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빌레펠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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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공격측 방어측
1939년
독일 침공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플라데런-왈로니
네덜란드
독일 본토 항공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러시아국
독일제국
도나우 합중국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딜 계획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플라데런-왈로니
네덜란드
브뤼셀 전투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플라데런-왈로니
1940년
아일랜드 전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아일랜드
독일제국
켈트 해 해전 독일제국
아일랜드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노르웨이 코뮌
포르투갈 침공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포르투갈 왕국
캐나다 자치령
프랑스 공화국
아헨 전투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1941년
라인 강 대공세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바그라티온 작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독일제국
도나우 합중국
우크라이나
폴란드 왕국
벨로루시아
발트연합공국
리투아니아
핀란드 왕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차르국
겨울전쟁 러시아국 핀란드 왕국
독일제국
함부르크 공방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노르웨이 코뮌
독일제국
덴마크 왕국
스웨덴 왕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우크라이나
도나우 합중국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베를린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폴란드 왕국
벨로루시아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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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 · 독일 본토 항공전 |
10월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 브뤼셀 전투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1월
아일랜드 전역 |
3월
켈트 해 해전 |
5월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
6월
포항 상륙작전 |
7월
아헨 전투
1941년
2월
라인 강 대공세 ·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독러전쟁, 겨울전쟁 발발) |
7월
함부르크 공방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개성 전투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4월
백마고지 전투 |
7월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10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2월
제3차 브레슬라우 전투 |
7월
포젠 전투 |
12월
낫질 작전(아르덴 대공세)
1944년
5월
제3차 부산 전투 |
6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7월
사빈코프 암살 미수 사건 |
8월
키이우 봉기 |
9월
샤른호르스트 작전
1945년
1월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브리튼 전투(바다사자 작전 · 귀향 작전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겨울전쟁
Winter War (영어)
Talvisota (핀란드어)
Зимняя война (러시아어)
Winterkrieg (독일어)
제2차 벨트크리그의 일부
방어선을 구축하는 핀란드군
핀란드군에 의해 파괴된 러시아군의 T-26 전차
겨울전쟁에서 활약한 저격수 시모 해위해
날짜 1941년 6월 30일~1945년 5월 9일
장소 핀란드 전역, 러시아 카렐리아 일대
교전국 핀란드 왕국
독일제국
사미인 저항군
러시아국
지휘관 배이뇌 1세
퀴외스티 칼리오
리스토 뤼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투오마스 아슬락 무오트카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미하일 레비토프
셰묜 티모셴코
영향
러시아의 영토 상실
사미족의 자치권 확대
병력 병력 25만~34만 명
전차 32대
항공기 114대
병력 42만~99만 명
전차 2,514~6,541대
장갑차
718~1,691대
항공기 3,880대
피해규모 전사/실종 5만 5천 명
부상 8만 5천여 명
포로 1,600~2천여 명
공습으로 민간인 3,467명 사망
전차 30여 대 격파
항공기 123대 격추
전사/실종 24만 7천 명
부상 36만 명
포로 5천여 명
전차 1,200~3,543대 격파
항공기 261~515기 격추
결과
핀란드의 승리

개요

그냥 내놓으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면 목소리를 좀 높이면 될 것이고, 고함을 질러도 안 되면 총을 몇 발 쏘면 돼. 그저 그뿐이야. 이건 무척 쉬운 일이라고. 예 아닙니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941년 11월 30일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 1945년 5월 9일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간주된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노분전쟁(露芬戰爭)으로 불렀다.

정식으로는 러시아-핀란드 전쟁/핀란드-러시아 전쟁이며 보통 겨울전쟁으로 통칭하여 부르지만, 전쟁의 초반부와 전쟁이 소강 상태였던 중반부를 겨울전쟁, 전쟁의 후반부를 계속전쟁으로 나눠 부르기도 하며 라플란드 지역에서 있었던 사미인들의 저항은 라플란드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전쟁으로 핀란드는 라이히스팍트에 재가입 했다.

