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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를 건너는 소형 보트들.
개요
한니발 작전 (Operation Hannibal/Unternehmen Hannibal)은 1941년 독일제국이 동프로이센과 그 일대의 민간인들과 부상병들을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을 피해 해상으로 철수시킨,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탈출이다.
이 작전으로 약 200만명의 민간인과 35만명의 부상병들이 동프로이센을 탈출했으며, 탈출작전의 모범으로 평가되는 암스테르담 철수작전보다 더 큰 규모의 탈출 작전이었이었으며 현재도 높은 인지도를 가지며 여러 매체에서 등장한다.
훗날 이 일을 잊지 않은 독일군이 전쟁 말 러시아 본토로 진입했을 때 러시아를 향하여 수 많은 보복을 가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배경
독일제국이 개전 1년만에 러시아군에게 본토를 짓밟히던 1941년 9월 초,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주도로 동프로이센 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빈사 상태였던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결국 10월 30일,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일대 전체가 러시아군에 포위되었다.
이에 발트함대의 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동프로이센에 고립된 민간인들과 부상병들을 배편으로 동맹 덴마크나 독일 본토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이 고안될 수 있었던 건 당시 독일이 발트해의 제해권을 계속 잡고 있었고,[1] 선박을 이용하면 한번에 많은 수의 인원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카를 되니츠는 휘하 제독이었던 오스카 쿠메츠 해군 대장과 크릭스마리네 수송국장인 콘라트 엥겔하르트 해군 소장에게 구체적인 소개 작전을 수립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선박을 징발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이 작전에는 "한니발" 이라는 코드명이 붙었는데,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 바르카와 휘하 병사들이 로마 본토에서 북아프리카로 선박을 이용해 탈출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이후 작전의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11월 23일, 카를 되니츠는 단치히에 전보를 보내 탈출 작전을 시작하라고 명령했고, 동시에 통상파괴전을 위한 유보트 용으로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선박용 비축유를 모조리 풀었다. 이렇게 한니발 작전은 시작되었다.
작전의 진행
몰려오는 피난민들
위치 불명의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탈출선에 올라타는 피난민들.
러시아군에 의해 포위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수상기모함인 '한스 알브레트 베델함'에 승선하는 피난민들
11월 23일을 시작으로 동프로이센에서는 대대적인 해상 철수가 시작되었다.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부상병들 역시 배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었기에 고텐하펜, 단치히, 필라우, 메멜 등 동서프로이센 지역의 주요 항구들에는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징발된 선박들과 군함들은 끊임없이 이들을 실어 날랐으나 몰려오는 민간인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 격침
한편 작전이 시작되자 러시아 해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2] 당시 발트해에 전개된 러시아 해군의 수상함 전략은 대단히 미약했던 관계로 대부분의 공격은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일이 터진다. 1941년 12월 10일, 항구 킬을 목적지로 단치히에서 출발한 독일 여객선 알프레트 폰 슐리펜 호가 러시아 해군의 S급 잠수함 S-13에 격침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무려 9,500명에서 최대 1만여명에 달하는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이 차가운 발트해의 바다에서 사망했다. 이후로도 러시아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피해가 속출했는데, 대표적으로 2월 9일에는 3,000명-4,000명이 승선한 상태로 필라우를 출항한 SS 제너럴 폰 슈토이벤(General von Steuben) 호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S-13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생존자는 고작 650명이었다.
처절한 탈출
1942년 1월 초에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세어와 구축함 3척, 엘빙급 어뢰함 T36이 포메른의 볼린(Wolin) 섬 일대에서 포격 지원을 실시했다. 이 포격 지원은 러시아 육군의 진격을 지연시켰고, 이 틈을 타 약 75,000명의 민간인이 소형 선박이나 상륙정 등을 타고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SS 도이칠란트(Deutschland) 같은 대형 여객선들은 무려 1만 1천명에 이르는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을 실어날랐다.
탈출 작전은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일단 좀 큰 배에 타면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피난민들은 끝없이 몰려들었고, 배에 타지 못한 일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선, 심지어는 보트 정도의 작은 배에 몸을 맡긴 채 무작정 바다로 나갔다.[3] 물론 큰 배에 탄 사람들도 안전한 건 아니었는데, 러시아 해군과 공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배가 격침당하면서 수장당하는 건 물론이요, 비위생적인 배 안에서 병에 걸려 죽거나[4] 기아로 고통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편 독일군 역시 피난민들을 사수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는데, 육군은 한줌밖에 안 되는 병력들로 몰려오는 러시아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해상에서도 발트함대의 군함들이 필사적으로 러시아군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고야 격침
한편 4월 16일, 이번에는 스웨덴에서 파견된 상선 MV 고야(Goya)호가 러시아 해군 잠수함 L-3의 어뢰에 맞고 격침되었다. 이로 인해 약 6,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183명만이 구조되었다.
작전의 끝
1942년 4월 8일 밤 9시, 92척의 중소형 선박들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이 18,000명을 태우고 라트비아 리바우(Libau)를 떠난 것을 끝으로 한니발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작전이 종료된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를 제외한 동프로이센 모든 지역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한니발 작전으로 철수하지 않고 잔류한 전투병들과 민간인들이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이 끝날 때까지 필사적으로 항전하여 지켜졌다.
1944년 독일군이 단치히를 수복하고 동프로이센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여 수복하기 전까지, 한니발 작전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엘베 강 유역의 난민촌에서 생활했다.
평가
개요에도 서술했지만, 한니발 작전은 인류 역사에 남을, 다시는 없을 규모의 탈출 작전이었다. 총 15주 남짓했던 작전 기간 동안 적게는 494척에서 많게는 1,080척에 달하는 상선들과 여객선, 군함들이 투입되었고, 이들은 무려 235만 명의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을 동프로이센과 폴란드에서 덴마크나 독일 본토로 탈출시켰다. 물론 구출한 사람들 못지 않게 사망자도 상당했는데 러시아군의 공격이나 전염병, 기아 등 각종 이유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작전 도중 목숨을 잃었다.
또한 이 당시 동프로이센에서 탈출 시킨 병력들은 베를린 전투에 투입되어 베를린을 사수하고 독일의 반격 작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지역에서는 한니발 작전이 시작된 11월 23일을 기념하고 있다.
- ↑ 에히리 레더의 대양함대가 켈트 해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이후, 독일 카이저마리네는 크게 위축됐지만, 독일 발트함대의 전력만으로도 러시아 해군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 ↑ 민간인들의 철수 행렬을 공격하는 것이 비인도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 1차 대전의 복수심에 휩싸여 있던 러시아군에겐 중요치 않았다. 이후 독일은 1944년 러시아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격침시키며 이때의 보복을 감행했다.
- ↑ 물론 이런 소형 선박으로는 거친 발트해를 건너기 힘들었던 관계로, 대부분 이들은 먼바다로 나간 뒤 대형 군함이나 여객선에 구조되는 방식으로 탈출했다. 순수히 소형 선박만으로 탈출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 ↑ 많은 수의 노인들과 아기들이 탈출선 안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