, 라트 연방 최대의 신흥 전자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오울루 지방에 IT 국영 사업 투자를 하고 있다.

인구

민족구성

2024년 기준 핀란드 SRR 인구 통계
전체 5,883,472명 (2024년)
[ 펼치기 · 접기 ]
핀란드인 4,589,108 (78.0%)
독일인 594,231 (10.1%)
러시아인 494,212 (8.4%)
유대인 105,902 (1.8%)
사미인 82,369 (1.4%)
기타 민족 17,650 (0.3%)

인구의 절대다수가 핀란드인(핀인+카렐리아인)이다. 러시아인들은 전후 핀란드가 되찾은 카렐리아 지역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독일인들은 전자 산업 종사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 약 18세기 경부터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10만여명의 북방 유대인[2]과, 북부 혹한 지역에서 원시적 수렵,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미인이 주요 소수 민족이다. 사미인들은 원시인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사실 현대적 주택에서 사는 사미인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핀란드의 발전된 전자기술 덕택에 수렵 생활을 하는 사미인들이 스노모빌을 타고 순록 떼를 몰거나 핸드폰 GPS로 집을 찾아가는 일이 근 10년간에는 드물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해외에서는 전자산업보다도 강제 수용소로 악명 높은데, 겨울철에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라플란드 지방의 기후 때문에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100년동안이나 범죄자들의 수용소로 절찬리에 활용되고 있다. 게다가,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 수가 거의 0에 수렴해 형무소 건설로 인한 현지 주민과의 마찰도 없는 수준이다.

라플란드는 겨울이 춥고 눈도 많이 오는 지역이지만 무엇보다 겨울이 7개월이나 이어지고 여름철 날씨가 1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일이 드물어 유럽에서도 혹한지 중의 혹한지로 꼽히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형무소가 세워진 곳들은 근방을 떠돌며 이끼, 열매 등을 채집하며 살아가는 극소수의 사미족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살지 않는 혹한지이다. 사미족들은 교정공무원과 수감자들을 국적 가리지 않고 "독일에서 온 사람들"(duiskkas, 뒤스카스)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은 형무소에 관심이 없어하는 편이다. 다만 새 교정공무원이 사미족 마을을 방문하면 있는 힘껏 대접하는 문화가 있다.

이른바 게유스(Gejus)라고 불린다. 게유스는 "국가보안부 교정노동수용소 제2총국[3]"(Zweite Generaldirektion des Justizvollzugsarbeitslagers des Ministeriums für staats Sicherheit)의 약자이다.

1930년대 대테러가 활성화되었을 때에는 비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으로만 200여개의 강제 형무소가 핀란드 지역에 존재했다. 전성기 때에는 무려 5만 명이 이곳에 갇혀 있었다.[4] 헤르만 괴링, 오토 벨스, 쿠르트 슈마허, 쿤 벨러 등 저명한 정치범들도 이곳에 수감되었는데, 대부분은 혹한의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1960년대까지도 약 40개가 잔존하고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이후 관료주의적 국가폭력 기구라는 지적이 대두되어 점차 사라지다가 1998년 니콜라스 네메트 서기장의 지시로 정치범을 수용하는 형무소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5] 그러나 여전히 흉악범을 수용하는 형무소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또 슈타지 측에서 반체제 인사를 흉악범으로 위장시켜 몰래 몰래 수감시킨다는 소문도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살인 혹은 횡령 등 중죄로 10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은 죄수만 이곳에 수감될 수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강제 노동 교화소는 다음 7곳이다.

총 수감 인원은 2024년 기준으로 1,000~1,400명[6] 정도로 추산되며, 정확한 수치는 기밀이다. 현재도 슈타지가 부분적으로 관여하고 있기는 하나, 2000년 이후 직접적인 관할권은 슈타지에서 라트 연방 내무부라트 연방 법무부로 넘어간 상태이다.