배경

핀란드는 1150년 제1차 핀란드 십자군 이래로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고, 1809년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고 핀란드 내전에 돌입했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이끄는 백군이 독일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했다.

1920년 핀란드와 러시아는 두 국가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타르투 조약(Treaty of Tartu)을 맺었다. 핀란드는 도시 페차모(Petsamo)와 북극해에 접한 항구 하나를 얻어냈다. 이후에도 국경 갈등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나마 러시아-핀란드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하지만 사빈코프는 러시아 내전 동안 핀란드 지역을 상실한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 그는 이곳을 계속 탐냈다. 1930년대 초반 성공적으로 러시아 정상화를 이룩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일궈낸 그의 눈에 핀란드는 먹기 딱 좋은 놓치기 아까운 고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광대한 영토를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사빈코프는 어떻게든 영토를 확장시켜야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는 프랑스 코뮌이 독일을 치자 독일이 북유럽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거라고 생각하고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할 목적으로 핀란드 전체를 다시 러시아가 차지하려고했다.

1939년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 일대의 안전 확보 등을 명목삼아 핀란드에 대대적인 영토 할양 및 조차를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핀란드에게 제시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주요 공업지대 카리알라(Karjala)와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km2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 수르사리(Suursaari) 섬 등 핀란드 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할양.[1]
  • 투르쿠(Turku),[2] 코트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Helsinki),[3] 비푸리(Viipuri)[4] 등 발트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러시아군 주둔권 및 조차 권리 보장.[5]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은 러시아 대변인에게 "안 되오."라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

그러자 러시아 측 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러시아군이 말할 것이오."라고 반 협박조로 대답한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사빈코프는 핀란드가 요구를 거절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했고, 회담이 결렬되자 즉각 전쟁에 돌입할 태세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이 시점에서 이미 핀란드를 병탄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핀란드는 당시 2차 벨트크리그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독일, 스웨덴에 도움을 청하여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일이 잘 안되어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1939년 7월 26일, 러시아-핀란드 국경 지대의 마이닐라(Mainila)에서 러시아는 핀란드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마치 자신들의 국경 수비 초소가 핀란드군에게 포격을 당한 것 마냥 위장한 자작극을 벌였다.[6] 이에 러시아는 핀란드군의 포격에 대한 반격을 구실삼아 4일 뒤 핀란드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전개

러시아의 침공과 겨울전쟁의 시작

핀란드군의 대비

핀란드군의 전쟁 대비는 지리적 이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국경은 1000km에 달했지만 기후도 좋지 않고 도로 사정도 나빠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를 토대로 핀란드군 수뇌부는 만네르헤임 선[7] 위쪽, 즉 라도가 호수 이북 지역으로 3개 전후의 사단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이런 예상대로라면 핀란드군은 1명 당 3명의 러시아군을 상대해야 했다. 허나 실제로 라도가 이북으로 온 러시아군은 그 2배가 넘는 7개 사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장비였다. 무기를 전부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다가 그 양도 많지 않았다. 연료 비축량은 19~60일분에 불과했고, 20년 전에 있었던 내전으로 안 그래도 허약한 군대는 더 약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전쟁 기간 동안 핀란드군은 노획한 장비에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따발총의 원조 수오미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역시 물자부족으로 인해 비싸다고 많이 쥐어주질 못했다. 전차 전력으로는 1928년에 생산된 1호전차와 1차대전 당시 물건인 오버슐레지엔이 있었다. 그나마 핀란드에서는 겨울 전쟁 기간 도중 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그 중 독일의 경우 이례적으로 자국에도 10여기 남짓 밖에 배치되지 않은 최신형 전투기를 무려 44대나 원조해 주는 배포를 보였지만, 오는 도중에 발트전선이 붕괴되는 바람에 다시 돌아갔다.

핀란드군의 구체적인 방어계획은 이러했다.

