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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 연방 제3대 내무장관 펠릭스 제르진스키 Felix Dzierżyńsk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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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펠릭스 에드문도비츠 지에르진스키 (Feliks Edmundowicz Dzierżyński) | ||||||||||||
출생 | 1877년 9월 11일 | ||||||||||||
러시아 제국 민스크 (現 벨라루스 SRR 민스크) | |||||||||||||
사망 | 1950년 8월 17일 (향년 73세) | ||||||||||||
폴란드 ASRR 바르샤바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라트 연방 ( 폴란드 ASRR) | ||||||||||||
묘지 | 바르샤바 영웅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비밀국가경찰국장 | ||||||||||||
1924년 12월 30일 ~ 1934년 12월 10일 | |||||||||||||
라트 연방 제3대 내무장관 | |||||||||||||
1927년 5월 15일 ~ 1939년 7월 1일 | |||||||||||||
서명 | |||||||||||||
별명 | 철의 펠릭스 (Eisen Feli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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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트 연방의 정치인, 혁명가. 라트 연방의 내무부장관과 비밀경찰 수장을 지냈다. 현대 공산권 경찰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첨예한 논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생애
1877년,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폴란드계 귀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고등학교에 보내졌으나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사회혁명당에 입당해 혁명 운동을 하였으며, 많은 세월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는 두차례 시베리아 형무소로 보내졌으나 두번 모두 탈출한 경력이 있다. 그는 1903년 스위스로 망명했고, 이후 독일계 혁명가들과 뜻을 함께 했다. 룩셈부르크의 연설에 감화된 그는 러시아와 독일제국을 오가며 혁명 활동을 하다가, 독일에서의 탄압이 심해지자 러시아와 폴란드를 오가며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혁명에 참여하였으나, 케렌스키 수상이 점차 우파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자 이에 실망한다. 1918년 10월 독일 혁명에 참여한 그는 혁명군의 주요한 지도자였으며 1919년 1월 독일 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여 흑적내전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직접 비밀경찰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제르진스키는 이때 "반혁명 사보타주 분쇄를 위한 전독일 인민위원회"(Gesamtdeutsches Volkskomitee zur Beseitigung konterrevolutionärer Sabotage; 이른바 페우카)를 수립한다.
페우카의 활동은 매우 잔혹하기로 악명높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하루 1,500명의 가톨릭 사제, 우익 지식인, 군인이 총살당했다고 한다. 또 그는 고의적으로 우익 계열의 근황 조직을 만들어 극우 성향의 귀족과 사제들을 끌여들였고, 이를 통하여 리스트를 작성, 그들을 숙청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당 내에서도 그의 "폭력성"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그의 업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24년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라트 연방이 건국되자, 그는 신설된 라트 연방의 비밀국가경찰 국장으로 지명되었다. 제르진스키는 권력에 상대적으로 초연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제르진스키가 당 내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20년대 내내 보수파의 일원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그룹을 옹호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옹호하였다. 1926년 심근경색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금새 회복했다.
1927년, 카를 레너 서기장에 의해 내무부장관으로 지명되었다. 동시에 비밀국가경찰 직위를 유지했으나, 1934년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신임 비밀경찰국장으로 에른스트 룀을 지명하면서 권력의 핵심에서는 약간 밀려났다. 룀과 제르진스키는 1934년부터 1938년 사이 둘은 대테러를 주도하였고,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당원과 민간인을 사법살인했다. 제르진스키에게 있어 비밀국가경찰 직위를 잃은 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제르진스키와 달리 권력욕이 많았던 룀은 1938년 장검의 밤을 통해 숙청당하고 대신 그 자리에 하인리히 힘러가 들어왔다. 제르진스키는 권력욕이 거의 없어 슈트라서가 위험 대상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던것 같다.
1940년대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은퇴 수순을 밟았으며, 전쟁이 발발하기 2개월 전 이미 내무장관 자리를 빌헬름 프리크에게 넘긴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과로로 인해 몸에 무리가 가 1945년 종전 이후부터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후 공산화된 폴란드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제르진스키는 1949년 슈트라서의 사망으로 소집된 임시 당대회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괴벨스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후임 내무장관으로 힘러를 추천하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활동이었으며, 1950년 8월 17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은 3일간 국장으로 치러졌고 장의위원장은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힘러가 맡았다.
평가
공산권 경찰의 아버지로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갈리고 있다. 권력에 초연한 채 그저 사람을 죽이고 체포하는 일에만 집중한 살인광이라는 박한 평가부터, 혁명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이자 당의 창과 방패였다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1968년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그의 강압적 수사에 대한 재평가 열풍이 불어, 각지의 제르진스키 동상이 끌어내려져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평가가 이루어졌다.
소속 정당
여담
- 그의 동상은 큰 경찰서 앞에는 언제나 세워져있는데, 룩셈부르크와 마르크스, 게바라 다음으로 많은 동상이 세워진 혁명가라고 한다. 특히 국가보안부 중앙청사 "공포의 지형학"앞에 세워진 제르진스키의 동상, 일명 철의 펠릭스가 매우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