인간적인 대우조차 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악명이 있지만, 최소한 현재는 공식적으로 꽤 좋은 대우를 해준다고 한다. 이곳에 수감된 적이 있는 한 세르비아 마피아 조직원에 의하면[7], 8시간 노동제, 주 5일 노동의 주 40시간 노동제 원칙을 준수하고 있고 밥도 잘 나온다고 한다. 애초에 라플란드 지역이 최근 산타클로스 관련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법무부 측에서도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8] 하지만 기본적으로 7~8개월에 달하는 겨울로 인해 그냥 누워만 있는 것도 중노동 수준이라 대부분의 범죄자는 물론 형무소 간수들도 이곳으로 배치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근무자들은 다른 노동교화소 근무자의 무려 3배에 달하는 연봉을 받는다고 알려져있다.

칼도아이비 지역에 위치한 3곳의 형무소는 그중에서도 최악의 입지를 가진 곳으로 불리는데, 이 근방 20,000km2에 사람이 사는 작은 마을조차 없을 정도이다. 가장 가까운 마을은 직선 거리로 140km 떨어진 7,000명 규모의 소도시인 이나리이다. 조선으로 치면 서울에서 사리원까지의 거리에 인적조차 찾을 수 없는 셈. 기후적으로도 7월에 영하의 날씨를 기록하는 곳이고, 나무조차 자랄 수 없어 무수목 기후로 분류된다. 때문에 탈옥도 거의 불가능하다. 애초에 탈옥을 하더라도 간수들이 굳이 잡으러 가지 않는데, 너무 추운 혹한의 기후이고 교정 공무원을 빼면 근방 수백km에 사람 흔적도 찾을 수 없어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얼어 죽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교도소에서 탈옥한 사람은 1927년부터 2021년까지 총 90여년간 단 8명 뿐이었는데, 그중 5명은 3km~7km 떨어진 곳에서 얼어붙은 시체로, 2명은 불과 수백미터 근방에서 늑대에 의해 시체가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9]


  1. 스빈후부드 대통령이 1944년 2월 서거하면서 이미 핀란드 파시스트들은 구심점을 잃은 상태였다.
  2. 다만 대다수는 20세기 러시아 포그롬을 피해 옆나라로 도망친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반역자 취급을 당했는데, 2차 대전 당시 핀란드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유대인 2만 명 중 약 40%인 8,000여명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전후 유대인 공동체가 복원되었고, 인근에 위치한 유대인 SAR의 존재로 오히려 전전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유입되고 있는 추세다.
  3. 슈타지 제2총국이 대내 방첩을 담당하는 국이라 그렇다.
  4. 이 자료가 참이라면, 핀란드 북부는 당시 상주 인구 97.4%가 수감자였던 셈이 된다.
  5. 공식적인 마지막 수감자는 뮌헨 올림픽 테러의 배후 조력자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 테러리스트 알리 하산 살라메(علي حسن سلامة)이다. 사형 판결을 받고 장기수로 수감되어있었으며, 1998년 11월 17일 슈타지 국장의 지시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6. 한 노동교화소 당 150~200명 정도가 수감되어있다.
  7. 경쟁 조직원 살해 가담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가, 모범수로 징역 13년차였던 2019년 가석방되었다. 이후 마피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이름을 숨긴 채 본국에서 재활 공무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8. 물론, 형무소는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 위치와는 수백km나 멀리 떨어져있기에 일반 관광객이 형무소 관계자 혹은 수감자와 마주칠 가능성은 아예 없다.
  9. 나머지 1명은 현재까지도 행방이 묘연해 실종 처리 되었는데, 게유스에서 탈옥한 사람 중 실제로 성공한 몇 안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체는 체코-폴란드인 혼혈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가톨릭 성향의 해방 조직을 이끌었던 1949년 생 브와디스와프 체케르리츠스키(Władysław Čekerližski). 1976년 징역 3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는데 1981년 1월 10일 탈옥했다. 시체는 커녕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수들 사이에서는 그가 근방을 떠돌며 채집 생활을 하던 사미족 원주민 마을로 흘러들어가 아직도 남 몰래 순록을 키우며 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전설에 대부분 회의적인 편인데, 라트 연방의 촘촘한 소수 민족 관리 체계 상 그가 발각되지 않을 가능성은 극히 드물며, 무엇보다 탈옥 당시 영하 45도가 넘는 엄청난 강추위로 인해 교정 공무원들도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그가 몇백미터 가지 않아 얼어 죽은 후 시체가 12m 두께의 눈에 파묻혀 발견되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