  • 후고 외스테르만이 이끄는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카렐리야 지협군은 만네르헤임 선에 주둔한다. 카렐리야 지협군은 제2군과 제3군의 합동군이었다.
  • 볼데마르 헤글룬드가 이끄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4군은 라도가 호수 북부를 수비한다.
  • 도시 수비대, 국경수비대와 민병대로 이뤄진 북부 핀란드군은 핀란드 북쪽 국경을 수비한다.

여기서 핀란드군의 전쟁 준비가 남부 공업 지대에만 집중됐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북부가 제대로 된 도로조차 없을 정도의 황야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진격

개전 당시 러시아군은 무려 15개 사단, 3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당시 핀란드는 전체 인구가 370만이 조금 안되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병력이 핀란드를 침공했고, 러시아군 34만명은 당시 핀란드가 동원할 수 있는 병역 자원[8]을 전부 합친 숫자의 약 두 배에 달했다.[9]

전차의 숫자비는 2,400:9였다. 당시 핀란드 국방군이 보유한 전차는 전쟁 전 영국에서 수입한 빅커스 Mk. E 전차 33대가 전부였는데, 개전 시점에 주문 물량이 다 들어오지도 않은 상황[10]이었으며, 가격 절감을 위해 무장을 뗀 상태로 수입한 상태였다. 이때문에 개전 시점에 현지에서 무장의 장착을 완료한 빅커스 E는 고작 10대에 불과했다. 이 외에 구식 경전차 르노 FT 32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운용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대부분 땅에 파묻어 벙커나 토치카 용도로 쓰거나 노획 장비 견인 용도로 활용하는데 그쳤다. 그 밖에 빅커스 E 도입시 테스트용으로 같이 들여온 카든-로이드 Mk.VI 탱켓 1대, 1933년형 4.5톤 카든 로이드 경전차 1대와 스웨덴에서 수입한 란츠베르크 182 장갑차 1대가 있었으나, 전투에서의 활약은 아예 없거나 미미했다. 반면 러시아는 개전 당시에만 전차 2,514대, 장갑차 718대를 동원하였으며, 종전까지 무려 전차 6,541대와 장갑차 1,691대를 핀란드 전선에 투입하였다.

항공기는 500:80이었다. 러시아 3,880기, 핀란드 114기인데 핀란드는 훈련기 및 관측기, 예비기까지 포함할 경우 216기였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군은 대전차포나 대공포, 야전 통신 장비도 부족한 상태였다. 한편 해방전함 2척과 잠수함 5척 등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핀란드 해군은 연안 방어[11]를 비롯해 올란드 제도와 발트 해상의 핀란드 상선 보호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게다가 핀란드군은 개인 화기조차 아무 거나 되는 대로 사다가 들려준 탓에 정규군도 정식 군대라기보다는 거의 게릴라 부대 수준이었다. 종합적으로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 우위는 보병전력 3배, 항공전력 30배, 기갑전력 100배에 달했다. 뭘로 봐도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때문에 러시아군은 자만에 찬 나머지 각급 부대에 너무 진격하다가 실수로 스웨덴 전선까지 진출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을 정도였으며, 장군들도 10일치 보급품만 준비했다. 심지어 어떤 한 장군은 2~3개월치 보급품을 준비하자고 했다가 완전히 왕따당하기까지 했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

러시아의 구체적인 진공 계획은 이러했다. 남부-북부 순이다.

  • 7개 사단과 1개 기갑사단으로 이뤄진 제7군은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여 비푸리로 진격한다.
  • 6개 사단과 1개 기갑 여단으로 이뤄진 제8군은 라도가 호수 북부에서 진격하여 만네르헤임 선을 후방에서 공략한다.[12]
  • 4개 사단으로 이뤄진 제9군은 중부 핀란드를 공격한다. 이 공격은 핀란드를 양단하여 오울루로 계속될 예정이었다.
  • 3개 사단으로 이뤄진 제14군은 무르만스크에서 북극해를 끼고 진격하여 페차모를 점령하고 로바니에미로 진격한다.

