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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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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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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공방전 Battle of Hamburg Schlacht bei Hamburg Bataille de Hambour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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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날짜 | 1941년 8월 21일~1941년 9월 15일 | |||||||||||||||||
장소 | 독일국 함부르크 자유한자도시 | |||||||||||||||||
결과 | 독일제국의 함부르크 사수 | |||||||||||||||||
영향 | 제3인터내셔널의 독일 서부 장악 실패 서부전선의 결정적인 변곡점 독일이 이후 진행될 베를린 공방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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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대공습으로 파괴 된 함부르크 시내 |
개요
1941년 7월 7일부터 그해 9월 15일까지, 함부르크를 포위하고 슐레스비히 일대를 장악하려는 제3 인터내셔널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라이히스팍트군 사이에 진행되었던 전투였다.
인터내셔널군이 강하게 몰아붙였음에도 발터 모델의 지휘 아래의 독일군은 인터내셔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인터내셔널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이 전투는 서부전선의 변곡점이 되는 중요한 전투로, 함부르크 전투 이후부터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수세에서 공세로 나서기 시작했으며 서부전선을 안정 시키면서 독일은 동부전선에 추가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이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서부전선의 기적의 시작이었다.
배경
1939년 개전 이래로 승리를 거듭하고 있던 인터내셔널군의 공세는 서서히 둔화되어가고 있었다. 당초 독일에게 큰 피해를 안긴다면 독일 내부에서 혁명이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괴벨스의 선전은 인터내셔널의 선전을 빠르게 무력화 시켰고 독일인들은 자발적으로 국민척탄병과 국민돌격대에 입대하며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전역에서의 대승을 마지막으로 인터내셔널군의 공세는 라인강 방어선에 막혀 돈좌되었고, 프랑크푸르트의 함락은 요원해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전선의 소식도 인터내셔널을 옥죄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여 동부전선을 개전하면서, 인터내셔널의 경쟁자가 등장해버리고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급해진 인터내셔널군은 최대한 독일군을 몰아붙혀 전후 러시아와의 기여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행한 무리한 공세로 큰 피해만을 입고야 말았다. 거기다가 아프리카 전선 또한 협상군과 팍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인터내셔널군은 독일 제2의 도시인 함부르크를 공격하여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떨어트리기로 결정, 함부르크에 대공습을 진행하며 독일 북부로 공세를 진행했다.
한편 독일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개전 초기 연속 된 패배는 팍트군을 누더기 상태로 만들어놓았고, 카이저마리네는 이렇다 할 전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베를린을 사수하고 라인강 방어선을 견고히 지켜내며 한숨 돌릴 수 있었으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격전과 러시아와의 대치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 된 함부르크의 대한 대규모 공습은 독일에게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다. 제2도시였던 함부르크는 폐허가 되었고, 인터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수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터군이 함부르크를 향한 공세를 진행할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독일은 함부르크의 상황을 수습할 여유조차 없었다.
함부르크가 함락된다면, 독일에게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카이저마리네의 군항 대부분이 인터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으며 제2 도시 함부르크가 함락되며 독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앉길터였다. 그러나, 도시를 방위 해야할 방위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함부르크를 사수하던 각 부대들은 이름만 들은다면 누구나 알만한 네임드 사단들과, 무장친위대[1] 병력까지 있었지만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당시 모든 장비를 버리고 왔었기 때문에 무장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르크 사수를 위해 발터 모델이 발령됐다.
- ↑ 제2 SS 다스라이히, 제9 SS 호엔슈타우펜, 제10 SS 프룬츠베르크, 제12 SS 카이저유켄트, 제17 SS 괴츠 폰 베를리힝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