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세계관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정리한 문서이다.
라트 연방
로자 룩셈부르크
라트 연방 초대 최고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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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1년 3월 5일 |
사망 | 1946년 4월 10일 (향년 75세) |
사상 | 마르크스주의 |
주요 직책 | 라트 연방 초대 최고지도자 (1922년 12월 30일 ~ 1938년 9월 16일) |
모티브 | 블라디미르 레닌 |
나는 있었고 ─ 있으며 ─ 있을 것이다! 1919년 1월 살해 직전의 유언 |
때로 독수리는 닭보다 낮게 날 수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게 날 수 없다. 그 모든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수리였으며, 영원히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
라트 연방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라트 연방의 초대 최고지도자였다. 1919년 독일 혁명을 성공시켜 라트 연방을 건국한 국부로서 대우받고 있다.
-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 혁명가였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했다. 살아 생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비롯한 여러 유명한 저작을 남겼고, 자본축적론을 비롯한 주요한 정치경제학 이론을 창립하였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이론에 반대하며 사회민주당 내 좌파를 이끌었고, 제1차 세계대전 찬성 당론을 채택한 사민당 당권파에 맞서 반전파를 이끌었으며 스파르타쿠스단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19년 1월, 독일 11월 혁명에 대응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주도했으나, 에베르트의 진압군에 의해 살해되어 요절했다.
- 세계관에서의 행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이 레닌과 구별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의 이념은 민족 문제에 대한 관점을 제외하면 레닌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지지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전위당과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크게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1919년 1월 일어난 1919년 독일 혁명을 성공시키고, 이후 흑적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초대 최고지도자로 취임한 이후 시행한 정책이 레닌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대중의 자발성을 보다 강조했고, 민족관념에 있어 개방적이었기에 중앙집권제적인 사회주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소수민족의 큰 반발을 샀고, 1930년대 들어 오토 바우어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접근방식이 조금 더 우위를 가지기는 했다. 그녀는 라트 연방의 초대 최고 지도자로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를 통합하여 국제사회주의 연방을 출범시켰고, 여러 정책을 통하여 라트 연방의 기틀을 다지고 베르사유 조약의 불평등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1938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일선 권력에서 후퇴했으며, 1946년 75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세계관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
강력한 사회민주주의자로, 20세기 초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채권 발행에 찬성하며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을 찬성해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했다. 이후 1918년 킬 군항 반란을 독일 혁명으로 이끌며 바이마르 공화국을 설립시켰고, 이 과정에서 옛 동지였던 룩셈부르크의 혁명을 진압해 그녀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신생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내며 국내외의 여러 산적한 문제들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세계관에서의 행적
실제 역사와 달리, 제1차 세계대전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사회민주당의 전쟁채권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자들의 반전 총파업을 열렬히 부르짖었으며, 이로 인해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멀어졌던 사이가 가까워졌으며, 개인적으로는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반대했지만 옛 동지로서의 의리를 잊지 않고 사회민주당 좌파가 일으킨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했다. 흑적내전 때에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룩셈부르크의 동지가 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22년 건국 이후 초대 국가원수 직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으나 실권은 거의 없었고, 몇해 가지 않아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성대한 국장으로 치러졌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
사회민주주의 이론의 창시자이다. 초기에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후계자로서 급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했으나, 비스마르크의 복지 정책에 감명을 받고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복지를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수정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그는 몇차례의 당대회를 통해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당의 주류로 만들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논쟁에서 승리해 사민당의 이론적 주권을 잡았다. 1914년 1차 대전 당시에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다가,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독립사회민주당의 당원으로서 의원으로 당선되여 몇해간 의원직을 지냈다. 의원직을 그만둔 후 사망했으며, 사망 후 몇해 가지 않아 나치가 집권하였다.
- 세계관에서의 행적
극악의 인간 말종이다. 현실과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이론 논쟁에서 처절하게 밀려 당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했으며,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인간적 열등감까지 느끼는 찌질한 독남충이 되었다. 룩셈부르크에 대한 반감이 너무 심해서, 1914년 그에 맞서기 위해서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카이저를 찬양하고 1차 세계 대전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결국 에베르트에 의해 당적을 박탈당한 그는 아예 우파로 전향해 흑적내전 당시 흑군을 응원했으며,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파시스트가 되었다. 프랑스 파시즘의 주요한 이론가로서 자리 잡았으나, 1920년대 말 소아성애와 유부녀 헌팅을 한 혐의로 출당당하고 인간말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결국 그 어느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그는 1931년 룩셈부르크가 보낸 자객에 의해 떠밀려 열차에 치여 산산조각났으며 그의 묘지는 2차 세계대전 도중 독일군에 의해 폭발물로 파괴되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베르트 프람
에리히 호네커
앙겔라 메르켈
기타 인물
인도
인디라 간디
인도 연방 초대 대통령 인디라 간디 इन्दिरा गाँ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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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11월 19일 |
사망 | 1984년 10월 31일 (향년 66세) |
사상 | 간디 사상, 비동맹 사회주의 |
주요 직책 | 인도 제3대 총리 (1966년 1월 24일 ~ 1977년 3월 24일) 인도 연방 초대 대통령 (1977년 3월 25일 ~ 1984년 10월 31일) |
모티브 | 김일성 가말 나세르 |
현재 인도의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인민들에게 소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설명할 배짱이 있는 정치인이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인디라 간디 |
인도의 제3대 총리, 초대 연방 대통령.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딸로, 1977년 인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한 후 대통령제와 공산주의 체제를 도입하여 스스로 초대 대통령직에 올랐다.
-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
인도의 정치가이자 독재자.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초대 총리의 딸로, 1964년 네루의 사망으로 2년 후 총리 직을 세습받았다. 초기에는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세습 총리라는 점에서 능력에 의심을 받았지만, 여러 정치적 수완을 통해 자신의 반대파를 1971년 총선에서 궤멸시키고 인도 국민회의를 자신의 사당으로 삼았다. 총리 재임 1기 도중에는 강력한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와 친소련 외교를 펼쳤으며, 1971~3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방글라데시를 지원해 파키스탄을 견제함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1975년 재판소가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자신의 의원직 및 총리직을 정지시키고자 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해 독재자의 자리에 올랐다. 1977년, 비상사태를 해제한 후 정권을 야당인 자나타당(인민당)에게 내어주기도 했지만 1980년 다시 총리직위에 복귀해 1984년까지 집권했다. 총리 2기 당시에는 부상하고 있던 칼리스탄 운동을 견제하고 시크교도를 탄압하였다가 그에 대한 보복 테러로 사망했다.
- 세계관에서의 행적
현실에서의 행적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얻은 채 합법적 독재를 실시하였으며, 무엇보다 1977년 비상사태를 해제하지 않고 국민회의, 공화당, 공산당을 통합해 자신의 개인 사당인 전인도 사회주의 동맹을 설립하여 일당독재를 실현하면서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라트 연방을 본뜬 강력한 개발 경제를 추구했고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철폐하는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시했다. 1977년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대통령 직위에 올랐으며, 1984년 사망할때까지 절대권력을 누렸다. 모티브가 된 인물은 김일성. 단, 김일성보다 훨씬 유능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김일성처럼 그 역시 자신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와 그 아내 소니아 간디, 그리고 손자 라훌 간디에 이르는 3대 세습을 구축하였다. 또한, 간디 사상을 창시해 자신의 일인 독재와 세습 독재를 정당화하였다.[1] 북한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상인 간디 사상은 오늘날까지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한편 강한 비동맹주의를 추구한 제3세계 독재자라는 점에서 가말 나세르의 모티브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