얼핏 봐도 엄청난 전력을 전선마다 넉넉하게 나눈 러시아군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폭격하며 진격을 시작했고, 눈 깜짝할 새에 국경에서부터 30~75km를 진격하여 핀란드군의 방어선인 만네르헤임 선에 도달했다. 여기서 25만의 러시아군은 13만의 핀란드군과 만났다. 이때 핀란드군은 그 중 2만 1천의 병력을 빼서 방어선 앞쪽에서 지연전을 펼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핀란드군 초기의 혼란은 주로 러시아군의 전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핀란드군에는 대전차 무기가 별로 없었고 근대적인 대전차 전술로 훈련받은 병사도 없어 초창기엔 큰 희생을 치르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군 전차병들은 숙련도가 미숙했고, 전차의 장갑 또한 아직 그리 두껍지 않았다. 곧이어 핀란드군은 이를 이용하여 근거리 대전차 전술을 개발해낸다. 크로우바나 굵은 통나무를 전차 궤도와 현가장치 사이에 밀어넣어서 잼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전술이었다. 나중에는 엔진룸이나 해치 속에 화염병[13]을 던져넣는 전술이나 '카사파노스(Kasapanos)'라는 흡착식 대전차 폭약을 사용하는 전술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얼음 위에다 위장망을 깔아놓은 함정을 만들어 전차를 돈좌시키는 방법 또한 병행했다.

한편 러시아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리요키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리요키 정부'라는 러시아의 위성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1945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협정으로 멸망하였다.

전세역전

12월 6일 모든 핀란드군은 만네르헤임 선을 비롯한 방어선에 틀어박혀 방어전에 돌입했다. 러시아군은 방어선의 일부인 타이팔레에 첫 공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핀란드는 기후와 강을 이용한 방어로 첫 공격을 격퇴해냈다. 14일이 되자 러시아군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지만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러시아군 제3사단은 전투에서 예상 외로 강력한 핀란드군의 저항에 직면하자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방어선은 여전히 뚫리지 않고 러시아군의 피해만 늘어갈 뿐이었다. 한 번은 1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병력 1천 명과 전차 27대를 잃은 적도 있었다.

한편 라도가 호수 북부의 핀란드군은 숲을 이용해서 방어전을 펼쳤다. 이곳은 도로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험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 제8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도로를 깔면서 진격했고, 덕분에 약간씩이나마 보급 상황이 개선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전진하다가, 12월 12일 라도가 호수 북부에서 벌어진 톨바예르비 전투에서 러시아군 2개 사단이 파보 탈벨라 대령과 아로 파야리 중령이 이끄는 핀란드군 1개 연대에 개박살이 나면서, 이 지역의 전세 역시 핀란드군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핀란드군은 러시아군을 끌어들여서 조금씩 포위해 각개격파하였다.

역사가 윌리엄 R. 트로터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러시아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싸우는 걸 포기한다면 그는 총에 맞아 죽을 것이다. 숲에서 몰래 움직여 탈출하려 한다면 얼어 죽을 것이다. 항복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의 선전에는 핀란드군의 악랄함이 매우 자세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부와 북부 지역의 도로는 라도가 호수 북부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 핀란드군은 여기에 정규군 사단 1개도 배치하지 않는 등 사실상 이곳에 대한 방어 계획은 거의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당연히 이런 보급 사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러시아군도 공세를 펼치기엔 무리인 곳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뚝심의 사빈코프는 이곳에 무려 8개의 사단을 전개하며 핀란드를 공격했다. 때문에 러시아군은 이 지역에서 압도적인 수적-장비적 우위를 점했지만,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햘마르 실라스부오가 이끄는 핀란드군에게 처절하게 발리며 더 이상의 진격은 좌절되고 말았다.

