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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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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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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 대공세 (벌지 전투) Battle of the Bulge/Ardennes Counteroffensive Unternehmen Wacht am Rhein[1]/Ardennenoffensive La bataille des Ardennes, Opération Wacht am Rhe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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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낫질 작전의 일부 | ||||||||||||||||||
날짜 | 1943년 12월 16일 ~ 1944년 1월 25일 | |||||||||||||||||
장소 | 아르덴 숲 일대 | |||||||||||||||||
결과 | 독일의 승리 | |||||||||||||||||
영향 | 독일의 아르덴 숲 돌파 성공 낫질 작전 성공의 결정적인 역할 프랑스 코뮌의 패망 가속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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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의 한스 |
개요
전투 당시의 지도 |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알프레트 요들 독일군 SOK 작전부장. |
제2차 벨트크리그 중인 1943년 12월 16일부터 1944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제국군의 겨울 대공세인 황색 상황의 낫질작전으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영미권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룬트슈테트 공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전세를 역전 시켜가던 독일군이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인터내셔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며 아르덴을 돌파하고 낫질 작전을 성공 시키게 된다. 낫질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인터군을 완전히 분쇄해버렸다. 이렇게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은 독일군은 동부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 시킬 수 있게 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배경
인터내셔널군의 회심의 한방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이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고, 곧바로 개시된 역습에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독일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베네룩스까지 싹 밀릴 상황에 처하자 인터내셔널군은 제방을 폭파해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동부전선에서 봄의 새싹 작전의 개시를 코앞에 둔 독일군의 입장에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와 협상군이 스페인 남부와 이탈리아에 상륙한 시점에는 서부전선의 인터내셔널군은 132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2] 그나마 남아 있는 사단의 병력도 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3] 그나마 베네룩스의 제방을 폭파해버린 덕분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느정도 막아주었지만, 이 방어선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독일 입장에서도 언제까지나 맘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던 것이 독일은 서부전선 보다 동부전선에서 아예 알박기를 시도하려던 러시아를 몰아내는 것이 더 급했던 상황에서 서부전선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었다. 이에 빌헬름 3세는 그때까지 서부전선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던 독일군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전격적으로 돌파하여 베네룩스 지역의 인터내셔널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일련의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확히는 인터내셔널군을 최대한 몰아세워서, 인터내셔널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해 버리면 인터내셔널군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것.[4]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 이후 독일군의 공세에 서서히 밀려가던 인터내셔널군은 독일 북서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던 철도와 항구 따위의 기반시설들을 직접 파괴하거나 최대한 사수하여 독일군의 보급 거점 확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인터내셔널군이 붙들고 있던 몇몇 철도 중심지들은 인터내셔널군이 항복하고 나서야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뤼티히 작전을 통해 네덜란드 강습을 시도한 것도 베네룩스 3국 연안의 항구 도시들과 제방들을 인터내셔널의 초토화 작전 이전에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뤼티히 작전으로 독일군은 독일 북서부에서 인터내셔널을 몰아냈으나 최종 목표였던 암스테르담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아른헴에서 돈좌되면서, 인터내셔널은 방어선을 안정 시킬 수 있었고 독일군의 진격은 예정보다 훨씬 둔화됐다. 간신히 방어선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인터내셔널의 상황도 녹록치 못했다. 베네룩스는 이제 최전방이었고, 카이저마리네의 방해와 루프트바페의 집요한 공습으로 프랑스 북부의 주요항구들을 사용하기 어렵게 되면서 프랑스 코뮌과 함께 인터내셔널의 주축이던 브리튼 대륙원정군의 보급이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진작에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한 안트베르펜만이 사실상 유일한 최전방 보급 창구였다. 여기를 잃으면 노르망디에서부터 보급품을 끌고 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동부 사막군과 비슷한 보급 거리를 달성한다.[5] 그러므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회심의 일격을 통해 안트베르펀을 확보한 후 베네룩스의 인터내셔널군을 괴멸 시킨 후, 여유 병력을 확보하여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향한 총 공세를 감행할 셈이었다.
거기다 빌헬름 3세는 다국적군인 인터내셔널군의 특성상 각국 수뇌부의 협의를 거치고 조율을 마친 다음에야 부대를 배치할 수 있다는 약점을 인식하고 있었다.[6] 이는 "기습 공격으로 우위를 장악한 뒤 인터내셔널군의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 전부 섬멸해 버리면 된다"는 황색 상황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 빌헬름 3세와 OHL의 예상과 같이 전황이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인터내셔널의 지휘에 혼선을 겪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시작한 1939년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지만, 그 당시에는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니 그리 부각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황이 서서히 기울고 있는 43년의 시점에선 크고 작은 모든 상황에서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일단, 명목상 인터내셔널군에서 의전서열이 가장 높은 것은 모리스 가믈랭이었으나, 실질적으론 프랑스 코뮌의 병력에 밖에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브리튼은 리델 하트를 앞세워 지휘권 경쟁을 하고 있었다.
- ↑ 라인을 수호하라
- ↑ 참고로 개전 당시 인터내셔널의 군대는 140개 사단을 넘었고,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250개 사단에 육박했다. 아예 반토막이 나버린셈.
- ↑ 여기서 그나마 정예로 여겨진 브리튼과 프랑스 코뮌의 군대만 계산하면 92개 사단 밖에 되지 않았다.
- ↑ 다른 항구도 많은데 왜 굳이 안트베르펀이냐 한다면 43년에 이르러서는 인터내셔널의, 특히 프랑스 코뮌의 철도와 항구는 협상국과 라이히스팍트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칼레나 됭케르크는 진작에 마비된지 오래였고 그나마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하여 이 공습의 피해를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었던 안트베르펀을 잃는다면 브리튼은 유럽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자국의 군대에게 원활한 보급을 전달할 수 없었다.
- ↑ 게다가 이 보급 문제는 백년전쟁과 과정이 거의 똑같다.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캉 먹고 뭐 먹고 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 보급 문제로 항구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 ↑ 물론 팍트군은 인터내셔널군이나 협상군 보다도 많은 국가에서 파견한 병력으로 이루어져있었으나, 베네룩스의 함락과 동부전선의 개전 이후에는 이전의 제1차 벨트크리그과 같이 서부전선은 사실상 독일군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