러시아도 추위로 유명한 나라다. 과거 추위 덕분에 전쟁에서 이긴 경험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때 러시아군의 병력들 대부분이 하필 우크라이나나 아르메니아 등 러시아 남부에 위치한 지역 출신 병사들이 많은 편이었다. 러시아 남부도 썩 따뜻한 기후는 아니지만 그들에겐 핀란드만큼의 혹한기는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고통이었다.[14] 게다가 러시아의 겨울은 듣보잡 취급하는 핀란드 동장군의 강림으로 별로 좋지도 않은 도로가 몽땅 폭설에 묻히자 전차가 진격은 커녕 보급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부실한 월동 장비 보급은 피해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1939~40년의 겨울 동안 카렐리야 지역의 평균기온은 영하 15도에 육박했고 최저 기온은 영하 43도를 찍었다. 그나마 따뜻한 남부 지역의 기온이 이 정도였다. 러시아군의 10%가 핀란드 국경을 넘기 전에 이미 동상에 걸려 있었다는 통계도 있다. 이 추위가 러시아군에게 준 유일한 이점이 있었다면 눈이 녹지 않고 얼어서 중장비의 이동이 수월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러시아군의 주력인 전차는 폭설 때문에 제대로 진격도 못했고, 이때를 틈타 핀란드군은 술에 불을 붙여 전차 안에다 던져 버리는 식으로 공격했다. 이때 핀란드군은 이 술병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바치는 술병이라 해서 몰로토프 칵테일이라 비꼬았다.출처[15] 몰로토프 칵테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무려 160대에 달하는 러시아군 전차가 파괴됐다. 이것이 러시아군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되었는지 러시아 공군이 몰로토프 칵테일을 생산하는 공장을 폭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핀란드군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원수가 짜놓은 만네르헤임 방어선이 워낙 단단하고, 그곳을 방어하는 핀란드군이 의외로 강해서 러시아군의 맹공에도 쉽게 뚫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군이 스키를 타고 나타나 총 몇 발만 쏘고 사라져도 발이 묶인 러시아군은 오도 가도 못한 채 고립되기 일쑤였다. 움직이자니 핀란드군의 귀신 같은 저격 실력에 당하고, 가만히 있자니 그대로 얼어죽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독일, 스웨덴, 덴마크등지에서 핀란드에 대해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고 자원병을 파견하는 등 도움의 손길도 왔다. 특히 스웨덴은 영구 중립 노선을 걸었던 국가임에도 겨울전쟁 당시에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핀란드에 많은 군수 물자와 자금 지원을 해주었으며, 자원병 파견 숫자도 가장 많았다. 언급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외에 발트 공국이나 오헝, 이탈리아에서도 소수의 자원병을 파견하였으며 미국,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등도 핀란드에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총에 맞아서 죽은 병사보다 얼어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본대와 고립되고 보급이 끊어진 러시아 병사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핀란드군은 철저하게 방어에 유리한 자연 지형을 기반으로 모티 전술(모티는 핀란드어로 큰 통나무를 장작용으로 쓰기 위해 잘게 쪼개놓은 것을 뜻함)을 구사하였는데, 말 그대로 통나무를 조각내듯 러시아군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방식이었다. 핀란드의 울창한 삼림과 엉망이었던 도로 사정에 스탈린의 조급한 공격명령이 더해지면서 러시아군의 영역은 면이라기 보다는 선에 가까운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핀란드군은 좁은 진격로를 전면 참호전 형태로 막는 것에만 주력하면서 후방부대 혹은 보급대를 기습했다 빠지는 것을 반복했다. 이렇게 하면 선의 일부가 떨어져 고립되는데, 이때 이 떨어진 조각보다는 큰 별동대가 고립된 적을 타격하여 신속히 섬멸하고 다시 도주하곤 했다.

특히 12월 9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계속된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25,000명을 넘는 사망자를 내며 대피해를 보자 전쟁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걸 본 세계는 러시아군을 비웃고 핀란드에게 갈채를 보냈으며, 타임지는 사빈코프를 손바닥만한 나라한테 얻어터지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 공로로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러시아군의 재반격

이는 사빈코프를 상당히 당혹하게 했고, 결국 사빈코프는 다차[16]에서 총지휘관 미하일 레비토프와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이후 미하일 레비토프는 해임되었고, 티모셴코로 교체되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1939년 봄이 되자 티모셴코의 지휘 아래 자신들의 지난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기면서 대규모 공습을 실시하며 6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해 총공격을 감행, 마침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이후에 핀란드는 코트카까지 밀리자 헬싱키, 투르크의 남부 지방으로 후퇴해 방어하기로 한다. 하지만 신임 총지휘관 티모셴코의 지휘아래 러시아의 보급상황도 남부지역에 한해서 어느정도 나아진 상황이였고, 핀란드군의 방어선은 계속해서 무너져갔다. 1940년 가을에는 헬싱키에서 약 50km 떨어진 지역인 라티까지도 점령된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독일과도 전쟁중이였고 독일에서는 베를린 공방전이 진행중이였는데, 10월 29일 러시아의 1차 공격이 저지되자 사빈코프는 핀란드쪽 군사를 독일로 돌리라고 명령한다. 이는 항복하기 직전이였던 핀란드가 기적적으로 살게되는 악수가 된다. 사실 사빈코프 입장는 1941년에는 핀란드에 거의 80만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군대를 투입했던 상황인데다 서부전선에서의 진격속도도 느려지고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긴 했다.

이후 전선은 포리-탐페레-포르보 라인으로 고착화되었고, 양국의 소모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핀란드군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놀라운 교환비를 내며 선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미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9만명에 가까웠고 이는 핀란드군 병력의 25%를 넘는 심각한 피해였다. 1942년 탐페레 함락 직전의 시기에는 소년병과 노인들, 그리고 산업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남겨놨던 비숙련병까지 징집해야 했다. 또한 탄약 등의 군수 물자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이때 핀란드 정부에서는 항복하냐 마냐에 대한 토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미인들의 저항과 라플란드 전쟁

소강기

핀란드의 역습과 계속 전쟁

그러나 러시아군은 핀란드부터 해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서부전선, 오스만 전선, 극동의 대한제국 방면에서도 전쟁을 벌였기에 이 모든 곳에서 공세 종말점을 맞이하게 된다. 독일은 단치히를 점령해 비스툴라 회랑을 통해 육로로 쾨니히스베르크에 보급품을 보급할 수 있게 되어 진행중이던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의 포위망을 사실상 뚫은 상태였고, 오스만 제국 역시 캅카스를 뚫고 진격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는 핀란드 전선의 50% 이상의 군대를 빼버렸고, 핀란드는 1943년 1월 국내 인구 4위의 대도시 비푸리를 점령하고 페트로그라드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1944년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슈비네뮌데 회담에서 핀란드는 카렐리야 및 콜라반도를 할양받는다. 이후 1944년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부인 은색 여우 작전이 전개되면서 핀란드 영토 전역을 회복하고 콜라반도, 카렐리야를 점령, 1945년에는 페트로그라드까지 점령하고 1945년 5월 9일에는 러시아가 항복하며 전쟁이 끝나게 된다.

결과

핀란드는 기존 영토의 약 50%에 달하는 영토를 러시아에게서 얻어냈다. 우주방어와 치밀한 외교전을 통해 조국을 구하고 오히려 새로운 영토까지 얻은 만네르헤임은 지금까지도 핀란드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핀란드의 외교는 약소국이 현실주의 외교를 통해 강대국에게 승리를 거둔 사례로 정치·외교학 저서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전쟁 기간 동안의 핀란드군은 전사자 약 5만 5,000여 명, 부상자 8만 5,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러시아군은 전사자 24만 7천 명, 부상자 36만 9천 명이라는 경이적인 인명피해를 냈다. 부대 병력의 30%가 사상으로 전투능력을 상실하면 즉각 후방 철수 및 재편성이 필요한 상황으로 간주하는데, 개전시 러시아가 투입한 병력이 54만명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서류상으로도 참패했던 셈이다. 또한, "핀란드인들은 전투종족"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득을 얻은 이들이 또 있는데, 바로 사미족이다. 러시아군의 맹공에 핀란드가 북부 지역을 포기하고 남부지역에서 수비에 집중하자, 핀란드 최북단에 있던 사미인들이 일어나 숲과 호수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비록 끝까지 대항했음에도 러시아군의 공세에 의해 사미인들의 저항군은 와해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전후에 그 공로가 인정돼 이후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한편 핀란드 국민들은 이 전쟁 이전까지는 핀란드를 사실상 속국 취급하다가 막상 핀란드 국경에서 전쟁이 터지자 중립을 표방한 이웃나라 스웨덴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꼈다. 사실 스웨덴 역시 자원병을 파견하고 적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등 겨울전쟁에서 큰 도움을 주었지만, 이는 스웨덴 국민 개인 자격이었고 스웨덴 정부는 중립을 지켰다. 핀란드 입장에서는 600년 가까이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서 받다가 고작 겨울전쟁 20여년 전(1917년)에 독립했고 스웨덴이 중립을 유지한 것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2차 벨트크리그가 터진 이후 인터네셔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을 멸망시켰을때 꼬숩게 생각한 국민도 몇몇 있었다고 한다.

이후

또한 러시아는 개전 후 국제연맹에 의해 침략자로 낙인찍혀 1939년 8월 14일 축출되었다. 물론 몇개월 뒤 2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하고 난 뒤 국제연맹은 유명무실해졌기에 딱히 영향같은건 받지 않았다.

겨울전쟁 이전의 핀란드는 중립국가를 표방하였으나 전쟁 이후에는 완전한 친독 국가가 된다. 독일의 지원이 없었으면 전쟁을 이기지 못했을테니 당연하긴 하다. 또한 핀란드인들은 러시아를 자신보다도 못한 2류국가로 취급하거나 정치판에도 러시아의 협박같은건 완전히 무시하는 등의 기조도 생겨났다.

평가

겨울전쟁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섣불리 전쟁을 일으켰다가 이득은커녕 완전히 패배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 영상을 보면 겨울전쟁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핀란드는 전국민이 일치단결하면서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 또한 그에 대한 보상격으로 기존 영토의 50%를 새로 획득했다. 압도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그토록 열심히 싸우고 결국 승리하면서 거두면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아내고 오히려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기타

러시아군의 굴욕은 여기서부터 시작. 사진에 나온 격파된 전차는 쌍포탑 사양 초기형인 T-26A(또는 T-26 obr.31). 더불어 이 전쟁에서 핀란드군이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윗 문단에서도 설명했듯이, 핀란드-러시아 전쟁에서 핀란드인들은 러시아군 폭격기가 떨어트린 폭탄을 "몰로토프의 빵" 이라 부르면서 조롱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몰로토프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우리 러시아가 가난한 핀란드에게 빵을 공수해주려고 비행기를 띄운거임." 이라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기만전술을 펼쳤던 것에 핀란드인들이 어이없어하며 분노했기 때문에[17] "니네 러시아이 우리 핀란드한테 빵을 줬으니까 우리가 주는 술도 한 잔 마셔야지? 옛다! 빵값이다!" 라고 비꼬면서 화염병을 만들어 러시아의 전차에게 투척한 것이다.

핀란드군의 전설적인 저격수 시모 해위해.
저격 시 적에게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준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통칭 '겨울 악령', '하얀 죽음', '백사병' 등 각종 이명을 보유하신 괴물 저격수 시모 해위해가 유명하다. 이 외에도 400명 이상을 저격한 것으로 알려진 핀란드 저격수 술로 콜카(Sulo Kolkka)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바실리 자이체프의 라이벌로 유명한 에르빈 쾨니히와 더불어 실존성이 모호한 저격수로 유명하다.[18]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핀란드 국민들이 보이는 모든 도로 표지판에 '모스크바'라고 써놓고, 진격하던 러시아군이 이걸 보고 '어? 잘못 가고 있네?'라고 생각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길 바랐다고 한다.

한편, 핀란드군은 일종의 독특한 전자전(재밍)도 수행했는데, 러시아군이 전파를 이용해 원격으로 조종해 폭파시키는 지뢰를 설치하자, 기폭 주파수가 유사한 폴카 음악(Säkkijärven polkka)을 라디오 방송으로 틀어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다른 군용망과 특수 전파도 아닌 일반 라디오 방송망과 폴카 음악(...)이라는 점에서 어이없어 보이지만 상당수의 지뢰가 어처구니없어보이는 이 작전에 무력화되었다.

소시지는 겨울 전쟁의 신 스틸러에 등극했다. 소시지 덕에 핀란드군은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관련 링크

톨바예르비 전투 수오무살미 전투 링크 1, 링크 2 콜라 전투

매체에서

겨울전쟁 (영화) - 1989년작 핀란드 영화로, 본토에서 개봉 즉시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고, 해외 각지로 수출되어 대히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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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핀란드의 대외전쟁 (빌레펠트) 틀:러시아군의 대외전쟁 (빌레펠트) 틀:러시아-핀란드 관계 관련 문서 (빌레펠트) 틀:핀란드 관련 문서 (빌레펠트)


  1. 핀란드의 육지와 해상의 요충지를 비롯한 영토 상당수를 내놓으라는 그야말로 날강도 짓이다.
  2. 핀란드의 옛 수도이다.
  3. 현재 핀란드의 수도이다. 이 당시에도 인구와 도시 규모에 있어 핀란드의 최대 도시였다.
  4. 핀란드의 유서 깊은 제2의 도시로 당시 핀란드 경제의 중추인 남부 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5.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기간을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기에 그 뒷일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6. 당시 핀란드군이 배치했던 야포 중 마이닐라에 사거리가 닿는 장소에 배치된 야포는 없었고, 러시아의 역사가 파벨 압테카르가 러시아군의 일일 보고를 열람한 결과 마이닐라 포격 사건 당시 러시아군의 주장과는 달리 인명 손실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니키타 흐루쇼프도 회고록에서 해당 사건은 그리고리 쿨리크 원수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서술했고, 1994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해당 사건이 러시아 측의 전쟁 도발 행위의 일부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7. 독일과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만든 방어선이다.
  8. 현역병 뿐만 아니라 예비역, 퇴직 군인을 모두 포함한 수치
  9. 비슷한 사례로 고수 2차전쟁이 있는데, 수서기록에 따르면 수나라는 전투병력 113만, 보급병력 200만을 동원했는데, 당시 고구려 인구는 약 70만호(구당서 기준) 300만명으로 추정된다. 수나라는 보급병력도 포함하면 고구려 인구보다 더 많은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10. 33대 중 26대 도착
  11. 개전 이후 해방전함은 투르쿠 항만 대공 방어에 동원되기도 했다.
  12. 라도가 호수 북부는 만네르헤임 선 동쪽에 위치하고 핀란드 전체로 볼 때는 남부지역이다.
  13. 그 유명한 '몰로토프 칵테일'
  14.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지방은 오히려 여름 평균 최고기온 26도 정도로 온난하다.
  15. The Second Book of General Ignorance, Faber and Faber, 2011, p.76, ISBN 978-0-571-26965-5: When the hand-held bottle firebomb was developed to attack Soviet tanks, the Finns called it the "Molotov cocktail", as "a drink to go with the food"
  16. 러시아의 겨울 별장.
  17. 이 당시에 러시아가 연 10%대의 고속성장을 달리고 있었지만 핀란드가 러시아보다 1인당 GDP가 더 많았기 때문에 국가전체적으로 보면 모를까 1인당으로 치면 핀란드가 러시아에 꿇릴상황은 아니었다.
  18. 영어 위키백과를 기준으로 하면, 수로 콜카는 별개 문서를 가지고 있고, 2차 벨트크리그 저격수로도 꼽히지만, 본문에서 에르빈 쾨니히와 함께 실존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가공의 저격수 분류에 에르빈 쾨니히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다만 2차 대전 저격수 틀에서 apocryphal(사실이 아닌듯한)이라는 표기가 있는 에르빈 쾨니히와 달리 이 사람에게는 그런 표시가 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